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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추억, 감옥의 일상으로 바꿔주마!

과학수사의 핵심, 법의학(法醫學)

  • 입력 2003.06.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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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수사의 핵심, 법의학(法醫學)[1L]기도 화성에서 일어난 부녀자 연쇄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살인의 추억’이 개봉 한 달여 만에 전국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주목을 받고 있다. 대개 살인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들은 비범하기 이를 데 없는 형사와 극악무도한 범인이 쫓고 쫓기기를 반복한 끝에 늘 형사의 승리로 끝나기 마련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엔딩자막이 올라가는데도 범인이 누구인지 조차도 알 수가 없다. 안타깝게 숨진 부녀자들의 영혼은 말이 없고,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있는데... 상황이 이렇게까지 된 가장 큰 이유는 사건당시의 ‘과학수사’부재. 과학수사란 무엇일까?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진 형사가 식은 죽 먹듯 어려운 사건을 술술 풀어나가는 과정이 과학수사가 아니라, 명백한 과학적 사실에 근거해 범인을 가려내는데 일조 하는 것이 과학수사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 과학수사의 핵심에는 바로‘의학’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 대신해 사실을 얘기하는 학문, 법의학(法醫學)이 바로 그것이다.법학(法學)인가, 의학(醫學)인가? 법의학(法醫學), 언뜻 들으면 법학인지 의학인지, 아니면 전혀 이들과 상관없는 분야인지 구분이 안 간다. 법의학은 법률과 관련된 의학이다. 따라서 의학의 한 갈래라고 생각하면 된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당신의 자동차가 어느 날 술 취한 행인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럴 경우엔 아마 수사관과 자동차관련 전문가가 함께 자동차의 피해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감정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술 취한 행인이 당신에게 해를 입혔다면 어떻게 될까? 당신이 다친 정도를 의사가 아닌 수사관이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그리고 물건의 피해와 사람의 피해를 같은 가치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인권(人權)이라는 것은 물권(物權)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존엄한 것이기에, 사람의 피해는 매우 자세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다루는 의학이 필요한 것이고, 법의학이 필요한 것이다.법의학은 범죄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분야에 관여하고 있다. 사람의 몸과 관련된 각종보험이나, 산업현장의 직업병과 산업재해, 아동이나 노인학대 등 무수히 많은 법적인 문제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입은 몸의 피해에 대해 의학적으로 그 피해정도와 원인을 판정하여 법치에 도움을 주는 것, 어쩌면 우리의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법의학이다. 죽은 자의 인권 생각하는 학문법의학이 하는 주된 일은 의학과 치의학, 심리학, 생물학, 생화학, 기계공학 등을 이용해, 사망의 원인, 장애, 손상 및 질병을 조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법의학은 한마디로 사망자의 인권을 보호하는 학문이다. 범죄 피해자로부터 신속하고 정확하게 의학적 증거를 확보하는 것은 범죄자를 빨리 잡을 수 있게 함으로써, 많은 인력과 비용의 낭비를 없애는 것은 물론이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밝히기도 한다.1987년 박종철(朴鍾哲)씨 고문 치사사건은 자칫 심장쇼크사로 결론 내려질 뻔한 사건이었다. 현재 고려의과대학장으로 있는 황적준 교수는 당시 치안본부 측의 외압에 굴하지 않고 고(古) 박종철 군의 사인을 소신대로 ‘경부압박치사’로 발표해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었다. 작년 법곤충학에 대한 번역서 ‘파리가 잡은 범인’을 냈던 황 교수는 인터뷰 중 당시 일을 회상하며 “어떤 큰 일을 했다기보다는 법의학자로서 있는 그대로를 얘기했을 뿐”이라고 말했다.기나긴 논란과 조사 끝에 사건이 종료된 치과의사모녀살해사건이나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대구 개구리소년사건의 경우도,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의 사인을 정확히 밝혀 피해자와 피해자가족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법의학이 큰 활약을 펼친 경우다.조선시대에도 있었다법의학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놀랍게도 우리가 과학이라고는 존재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시대부터 법의학은 존재해왔다. 규장각에서의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도 당시의 검시관이 등장하듯, 조선시대에도 검험제도(檢驗制度)라는게 있어서 사람이 다치거나 죽게 되는 범죄가 발생하면 관리가 현장에 나가 사체를 검사했었다. 물론 고(古) 박종철 군의 경우와 비슷하게, 옥에 감금중이거나 수사중인 죄인이 사망한 경우에도 검험(檢驗)을 실시했다고 한다.조선시대라고 해서 대충대충 검시를 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선 검시를 할 때는 반드시 현장에서 임검해야 하는 원칙이 있었다. 지방관리가 먼저 시체를 검사하고 검안서를 작성하여 상부관에게 제출한다. 이후 초검관이 위촉한 복검관이, 초검관과는 별도로 검시를 하여 상부관에게 검안서를 제출한다. 상부관은 초검관과 복검관의 의견이 일치되면 사건을 처리하였고,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삼검관을 파견했다. 물론 의심이 남아있으면 5차까지도 검안을 실시했다고 한다.사망의 원인도 42가지로 구분할 만큼 매우 구체적이었고, 1801년에는 법의학서적이 발간되기도 했다. 물론 당시에는 시체를 부검하지 않고 외부적으로만 관찰하였으나, 검험제도(檢驗制度)자체는 상당한 합리성을 가진 제도로 당시 진실을 규명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에는 틀림이 없다.기록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근대 법의학이 처음으로 강의된 것은 1925년 4월, 당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의 일인교수에 의해서이며, 한국인으로서는 1930년에 최진 교수에 의하여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강의된 것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그 후 광복이 되어 김만달 교수에 의하여 대구의과대학에 법의학교실이 창설되어 법의학발전을 위한 기반이 마련되는 듯 했으나 6.25사변으로 인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된다. 변사체는 법의관에게 위에 얘기한 조선시대의 우리나라 법의학관련 지식은 일본에서 배워갈 정도로 상당한 수준에 있었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나라는 매우 복잡한 검시제도가 실시되고 있어 개선이 요구되고 있다.선진국의 경우, 검시만을 전담하는 검시관(coroner) 또는 법의관(Medical Examiner, M.E.)등이 있어, 검시에 대한 모든 일을 책임지고 하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법률상의 책임은 검사가, 검시를 실제 실시하는 집행 책임은 경찰관이, 시체를 검안, 부검하는 등의 실무 책임은 의사가, 그리고 검증여부를 결정하는 책임은 판사가 담당하는 등, 무려 네 직종의 사람이 관여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네 직종의 사람 모두가 검시만을 하는 전문가가 아니라 다른 업무를 겸임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시스템으로 인해 각자 맡은 파트에서 책임을 다 하더라도 결과는 좋지 않은 경우가 자주 생긴다. 대부분의 부검을 일반의사가 맡고 있는 것도 문제다. 의사라 할지라도 법의학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억울한 죽음을 가려내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물론 이런 문제는 법의학을 전공한 의사가 부족해서 생긴다. 변사체에 대해서도 법의학자인 법의관이 아닌 비전문가들이 수사지휘를 하는 것도 문제다. 미국과 같은 경우는 아무리 CIA나 FBI라고 할지라도 변사체에 대해서는 법의관에게 수사권을 부여하게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검시나 부검에 대한 결정을 검사가 내리기 때문에 사실상 법의관의 존재가 유명무실하다.인권 지킴이, 법의학을 위해서아무래도 검사의 입장에서는 사망의 원인이 범죄에 의한 것이냐 아니냐에 초점이 맞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재는 사망의 원인이 사고나 범죄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자연사이냐를 가려내기 위해서만 법의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연사를 했더라도 직업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냐, 아니면 약물중독에 의한 것이냐, 다른 사람의 외압에 견디다 못해 스트레스로 사망한 것이냐 등 다양한 이유와 목적에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권이고, 이런 인권에 대해 얼마나 신경을 쏟고 있느냐가 바로 그 나라의 정치적인 수준인 것이다. 취재 중 만난 한 법의학자가 법의학이 3D중의 3D업종이라고 얘기할 만큼, 우리나라 법의학의 여건은 인적으로나 물적으로나 좋은 상황이 아니다. 많은 인원이 이 분야에서 일하고 연구할 수 있게끔, 제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많은 투자가 일단 따라야 하고, 지금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법의관들이 형사소송절차에 간여할 수 있게 해 검찰의 검시책임을 실질적, 전문적으로 보완해 줄 수 있게끔 해줘야 한다. 인권은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최근 의문사 규명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것처럼, 모든 죽음에 대한 원인을 밝혀내는 것도 국가의 중요한 의무임을 관련기관에서 깨닫고 법의학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