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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갚은 꿩의 설화 간직한 한국의 명산, ‘치악산’

  • 입력 2014.07.16 11:51
  • 기자명 이엠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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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맥에 솟아 있는 치악산, 주봉인 비로봉(飛蘆峰:1,288m) 산세가 웅장하고 경관이 뛰어나며 많은 문화유적이 산재해 있으며 울창한 숲, 기암괴석과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진 산으로 본래는 가을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렀던 것을 꿩 치(雉) 자(字)의 치악산(雉岳山)으로 불리게 된 동기는 꿩의 보은설화 이후부터라고 한다.

구렁이의 밥이 될 뻔했던 꿩이 죽음으로 보은(報恩)의 종소리를 울렸다-
먼 옛날 스님이 울창한 숲속 길을 걸어가는데 큰 구렁이에 감긴 체 살려고 발버둥치는 꿩을 스님이 석장(錫杖)으로 구렁이를 쫓아 생명을 구해줬다. 그날 밤 저녁 스님은 폐사(廢寺)의 구룡사(龜龍寺)에 도착하여 깊이 잠들었는데 한밤중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혀 잠을 깨니 낮의 그 구렁이가 자신의 몸을 옥죄고 삼킬 듯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다.
“네 놈이 나의 밥(꿩)을 먹지 못하게 하였으니 너라도 대신 잡아먹어야겠다.”
스님은 3생(生)을 사람노릇하다 짐승이 되면 사람의 말을 한다더니… 라고 생각하고, 침착하게 “그대가 사람의 말을 하는걸 보니 전생의 선근(善根)이 매우 깊은가 보구나” 하니, “그렇다. 나는 전생엔 대장부였으나 굳이 성낼 만한 일도 아닌 일에 성을 크게 내었다가 뱀 몸을 받고, 전생을 상기하며 살생을 않으려는데 너무 배가고파 꿩이라도 한 마리 먹으려는데”라고 답하여 “그렇다면 나를 먹어 너의 배를 채워라. 내 기꺼이 보시하리라”라고 했다.
그러자 그 구렁이는 “난 구렁이 몸이 싫다. 그대가 승려만 아니면 벌써 잡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몸을 벗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있는데, 그대가 해 준다면 살려 주겠노라”라고 해 스님은 “그 방법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구렁이는 “날이 밝기 전에 종소리를 두 번 들으면 나는 이고득락(離苦得樂)할 수 있다”라고 하니 스님은 막막하였다. 자신이 있는 구룡사는 폐사로 종이 없다, 치악산에서 종이 있는 절이라곤 30리를 올라가야 하는 상원사뿐인데 당장 출발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부처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없어 스님은 고요히 염불했다. 그런데 새벽 세 시가 되자 먼 곳에서 종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뎅~뎅~~~~하고 강하지도 않은 오직 두 번의 종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구렁이는 스님의 몸을 풀어 주며 “스님, 감사합니다. 저는 이제 구렁이의 몸을 벗고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되었으니 스님께선 이 흉한 제 몸을 화장해 주시고, 성낸 과보로 구렁이 몸을 받고서 두 번의 종소리를 듣고 이고득락(離苦得樂)한 저의 이야기를 세상에 널리 전하여, 교훈이 되도록 해주십시오”하며 숨을 거두었다 한다.
구렁이를 화장한 후 인적이 끊긴 상원사의 종루에 올라가 보니 종 밑에 머리가 깨어진 채 죽어 있는 꿩을 발견하였다. 어제 구렁이의 밥이 될 뻔했던 꿩이 죽음으로 보은(報恩)의 종소리를 울린 것이었다.
《구룡사사적기(龜龍寺사적기)》에는 조선 초기 무학대사(無學大師)의 시 속에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義相大師)가 창건한 이 절을 신라 말에 중창시킨 무착대사(無着大師)가 꿩을 구해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0년이 넘는 선조들의 전통재래방법으로 만든다는 황골엿-
쌀, 옥수수, 엿질금 등 100% 국산재료만으로 치악산 맑은 물을 사용하여 24시간 가마솥에서 고아 붉은 갈색의 곱고 투명한 색과 구수한 깊은 맛있다는 엿의 본 고장이라는 황골 마을에서 구수한 엿 냄새를 시작으로 오르는 첫 번째 언덕은 백석사에서부터 가파른 된비알이 계속되다가 첫 번째로 만나는 쥐너미재 고개다, 원주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이지만 오늘따라 뿌연 가스층으로 아스라하게 보인다, 깊은 숲속사이로 진땀깨나 흘려야 겨우 도착하는 첫 번째 고개로 옛날 범골에 범사(凡寺)라는 절이 있었는데 쥐들이 너무 많아 그 등살에 스님들이 견디지 못하고 모두 떠나니 그 많은 쥐들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 고개를 넘어 떠난 후 부터 쥐너미재로 불리었고 그 후론 범사도 찾는 사람들이 없어 폐사되었다고 한다.

정상에 3년 안에 3개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쌓은 시루봉-
올라올 때 가파르던 돌투성이의 된비알과는 달리 능선 길을 의외로 오솔길의 흙길이 많아서 좋다, 몇 번을 몇 개의 작은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어느덧 비로봉 아래 갈림길에 도착하고 쉼 없이 정상에 올랐다, 일행이 오기를 기다리려다 따가운 한낮의 태양열을 피할 곳이 없어 이미 예정된 계곡코스로 하산을 일행보다 먼저 한다. 치악산 비로봉에 세워진 미륵불탑은 원주에서 제과점을 운영하던 용창중씨(일명 용진수)가이라는 분이 꿈에 비로봉 정상에 3년 안에 3개의 돌탑을 쌓으라는 신의 계시가 있어 혼자서 탑을 쌓은 것인데, 1962년 9월에 처음으로 쌓기 시작하여 1964년 5층으로 된 돌탑 3개를 쌓았으나 1967년과 1972년에 알 수없는 이유로 무너졌던 것을 용창중(1974년 작고) 씨가 각각 그해에 다시 복원했다, 1994년 이후 두 차례 벼락을 맞아 무너진 것을 치악산국립공원사무소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한다. 3개의 미륵불탑으로 남쪽은 용왕탑, 가운데는 산신탑, 북쪽은 칠성탑이라 한다. 1972년 5월 군 입대직전 산악회 회원들과 상원사에서 구룡사로 하산하는 종주등반을 할 때 시루봉 아래 샘터의 움막에서 기거하며 돌을 주어서 탑을 쌓는 용창중 씨를 만나본적이 있다. 지금은 시루봉 아래 샘터에 물이 끊겼는지 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그 당시는 이 샘터 옆에서 용창중씨는 반 지하처럼 땅굴을 파고 생활하며 작은 등짐지개로 주변의 돌을 주워 날라 탑을 쌓았다. 지금처럼 철 사다리도 없어 바위를 돌고 돌며 마지막 쥐어짜는 힘으로 힘겹게 정상을 올랐다. 내 기억으로는 왜 힘들게 탑을 쌓으시냐고 물어도 일언반구 대꾸도 없었다, 아마 그때가 벼락을 맞아서 무너진 상태를 보수하는 중인 것으로 기억된다, 그 후로도 군 생활을 원주에서 하는 덕에 치악산을 수없이 오르며 샘터 옆 움막집을 찾아보면 안보이곤 하더니 군 제대할 무렵에서야 돌아가셨다는 예길 들었다, 그 당시는 정상에 탑을 쌓은 것이 마치 떡시루를 업어놓은 것 같다하여 시루봉이라 불리었다,

용 9마리가 살던 못을 메우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한 구룡사-
햇빛은 피해 계곡길로 내려오며 아직도 사람 손이 타지 않은 태고적 원시림이 곳곳에 있어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일종의 동질성이랄까~ 사진을 담는 사람들의 감정이 같은 듯 느낌이 같은 사람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사진이라는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며 계곡물에 발을 담그기도 하며 하산 길을 가볍게 한다,
구룡폭포를 지나 예전 등반 때 2번씩이나 악천후로 무료숙박을 했던 추억이 담긴 구룡사는 지금 한창 증축공사 중이지만 예전의 모습을 완전히 잃었다고나 할까? 고즈넉하고 마음을 경건하고 차분하게 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감춰지고 중국의 성 같은 호화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시대에 맞게 변해가는 것이 그른 일은 아니지만 뭔가 세속의 냄새를 너무 품은 것 같은 증축에 못마땅한 것이 나만의 욕심일까? 용 9마리가 살던 못을 메우고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특히 주위에 숲을 이루고 있는 노송들은 조선시대에 황장목이라 하여 임금의 널을 짜거나 대궐을 지을 때 쓰여 함부로 베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구룡사 앞쪽엔 힐링을 체험할 수 있는 울창한 전나무 숲은 피톤치드를 다량 방출하여 숲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상쾌한 느낌과 편안한 정신건강을 준다고 알려져 있고 특히 전나무는 어떤 수종보다 피톤치드를 많이 생산한다고 알려져 있다, 보통 피톤치드의 방출 시기는 봄부터 시작하여 가장 무더운 여름에 최대치에 달하며 시간대로는 정오 무렵이라고 한다, 전나무 숲길을 산책하고 평편한 곳에 돗자리 하나쯤 깔고 오침을 즐겨보는 것도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글, 사진 任容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