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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왜곡’의 선시 I

  • 입력 2014.09.15 13:51
  • 기자명 신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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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스님들이 남겨놓은 선시들을 읽다 보면 선뜻 이게 무슨 ‘관념 덩어리’인가, 하는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딴은 본래의 불법을 작위적으로 ‘왜곡’시킨 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물론 선시라 해도 그 뜻이 손에 잡힐 듯한 것들도 더러 있다. 하나 일반의 상식적인 눈으로 보자면, 대부분 그 함의를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경우가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선시의 수사법이 본래 그런 것인가. 누구의 말대로 우리의 상식이나 고정된 관념을 뒤흔들어,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기에 그렇게 표현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여기에 일반 상식으로 이해하기에 아주 난감한 선시가 한 편 있다. 우리의 상식적 사고방식을 ‘희롱’하는 게송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불러일으키는 시다. 나름 ‘이성적 토대’ 위에서 검토를 해보려 한다.

빈손에 호미 들고 空手把助頭,
물소 등에 올라앉아 步行騎水牛
다리 위를 지나는데 人從橋上過,
다리는 흘러가고 물은 흐르지 않네. 橋流水不流 

선가에서 널리 알려진 게송이다. 이 시는 부대사(傅大士 497~569)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대사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 사람이고 재가불자다. 동양거사라 불리기도 했다. 당시 법력을 내외에 떨쳐 불심천자로 칭송되어졌다. 양무제가 그에게 귀의해 올 정도였다고 한다.
이 게송은 첫 구절부터 심상치가 않다. ‘빈손에 호미를 들고’란 말이 그렇다. 그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걷고 있는데 ‘소 등에 타고 있다’고 그는 태연히 읊고 있다.

무슨 말이 이런가. 우리의 상식적인 인식을 뒤흔들겠다는 의도적인 역발상인가. 아니면 우리의 현재의 인식구조를 뒤집어 보라는 암시로서 초현실적 수사법을 활용한 것인가. 만일 그렇다면 어떤 작의에서 그는 그렇게 표현을 한 것인가. 생각건대 아마 경계/현실/상식을 떠난 자유로운 마음의 경지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으로 감지가 된다. 빈손에 호미를 들고 있다는 것은 실제 손에 호미를 들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빈손이어 서다. 그렇지만 빈손에 호미를 들고 있다는 것이 새로운 ‘사실’로도 다가온다. 표면적 수준에서 해석하자면 그렇게 마음먹으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의 해명을 통해, 비추어 생각해 보는 가운데 그 이해가 더 해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빈 마음에 이런저런 것들을 다 짊어지면서 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의 이 마음속에는 그간 배우고 기억하고 익혀왔던 정보나 지식들이 저장되어 있다. 세상살이란 이런 앎을 이용하고, 활용도 하면서 지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앎의 측면에서만이 아니다. 정서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는 기쁜 일이 있을 때는 기쁜 감정을 누리고, 슬픈 일을 겪을 때는 슬픈 감정을 느끼며 지낸다. 사람 각자에겐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그에 대해 반응을 하는 나름의 감정 양식들이 있다. 이 역시 학습된 감정 반응의 패턴일 것이다. 말하자면 정서 반응에 대해서도 우리는 나름의 소프트웨어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극이 내부에서 생기든 외부에서 온 자극이든 그에 대한 반응(response)이나 작용(reaction)은 모두 다 우리가 기억하고 익혀 왔던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있겠지만, 쉽게 기억할 수 없는 (무의식적으로 작동되는) 프로그램도 있다.

이런 이해의 바탕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부르거나 고정된 관념이라고 여겨지는 생각들은 그러한 프로그램들, 그러니까 우리의 개인적/집단적 에고에 편입된 ‘자신의 생각/감정/느낌/판단 같은 것들의 총체’라고 범주화시킬 수 있다. 요컨대 우리의 빈 의식에 깔아놓은 에고의 프로그램 가운데, 그 시대에 사회적으로 ‘통용’이 허용된, 또는 ‘공용’이 되고 있는 프로그램을 상식 또는 고정된 관념이라고 본다는 말이다.
물론 상식이나 고정된 관념들은 우리에게 익숙해진 언어적 습관이나 옳고 그름/선악/좋고 나쁨 같은, 개인적/집단적 판단 행위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아 형성되어졌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의 성질을 대략 서로에게서 드러난 일상의 행동이나 언어적 표현, 아울러 그에 따른 정서적 반응 같은데서 어렵지 않게 알아낼 수가 있다. 한 마디로 상식이나 고정된 관념이란 동시대 인간들이 함께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시대, 그 사회 집단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앎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런데 선(禪)에서는 알다시피 이런 앎, 곧 에고의 프로그램을 환화(幻化)로 본다. 요즘 말로 바꿔 보면, 일체의 앎이 다 허망한 관념일 뿐으로 본다는 말이다.

사실 동물들의 에고에 편입된 프로그램이란 대부분 생존을 위한 것들이다. 복잡하지 않은 동물들의 에고 프로그램은 죽음의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이 많을 것이다. 사람의 경우는 언어를 사용하는 까닭에 다른 동물과 달리 그 욕망 체계가 복잡다단하다. 동물과 달리 사람의 경우엔 명예, 존경, 이해, 낙관, 용서, 조화, 양심, 깨달음, 평화와 같은 부분들을 갖고 있는가 하면, 동시에 자부심, 자존감, 자기애, 성취욕, 수치심, 굴욕, 열등감, 갈망, 복수 같은 감정들도 상존해 있다.
우리가 인간적인 속성들이라 여기고 있는 이런 부분들은 생래적인 것인가. 아니면 학습된 것들인가. 아마 동물적인 속성들과 학습의 영향들이 혼재되어 나타난 것이리라.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자면, 이런 속성들은 인류사에서 동물적인 속성의 인간들이 집단생활을 해오면서, 나름 최대의 적응을 도모하기 위해 발전시켜온 진화의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적 속성들은 생래의 유전적 프로그램에서 온 것도 있겠지만 오랜 세월에 걸쳐 사회적 관계에서 학습되어진 내용의 것들이 함께 얽혀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인간적인 속성이나 본성들은 어떻든 다 우리의 의식이라는 이 하드웨어에 프로그램화 된 내용들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아마 불가의 입장에서 인간의 본능이라는 말을 안 쓰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가령 우리는 사회 일반에서 ‘본능’이라는 말을 쓸 때, 의당 ‘본능’에 따른 속성들은 누구나 다 갖고 있는 것. 그래서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이 누구나 ‘상식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당연한 감정/행동이라 여기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존재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본능적인 부분들 역시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인 것으로 본다. 이 말은 본능의 이름으로 혹은 본능 때문이라는 핑계로 인간 삶의 질을 정당화/합리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한다.

본능적 성향이라는 것도 생물학적 영향이나 유전적 소인이 기여하는 바가 클 테지만, ‘본능’ 역시 살펴보면 DNA를 구성케 하는 여러 분자와 호르몬 등의 인과 관계에서 산출된 결과다. 그래서 소위 본능이라는 것도 생물학적 성질이 강한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봄이 불가의 견해로 해득된다. 다시 말해 본능/본능적 행동도 우리의 앎/의식의 소프트웨어라는 영역에 귀속시킬 수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깨달음이란 말은 분명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고서야 성립이 될 수 없는 말이다. 물론 근본적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의 본성이란 것도, 그런 말의 의미란 것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게 선의 관점이기도 하다. 인간의 본성이란 것도 역시 하나의 현상일 뿐. 궁극적으로 거기에서 그 궁극의 가치/성질/자성이라는 것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층 의식 수준에서 드러나는 경계, 즉 제반 인간의 행동/현상/심리에 대해 우리가 다원적 측면에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인생/우주에 대해 기본적인 수준에서조차 이해한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요는 우리 의식의 하드웨어에 심어져 있는 세상/인생/우주에 대한 소프트웨어가 ‘실체’가 없는 프로그램이지만, 동시에 이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원리/인과의 맥락/자연적 귀결 등에 대한 앎을 결코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 그래서 불가에서 하근기니, 중하근기니, 상근기니 하는 말도 다 이런 이해의 맥락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해서 의식의 소프트웨어에 대한 상식이 형편없이 부족한 경우라면, 그는 곧잘 하근기로 취급되어질 수 있겠다.

의식의 소프트웨어란 다른 말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할 것이다. 이 현실을 딛고 서서, 이 현실이 공하고, 공하지만 반드시 공하다고만 볼 수도 없는 이 현실이 있기에, 즉 너와 내가 따로 없지만, 동시에 너와 내가 따로 있는 것이라는 ‘역설(paradox)’을 알기에, 우리는 내면에서 그처럼 공과 현실이 함께 소통하는 ‘통일장’의 영역에서 산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삶이 다름 아닌 바로 ‘하나가 된 삶’이라 할 것이다.

의식의 소프트웨어 없이 의식의 하드웨어는 존재의 의미가 없다. 역으로 그 하드웨어가 없다면 그 소프트웨어라는 말도 성립이 불가능해진다. 다만 우리는 일체의 소프트웨어라는 것은 의식의 하드웨어라는 마음에서 일어난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구구하게 관련 과학 이론 같은 것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 ‘현상 일반’에 대해 우리의 마음은 선험적으로 스스로 이미 잘 알고 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제반 현상이란 결국 심적 이미지를 포함해, 밖으로는 말/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하는 ‘여러 관념’들인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그 관념들이란 게, 살펴보면 허공을 떠도는 ‘말’처럼만 비쳐지기도 하는데, 마땅히 거개가 생명이 없는 ‘사구(死句)’나 알음알이들로 여겨질 만하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