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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이별의 계절, 가을의 한복판에서 경복궁을 걷다

정자에 떨어진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운치를 더해준 경복궁-

  • 입력 2014.11.30 11:12
  • 기자명 임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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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들이 가을에 가장 많이 이별을 한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을을 이별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어디선가 언뜻 읽은 기억 중 한 대목이다. 스님께 보살하나가 가을은 왜 떠난 사람이 더 생각나느냐고 물었더니 스님 왈 “그거야 가을 이니까!”했단다. 의아해 하는 보살에게 말하기를, 가을엔 모든 것이 떠날 준비를 하는 계절이다, 만물이 모두 그러하다, 나뭇잎이 변하고 떨어진다는 것은, 곧 그가 떠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진데 사람도 자연에 속해있기 때문에 떠날 준비를 한다기보다는 1년이 허무하게 저물어 가는 쓸쓸함에도 느끼며 두 어장 남은 달력을 보며 뭔가 아쉬움이 느껴지는 속에서 마음에 정리를 하다보면 만족스럽지 못한 사람에게 화살이 돌려지는 탓으로 특히 가을에는 이별에 많다고 이야기한 대목이 생각이 난다.

이 가을의 열매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익어가길 바라면서-
누구나 가을엔 돌이켜보고 싶은 추억을 생각하며 그리움을 안고 스스로 고독해보고 싶겠지만 내게는 가을이 참 즐겁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사진을 찍기 때문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의 모습은 노을이다, 10~11월이면 1년 중 해가 지는 모습은 핏빛처럼 붉은 황혼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이다, 청아한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는 빛의 장관은 가을에만 볼 수 있다. 아침부터 밤늦도록 질리지 않는 계절이기도 하고 불어오는 신선한 바람이 사진기를 둘러메고 자연의 파노라마를 향해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마음을 마구 흔들어 놓아 덩달아 바쁘게 즐거워지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이해인 수녀님의 이 가을의 열매처럼 아름다운 사람으로 익어가길 바란다는 시의 한 구절을 생각하며 가을비가 촉촉이 다독여준 고즈넉한 고궁의 가을을 거닐면서 오래전 이곳에 살았을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들을 짐작해보기도 한다.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시해 당하고  시신이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지는 만행을 생각하며-
‘새 왕조의 큰 복을 기원한다’는 의미의 경복궁 정문은 광화문(光化門, 사적117호)으로 1395년(태조3)에 완성된 조선왕조의 5대 궁궐의 정궁(正宮)이다. 태조부터 단종까지 약 60여 년간 조선왕조의 정궁으로 쓰다가 세조가 창덕궁으로 옮겨간 뒤, 임진왜란(1592~1598)때 화재로 완전 소실되어 270년간 폐허로 있다가 1865년(고종2)에 흥선대원군이 재건공사를 벌인 후에 고종이 옮겨 왔다고 한다. 경복궁 중건사업이 끝난 이듬해인 1873년, 고종황제는 경복궁 북쪽 동산정원인 녹산(鹿山)과 향원정 사이에 건청궁을 건립하고 명성황후와 기거한다. 건청궁은 궁궐의 침전양식과는 다르게 양반가옥을 응용하여 사랑채(장안당), 안채(곤녕합), 부속건물(복수당), 관문각(서재), 행각 등 250칸 규모로 지었다, 또한 이곳은 고종황제의 어명으로 우리나라 최초로 발전소를 설립하여 1887년 3월6일 건청궁(乾淸宮) 전등에 점화하고 경복궁(景福宮)에 750개의 전등을 가설 점등함으로써 이 땅에 비로소 문명의 빛을 밝힌 유서 깊은 곳으로 ‘에디슨전기회사’가 동아시아 최초로 진출한 곳이며 당시 에디슨의 일기에 ‘세상에,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 꿈만 같다?’는 감회의 글을 적었다고 한다. 지금도 향원정 북쪽에 한국의 전기 발상지(韓國의 電氣 發祥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있다.??

경복궁의 멋스러움과 가을의 단풍을 둘러보며 감탄하기만은 할 수 없는 곳이 건청궁이다. 경복궁 가장 깊숙한 뒤쪽에 자리하는 궁 안의 궁과 같은 건청궁(乾淸宮)은 흥선대원군의 간섭에서 정치적으로 자립하기위해 1873년(고종10) 고종 내외가 조성한 별도의 궁으로 서구 열강의 세력 다툼에서 정세를 바로 세워 나가려는 고종의 의지가 담긴 곳이기도 하지만,? 또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본격적인내정간섭 시작에 맞서 친 러시아 정책을 구사하며 일제에 정면으로 맞섰던 명성황후가 1895년 8월20일(음)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낭인들에게 처참하게 시해 당하고 시신이 녹산(鹿山)에서 불태워지는 만행을 당한(을미사변)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다. 건청궁 건립 후 3년이 지난 1876년 경복궁에 큰 화재로 고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가 1885년에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와 1896년 아관파천(俄館播遷)직전까지10여 년간 이곳에서 지냈으나 그 후 경복궁은 일제에 의한 파괴로 건청궁은 1909년 철거되고 1939년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이 지어졌고, 해방 후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 철거되었다. 지금의 건청궁은 2007년10월 전각을 원래 모습대로 복원한 것이다.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하고 수로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세조 때 세운 취로정 터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고종이 향원정(보물 제1761호)과 연못을 조성했다. 경회루가 웅장하고 남성적이라면 향원정은 아늑하고 여성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본시의 모습은 건청궁의 앞 정원이었기에 북쪽 건청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었으나 한국전쟁 시 파괴되어 지금은 남쪽으로 놓여있다. ?
향원정에서 북서쪽에는 열상진원 샘이 있다. 이 샘은 경복궁 창건(1395년) 당시부터 있었던 왕궁의 샘으로 옛날부터 물이 맑고 차서 음료수로 이용되었다고 하며 글을 새긴 우물 뚜껑은 경복궁 중건(1868년)때 만든 것이다. 샘에서 솟아난 물이 두 번 직각으로 꺾여서 연못으로 잔잔히 흘러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은 향원지(향원지)에 드리워진 정자와 꽃나무의 그림자가 흔들리지 않고 고요히 비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 하고 꺾어지는 수로는 둥근 돌로 통로를 만들어 흐르는 물이 더욱 생기를 띠게 하기위한 세심한 지혜로운 설계를 엿볼 수 있다.

잠시의 벤치에 앉아 쉬면서 왕이 이 멋들어진 건청궁 앞뜰을 왕비와 함께 산책을 하는 모습과 무슨 얘기를 나무며 걸었을까 생각보지만, 그 많은 하녀와 시중들이 줄줄이 곁에 있는데 뭔 얘기를 할 수 있겠나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조선시대의 마당에 신라, 백제, 고구려를 조립해서 세운 “국립민속박물관”-
언제나 우리 역사의 고향이기도 한 제1의 고궁인 경복궁에오면 비위가 상하는 것이 하늘을 찌르듯 위용(?)을 자랑하는 ‘국립민속박물관’이다. 이 고궁에 고즈넉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이어지질 않는다. 조선시대의 마당에다가 신라, 백제, 고구려를 조립했다고나 할까?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의 팔상전, 금산사의 미륵전, 화엄사의 각황전 등을 참고해서 설계했다고는 하나 잘난 것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인가 뭔가 좀 이도저도 아닌 것이 거슬리는 것이 나만의 생각일까?

불만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나를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람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셀카를 마구마구 찍어댄다, 가만 보니 광화문을 들어설 때부터 우리의 한국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맞아! 그렇군!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중국 관광객들 이었어! 아침 9시부터 오후2시가 된 지금까지 스쳤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게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데 그 아름답던 여인들은 다 어디 갔을까?-
밤부터 내린 가을 단비가 고궁의 가을 색을 더 차분하고 깨끗하게 생기를 더해줘서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촉촉한 가을을 맞이했다. 하늘을 뒤 덮은 단풍나무의 울긋불긋함과 노란 은행잎이 가을색이 참 아름답게 하고 고궁의 정자 지붕위에 떨어진 울긋불긋 형형색색의 단풍잎들이 멋진 조화를 이루어 운치를 한껏 높여 준다. 예전에는 가을에 고궁을 거닐면 홀로 벤치에 앉아 아주 여유롭게 뭔가를 읽는 아름다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 모습들을 찾아보려 해도 보이지 않는다, 창덕궁으로 발길을 옮기며 젊은 날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슴에 남겨진 한 페이지를 들춰보며 창덕궁으로 발길을 옮긴다. 이렇게 아름답게 가을이 무르익어 가는데 그 아름답던 여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글, 사진 任容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