추석을 맞아 고향에 가서 아버지를 비롯한 조상님들 차례를 모신 후 아버지가 계시는 선산으로 성묘 다녀왔다. 돌아가신 지 5년이 되어 아버지 산소 봉분을 덮고 있는 잔디가 뿌리를 잘 내려서 아버지 마지막 집이 포근해 보였다. 벌초를 미리 한 탓에 드문드문 잡초도 나 있었지만 이발한 직후보다는 조금 덧 자란 머리처럼 오히려 자연스러웠다.아버지 머무시는 옆집은 큰아버지와 종조부, 증조부께서 계시고, 조부는 큰댁 앞산에 계신다. 큰 형님은 윤년이 되면 조부님도 아버지 옆으로 모셔와야겠다고 말씀하셨다.저 멀리 서쪽 하늘 아래 두타산이 보이고
일반 직장인들도 그렇겠지만 개원 의사들은 점심시간이 고역이다. 규모가 있는 병의원의 경우에는 구내식당에서 메뉴를 정하여 차려주는 대로 먹으면 그만이지만, 동네 개원 의사들은 오늘은 또 무얼 먹나? 하는 고민을 하며 근처의 이 식당 저 식당을 옮겨 다니며 점심을 해결한다. 한편으로는 점심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햇빛을 보며 바깥에 나가는 시간이므로 식사 후에 운동 삼아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동네를 돌고 있는데 길거리 전봇대 옆에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옛 스님들이 남겨놓은 선시들을 읽다 보면 선뜻 이게 무슨 ‘관념 덩어리’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딴은 본래의 불법을 작위적으로 ‘왜곡’시킨 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물론 선시라 해도 그 뜻이 손에 잡힐 듯한 것들도 더러 있다. 하나 일반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자면, 대부분 그 함의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선시의 수사법이 본래 그런 것인가. 누구의 말대로 우리의 상식이나 고정된 관념을 뒤흔들어,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기에 그렇게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여기에
다시 봄이다. 지난 해 가을을 보내며 또 한해가 속절없이 저물어 가는구나, 하고 느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어느 덧 다시 봄이 찾아온 것이다. 참으로 쉼 없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세월이다. 나이가 더해 갈수록 세월의 흐름은 더욱 더 급물살을 타는 것만 같다. 이럴 바엔 아예 시간을 모르고 사는 게, 속 편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 몸과 마음을 이 세상에 맡기고, 인연 따라 닿는 대로 미련 없이 살다 가면 상선(上善)일 거란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물론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커다란 우
# 파리의 꿈탁자 위엔 투명에 가까운 하늘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배가 고픈 파리 한 마리는 그것이 사람들이 남겨둔 밥그릇인가 싶어 얼른 그 백자에 날아와 앉았다. 그러나 백자위에 앉자마자 파리는 금세 실망했다.“보이는 것과 달리 직접 입 촉수를 대어 보니 아무 먹을 게 없구먼.” 파리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먹다 남겨놓은 게 있을 법 한데 이렇게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는 것이 있나. 그저 빈 그릇일 뿐이네. 참 이상하네. 알기 어려운 일이야.”햇빛에 반질반질, 깨끗하게 빛나는 백자에 대한 호기심에 파리는 잠
버스터미널에 나와 시골집으로 갈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 긴 의자에 홀로 앉아 유리창 밖 풍경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다. 80세가 넘어 보이나 여느 시골 노인네모양 남루한 옷차림이다. 병약해 보인다. 다른 의자엔 젊은 사람들이 두어 셋 모여 앉아 있는데, 그 노인 옆은 빈자리다. 시간이 좀 지나도 그 노인 옆 자리엔 사람들이 좀체 앉으려 하지 않을 기색이다. 이런 모습의 관찰에 따른 연상이다. 그 노인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의 시각에 대해서다. 몇 가지 부류가 떠오른다. 혹자는 그를 더럽거나 지저분한 존재로 생각할 것이다. 가난해 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