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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의 지형과 조화롭게 조성된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

  • 입력 2014.12.16 11:29
  • 기자명 임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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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후원을 개방했을 때 처음 본 단풍의 멋스러움에 흠뻑 취해 대한민국 최고의 고궁과 어우러진 곳으로 각인되어 매년 가을이면 예정된 일처럼 설렘으로 기다린다. 복잡스런 주말을 피해 평일에 부지런과 자투리시간을 합해서 오전 7시에 창덕궁의 매표소에 도착하니 벌써 사람들이 줄지어있다. 9시에 후궁 입장권을 사서 전각을 둘러보고 10시에 후궁의 들어서면서부터 감탄할 사이도 없이 사진기가 바빠진다. 역시 단풍은 고궁과 궁합이 딱 들어맞아! 복숭아꽃이 아니어도 이렇게 아름다운 무릉도원이라면 왜 270년 동안 정궁인 넓은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왕들이 선호했는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1392년)하고 나서 수도를 지금의 서울인 한양으로 옮긴 뒤 제일 먼저 종묘와 사직 그리고 궁궐인 경복궁을 세웠다(1394년). 그리고 3대 태종 때(1405년)에는 경복궁의 동쪽에 창덕궁을 창건했다.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새로이 지은 것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 했으나 실질적 이유는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에서 정적인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에 기거하는 것이 심히 불편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그 후 270년 동안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은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가 없이 주변의 지형과 조화롭게 조성함으로서 아기자기하게 자연과 잘 어우러진 것이라 짐작된다. 역시 창덕궁은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아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되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되었다.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흘렀다는 금천교(錦川橋)
창덕궁의 정문으로 1412(태종12년)에 처음 지어졌으나 지금의 돈화문(敦化門: 보물 383호)은 1609년(광해군 원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궁궐 정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敦化는『中庸』의 大德敦化에서 가져온 것으로 ‘(큰 덕은 백성들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때 풍수지리에 관심을 둔적이 있어 들은 바로는 조선의 궁궐에는 정문을 들어서면 풍수지리상 기(氣)는 물을 만나면 정지한다는 이치로 궁을 지을 때마다 기(氣)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길한 명당수를 흐르게 한다고 한다. 창덕궁에는 비단같이 맑은 물이 흐른다 하여 비단(錦)에 내 천(川)자를 사용하는 금천교(錦川橋)를 만들고 다리 아래에 남쪽의 해태상, 북쪽에 거북상을 배치하여 궁궐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았고 다리 중간에는 잡귀를 쫓는 귀면(鬼面)이 조각되어 벽사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진정한 풍광의 아름다운 보며 마음을 쉴 수 있는 정자, ‘부용정’
이곳 부용지(芙蓉池)와 부용정(芙蓉亭)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기도 하다. 가을이 오면 창덕궁이 생각나고 제일 먼저 그려지는 풍경이기도 한 것처럼 옛날 왕들이 경복궁보다 더 선호하며 270년 동안 정궁으로 사용한 것이 어쩌면 이 넓고 아름다운 후원의 풍광에 끌러서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곳에는 4개의 연못이 있고 골짜기엔 옥류천의 명당수가 흐른다, 진정한 풍광의 아름다운 보며 마음을 쉴 수 있는 정자들이 곳곳에 있다. 창덕궁 후원 중에서도 부용지(芙蓉池) 일곽의 모습은 가장 두드러진다. 부용지 일곽에 있는 모든 건물은 정원의 일부이고, 정원은 바로 자연 그 자체이다. 건물과 정원과 자연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일체되어 있다. 부용지 서쪽으로는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이 있고, 남쪽으로는 부용정(芙蓉亭)이 물 위에 반쯤 떠 있다. 건너편 주합루에 서면 부용정과 연못은 물론, 주위 경관이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주합루 남쪽 아래에 있는, 사방이 네모난 못인 부용지 속에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 위로 잘생긴 늙은 소나무가 심어져 있다. 조선의 궁궐 연못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사상에 의해서 조성되었다. 늙지 않기를 기원하는 П자 모양의 불로문(不老門)을 통하여 숙종18년(1692년)에 만들어졌다는 애련지(愛蓮池)와 애련정(愛蓮亭)을 볼 수 있는데 '연꽃은 더러운 곳에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우뚝 서서 치우치지 아니하며 지조가 굳고 맑고 깨끗하여 군자의 덕을 지녔다하여 지은 이름이라한다.

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달의 주인공에 비유한 ‘萬川明月主人翁自序’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형태라는 부채꼴 모양의 정자로 닻줄 즉 배 띄움을 구경한다는 뜻의 관람정(觀纜亭)과 지붕이 두 겹으로 된 육모정자 존덕정(尊德亭)이 각각 연못을 끼고 자리해 있다. 존덕정에는 정조(正祖)가, 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달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임을 알리는 절대 군주적 의지를 비유한 ‘萬川明月主人翁自序(만천명월주인옹자서)’란 기문을 보며 사도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하며 상처 깊은 왕이 되어 비교적 많은 개혁과 업적을 쌓아갔음에도 신하와 백성들이 스스로 알아주지 않았음이 섭섭했던지 아니면, 자신이 왕이 되기까지의 험난했던 상대들에게 위엄을 보이려는 콤플렉스를 표출했던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70년 동안 창덕궁에서 살아간 많은 왕족들 중에 조선왕조의 마지막 중전 순정효황후 윤비와 비운의 덕혜옹주를 잊기에는....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순정효황후 윤비는 일제강점기 때 옥새를 감추고 내놓지 않았고, 한국전쟁 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 쳐서 내쫓은 일과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낙선재를 지킨 당당한 기품과 공산치하에서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지켰고, 성북동 흥천사 옆에서 셋방살이를 하면서도 왕가의 며느리로서 왕조를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의 기도 덕분이었는지 이승만 정부와 끈질긴 외로운 싸움 끝에 창덕궁 낙선재를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이는 계기를 마련하고 1966년 낙선재 석복헌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덕혜옹주는 고종이 나이 환갑에 귀인 양씨로부터 얻은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녀로 12세에 동경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고, 17세가 되던 1929년 어머니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정신병을 얻게 되었다. 병세가 호전되던 20세에 대마도주(對馬島主)의 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고, 결혼 3년에 그동안의 시련 때문인지 심한 우울증과 실어증이 겹쳐 폐인이 된 몸으로 1962년에 환국하여 낙선재에서 1989년 운명하기까지 역사속의 비련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맘때면 찾아와 보지만 올 때마다 새롭게 느껴진다. 조상들의 영혼이 살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 영혼들이 창덕궁 후원을 가꾸고 있다고 믿고 싶다.
<글, 사진 任容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