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무상무념으로 걸어보는 하남 위례성길

억새풀 사이 오솔길을 손끝의 촉각으로 교감하면서

  • 입력 2014.09.15 14:01
  • 기자명 임용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맑은 날이면 이만 한 거리에서도 충분히 내다보이는 예봉산과 검단산이 오늘은 전혀 보이질 않을 만큼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고 있다. 이 시각이면 두 산사이의 팔당댐 하류의 두미협곡에서 산허리를 휘감고 도는 운무(雲舞)가 기막히게 멋있는 풍경을 만들어 줄 텐데… 그나마 아침바람이 코끝에 산향(山香)을 실어다주며 잘 정돈된 강변 길가엔 채 가시지 않은 이슬을 머금고 더욱 선명한 진홍빛의 패랭이꽃들이 옹기종기 모여 나를 보고 활짝 웃어주는 덕에 마음이 싱그럽다. 안개에 가려진 태양의 친구가 없어서일까? 아니면 자신을 푸르게 감싸줄 푸른 하늘이 없어서 일까? 짙은 회색빛 얼굴로 조용히 흘러가는 강물이 어쩌면 지금의 내 불편한 마음과 같기라도 하듯… 가끔 멀리 떨어진 도로를 달리는 차량의 굉음이 들리기는 하지만 도시의 소음들을 한강과 푸른 녹지가 보듬어 버리는 듯 고요했다. 오솔길을 따라 걷는 길이 한참을 걸어도 코끝을 스치는 상큼한 바람과 삐죽 튀어나온 억새가 미세하게나마 율동을 해주고, 가끔 꿩인지 새인지 푸득 날아올라 걸음을 멈칫하게 하는 정겨움 덕에 지루하지 않았다. 처서가 얼마 남지 않아서 일까? 아침 일찍 느껴지는 선선함도 가을이 가까이 와 있음이 감지된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래카를 외친 것처럼 멋진 비책은 없을까?
얼마 전 선배로 인해 분했던 마음들이 겨우 아물어 가는데, 사과도 아니고 그때의 일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연락이 오니 예전의 분노와 싫었던 감정이 되살아나며 피할 수 없는 불편한 대면에 복잡한 마음이다, 오랜 세월 지척에서 봤을 땐 꽤나 점잖고 합리적인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나 단체모임의 사안을 함께 처리하려다 보니 도무지 소통부재와 아집, 편협적인 사고의 성향이다. 예전의 분노도 안 풀린 탓도 있지만 사준다는 진수성찬도 함께하기 싫은 그런 분께서 또 식사하며 나눌 말이 있다는 연락에 비껴가고 싶은 이 부담스런 상황대처의 지혜를 얻기 위해 허리춤까지 자란 억새풀들과 손끝의 촉각으로 교감하면서 그렇게 얼마간의 오솔길을 무상무념으로 걸었다. 유래카를 외치며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쳐나왔다는 아르키메데스의 명쾌한 비책이 없을까?
항상 그래 왔듯이 손끝의 촉감으로 자연에게 답을 구하려는 나만의 습관이자 방식이다, 그 플라시보 효과에서 어느덧 분노의 가슴은 점차 따뜻하고 촉촉하게 안정되어가고 있었다.

그 화두의 답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일상 중 사람과의 관계에서 헤아릴 수 없이 일어나는 사안들마다 독특한 문제와 해법들을 법을 공부했다는 사람들과 또는 주변의 사람들이 조언을 하지만 그 무엇 하나도 ‘속 시원한 답’은 없다. 흡족과 불만으로 양분되기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모두에게 영혼이랄까? 즉 자신 속에 내적 스승이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가끔 종교적 영화나 성인들의 전기를 읽다보면 제자들에게 ‘화두’만을 제시하고 제자들은 그 답을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 그 화두의 답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결국 자신의 삶 중에 일어나는 문제들을 스스로 자신 속에서 찾아냄으로서 남 탓에서 비롯된 불만과 미움들이 사라지고 후회가 남지 않아 마음의 평온을 유지한다는 의미이리라 짐작된다. 자신만의 스승을 만나려는 노력은 마음을 열고 넓은 자연으로 나와 걷는 것이 아닐까? 걷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의문이 풀리기도 이해가 되기도 묘안이 떠올라 가슴이 따뜻해짐을 느끼게 되는 것을 수 없는 경험을 통해 터득했다.

강바람과 억새, 그리고 고추잠자리가 펼치는 무도에 흠뻑 젖는 길
철새들이 강에 모여 푸득푸득 물보라를 일으키며 전진하는 무도에 흠뻑 젖어보면서 자연친화적으로 잘 조성된 시원스런 강변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한 것이 어느덧 억새 숲의 위례길을 지나 팔당대교근처에 다 달았다, 건너편과 하남 쪽은 아파트 숲을 이루고 있으나 미사리 조정경기장을 지난 후부터는 이곳까지는 자연스럽게 억새 숲이 매우 광활하게 분포되어 철새도 모이고 생태 문화적 가치도 높아져 현재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한강종합개발에서도 미사리가 그나마도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신석기시대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부터 청동기, 원삼국, 백제,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온갖 유물들이 미사리 퇴적층에서 출토되어 역사적으로 보존가치가 충분했기 때문이다. 

300여 마일을 굽이쳐 흘러온 강물이 우리 인생의 삶인 듯
팔당대교(八堂大橋)의 창우동(倉隅洞) 옛 지명은 창고의 모퉁이란 뜻으로 창우리였다. 남한강과 북한강의 뱃길을 통해 올라온 세미(稅米)나 공물들을 보관했던 상창(上倉)과 하창(下倉)이란 창고 자리였다. 팔당(八堂)의 지명은 한강 뱃길의 안전을 빌던 여덟 개의 당집이 있던 곳으로 검단산(657m)과 예봉산(683.2m) 사이인 두미협곡으로 물의 속도 또한 급격히 빨라져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산세가 깊고 수려해 예로부터 8선녀가 내려와 놀던 8곳의 자리에 8개의 당집을 지어 제(굿)를 올리면서 얻은 지명이라 한다. 한강으로 발원지인 강원도 검룡소로부터 시작해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거쳐 강화도 내해인 염하가 만나는 지점까지가 약 514km에 달한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산과 산 사이 협곡을 굽이굽이 휘감아 도는 고난에 지쳐서 일거라며 어쩜 우리 인생의 삶과 동질감을 느껴보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정립한 역사시대에도 이곳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이 살았음이 확인 된 곳이며 백제의 건국 터전의 중심 무대였다. 최근에 학술조사로 드러난 이성산성(二聖山城)은 한강변에 위치한 삼국시대의 토성인 서울시의 몽촌토성(夢村土城)·삼성동토성·옥수동토성·양진성(楊津城)·아차산성(阿且山城)·풍납동토성·암사동토성과 광주군의 남한산성·구산토성(龜山土城), 미금시의 수석동토성과 방사상으로 연관되어 전략적 요충을 이루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성산성의 남쪽에는 춘궁동·하사창동·상사창동의 넓은 평야가 산성을 배후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위치가 이 곳 춘궁동 일원으로 추정되기도 하였다.

오늘의 건강한 시간들, 바로 이 시간들이 유래카였다
이곳은 삼한시대에는 진국(辰國)의 변경지역의 곳을 중심으로 부족국가를 형성하여 200여 년을 지내다 백제 시조인 온조(溫祚)가 토지가 비옥한 이곳으로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으로부터 도읍을 옮겼다. 이후 백제는 이 지역을 근거로 고구려·신라와 삼국이 첨예한 각축 속에서 빼앗기고 뺏는 쟁패를 벌였던 사실들이 1990년 이성산성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에 기록된 “戊辰年正月十二日朋南漢城道使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무진년정월12일붕남한성도사수성도사촌주전남한성…)”이라는 명문(銘文)에도 ‘南漢城’이라는 구절이 보여 확인되었다고 한다. 백제지역의 검단산과 고구려 지역의 예봉산이나 아차산 정상에 올라보면 전문가의 지식을 빌리지 않더라도 누구나 다 공감할 수 있을 만큼 수려한 풍광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거주의 목적이나 군사적 전략 요충지로서 탐이 안날수가 없다. 간단한 청국장 한 그릇을 비우고 내친김에 바로 옆의 검단산으로 향한다. 정상까지 약 1시간 하산 50분 족히 3시간이면 충분히 집에 도착할 시간이다.
초가을의 찬란한 햇빛과 강바람, 그리고 옛 역사의 흔적에서 들리는 숨소리들 그 모든 것이 함께한 오늘의 건강한 시간들, 바로 이 시간들이 유래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