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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몸 표현의 전환점 마련한 화가

  • 입력 2003.06.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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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미켈란젤로와 맞먹는 실력자어려서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티치아노는 약 80년 간에 거친 그의 예술 활동을 통해 수많은 걸작을 창출하였는데, 현재 그가 그린 것이라고 인정되는 작품만도 약 640점이나 된다. 그의 작품의 우수성에 대해 프랑스 로망파 시인이었던 고디에는 ‘그는 활력이 넘치는 예술가로 고뇌나 불안이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힘차고 엄격성도 구비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병 같은 병은 앓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강하고 탐스러운 신체를 지녔으며, 그의 화폭에는 언제나 건강미가 넘쳐나게 반영되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어느 것을 보아도 호화롭고 사는 즐거움과 천진난만함이 넘치곤 하였고, 또 적극적이고 확실한 인생관과 뛰어난 재능을 고루 그의 화폭에 담았으며, 균형 잡힌 배색과 유연한 붓놀림, 그리고 힘찬 탓지로 독특한 그림의 세계를 창조하곤 하였다.따라서 미술 평론가들은 그를 같은 시대의 화가 미켈란젤로와 맞먹는 실력의 화가였으나 미켈란젤로가 하도 알려졌기 때문에 그 그늘에 가리어 빛을 덜 발한 것으로 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티치아노의 관심은 줄곧 회화에만 쏟았는데, 미켈란젤로는 조각이나 건축에도 손을 대었다. 즉 그가 이런 분야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것도 그가 들 알려지게 된 이유일 것이라고 하였다.티치아노는 자기의 언어 구사가 서툴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대단한 지식인도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언어 구사력 부족에 대해서 그는, “화가라는 직업이 말을 잘 하는 것과는 무관하지 않는가?”라고 말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또 지적 능력이 부족하였던 것은, 그의 친구이며 당대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피에트로 아레티노가 도와주었으며 그는 티치아노의 열렬한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티치아노의 막강한 후원자였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의 눈에 들게 된 것도 아레티노의 역할이 컸으며, 그 덕분에 결국은 궁정 화가가 되었다. 종교화를 주로 그리던 티치아노는 이 무렵부터는 초상화도 그리게 되었으며, 그러자 유럽 각 나라의 대소 군주들은 앞을 다투어 그에게 자기의 초상화를 주문하여 그는 초상화 화가로도 유명해졌다. 그래서 티차아노는 일약 국제적 명성이 높아져 소위 ‘예술계 유명 인사’라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의뢰인 명단은 16세기 유럽의 인명사전이나 다름이 없었다. 즉 데스데 가(家)와 곤차가 가는 일찍부터 그의 주 고객이었고, 이어 메디치 가, 다발로스 가, 파르네제 가, 델라 로베레 가 등이 명단에 올라 있었다.그가 그린 이러한 군주들의 초상화와 그 가족들의 초상화는 명화로서 유럽의 각 미술관에서 오늘도 빛을 발하며 전시되고 있다.에로틱한 작품의 교본이 된 그림[2R]르네상스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금지되었던 그림으로의 알몸의 표현이 신화를 표현한 것이면 묵인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종교화 초상화로 유명해진 티치아노도 신화 속에 나오는 여신들을 표현해 여인의 나체화를 그렸다. 델라 르베레 공작의 아들 귀도발도의 주문을 받아 티치아노는 ‘우르비노의 비너스(1538)’라는 주제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데, 그는 스승이었던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1510)’에서 영감을 얻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벌거벗은 여인’이라는 주제로 그렸는데 나중에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그 화제를 바꾸었다. 그것은 그림의 주문자인 귀도발도의 고향인 우르비노에 약 100년 동안 그곳에 있다가 피렌체로 옮겼다. 그래서 화제(畵題)를 ‘우르비노의 비너스’로 게재하게 되었다.조르조네의 그림의 모델은 언덕이 물결치듯이 이어지는 전원을 배경으로 하고, 구겨진 침대 커버 위에 누워있으며, 눈을 감은 채로 나른히 조는 듯한 모습이다. 그런데 티치아노의 그림은 조는 눈이 아니라 거리낌없이 감상자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으나 유혹하는 듯한 여인의 시선,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 음부를 손으로 살짝 가려 오히려 감상자의 시선을 그쪽으로 유도하는 듯한 모습에서 느껴지는 이 작품의 감각적인 성향과 에로틱한 분위기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이 그림은 순전히 개인적인 주문에 의해 그려진 새로운 타입의 세속적 그림이다. 그 보다 앞선 거장들의 작품, 예를 들어 라파엘로의 ‘갈라테아’같은 작품도 나체화이지만 고전적 색채가 강하다. 즉 티치아노 이전의 화가들은 누구도 이처럼 고전과 무관한 배경 앞에서 여성의 성적 이미지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했다. 이 작품 이후로도 티치아노는 감각적 분위기가 넘치는 비너스를 그렸지만 어느 것도 ‘우르비노의 비너스’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이 작품은 서양 미술에서 에로티시즘의 이정표가 되었으며 그 이후 미술 작품에서 여성의 묘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로부터 수세기에 거쳐 티치아노의 누워있는 비너스에서 영감을 얻은 화가들이 속속 등장했고, 그 중에서 선구자를 능가한 화가로는 벨라스케스, 고야, 마네, 피카소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1545년, 50대 중반에 접어든 티치아노는 로마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또 하나의 에로틱한 작품 ‘다나에’라는 그림을 완성하여 추기경에게 선사하였다.티치아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옆에서 보곤 하였던 제자인 팔마 조바네가 말한 것처럼 티치아노는 어떤 작품에서 ‘붓질 네 번으로 아름다운 여인의 몸매의 윤곽선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곧이어 작품은 벽을 향해 돌려 세워놓고 몇 개월 씩 보내기가 일수였다’고 한다.즉 그는 빠른 작업과 느린 작업을 교차하면서, 새로운 작업을 위해 그림의 일부를 문지르거나 더러는 파괴해 버리는 과정이 중첩된 것이 티치아노의 작품이라고 했으며, ‘작품이 끝날 때쯤에 티치아노는 붓보다 손가락을 더 많이 썼다’고 조바네는 말했다 화가의 정성스런 손끝에서 물감이 마치 점토처럼 쓰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의 독특한 화법이었다고 한다.-------------캡션---------------그림에 대한 설명그림 1. 티치아노 작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소장그림 2. 티치아노 작 <다나에> 1545, 나폴리, 카포다몬데 국립 미술관 소장그림 3. 티치아노 작 <오르가니스트, 큐피드와 같이 있는 비너스> 1542,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