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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단풍 속에서 늦가을의 정취 마음껏 느끼다!

  • 입력 2013.12.16 12:04
  • 기자명 임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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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정을 나눈 아우들과 함께 살아온 날들을 곱씹으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여는 낙엽의 바스락 소리를 들으며 걷는다면 삶의 훈훈함도 살아나 늦가을 정취를 즐기는 여유롭고 편안한 여행이리라!

오래전부터 마음을 나누던 아우의 배려와 마침 광주에 지인 결혼식 참석할 일이 있다는 아우와 의기투합으로 나주여행에 대한 모사(?)가 성사되었다. 항상 요맘때가 내겐 여행이 선 듯 내키지가 않는 계절인데 잘 됐다는 생각이 든다. 오색 창연한 가을정취는 사라지면서 그렇다고 흰 눈 소복한 겨울의 정취도 아니고 을씨년스런 찬바람에 마른 낙엽들이 길바닥을 뒹구는 풍경들로 쓸쓸함을 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쓸쓸함 뒤로하고 오랜 정을 나눈 아우들과 함께 살아온 날들을 곱씹으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하나씩 여는 낙엽의 바스락 소리와 들으며 걷는다면 삶의 훈훈함도 살아나 늦가을 정취를 즐기는 여유롭고 편안한 여행이 되리라 생각하며 서울을 출발한다. 나주에 도착시간은 해가 서산으로 져버린 5시경, 나주에 있는 아우의 퇴근시간에 맞추기 위해 금성산 자락에 괘불탱이 있다는 다보사(多寶寺) 잠시 들러본다. 문화역사에 해박한 지식으로 함께하면 언제나 해설을 자청하는 아우가 가자는 데로 못 봤으면 후회 할 번한 길을 따라 나선다.

단풍이 기가 막히도록 아기자기하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다보사’
다보사로 향하는 입구에는 최근에 만들어진 부도(浮屠,사리탑)가 있고 표지석이 있다,
이곳부터 100여m 오르니 마치 철옹성 같은 다보사의 담장 밑으로 물길을 열어주고 있다, 오르는 돌계단은 낙엽들이 수북하게 쌓여 운치를 더해준다. 계단을 올라 다보사에 들어서니 산사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생뚱스런 아파트 같은 건물은 우리가 보려는 괘불이 아니라 괴상망측한 건물이라고 농을 하며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쳐 금강문 안을 지나는데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사천왕을 보았다, 한쪽에는 문수보살이 해태를 타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코끼리를 타고 있다. 명부전에서 바라보는 막바지 단풍의 풍경들이 나를 감탄케 하고 긴긴 세월 고태미를 흠씬 품은 아담한 대웅전의 꽃 창살들이 아파트(?)에 대한 찝찝함을 단숨에 지워버린다. 칠성각에서 내려다보는 다보사의 경내는 소담스럽고 정감이 물씬 풍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 어둑해지는 경내에서 스쳐 지나려는 스님을 붙들어 놓고 다보사의 유래를 예기해달라고 청하니 뒷짐 진 손으로 연신 염주를 돌려가며 이어가는 말이 끊일 줄 모르는 달변이다. 천년사찰처럼 웅장함은 없지만 아담한 다보사는 비좁은 계곡에 위치해 단풍이 기가 막히도록 아기자기하게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어주어 그 어떤 곳보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나주평야의 한가운데 우뚝 솟아 다보사를 품고 있는 금성산(451m)은 나주사람들은 진산이고 상산(上山)이라고도 부르며 유일하게 영산강의 물줄기가 손금 보이듯 내려다보이는데 불행히도 저녁나절에야 도착해서 다보사(多寶寺)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다보사는 금성산 초옥에서 수행하던 스님이 땅에서 솟은 칠보 장식의 큰 탑 속에서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출현하는 꿈을 꾸고 창건했다 하여 다보사(多寶寺)라 했다하며 대웅전 뒤편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영산전은 내부에 석가여래좌상과 16나한상, 후불탱과 나한탱이 모셔져 있다. 영산전의 부처님이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지는 큰 바위를 손으로 받아 다보사를 지켰다는 전설이 있는데, 영산전 뒤에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실제바위가 있다. 우리가 보고자했던 보물 1343호로 지정된 괘불탱(길이1,143cm×폭852cm) 은 현재 나주시 향토문화회관으로 옮겨져 있다하여 아쉽게도 볼 수가 없었다. 괘불탱이란 법회를 법당(法堂) 안에서 개최할 수 없을 때 야외에서 당간지주에 걸어놓고 법회를 열 때 쓰이는 탱화를 말한다.

지혜롭게 사는 힘찬 기운을 얻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는 ‘나주 목사내아’
나주의 아우가 운치 있고 특별한 숙박을 예약하겠다고 했던 나주목사내아, 숙박을 하며 힘찬 기운을 얻으리라는 기대는 보수공사로 깨졌지만 청렴과 지혜롭게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나주목사 관내를 둘러보니 도심 속 집을 멀리 떠난 마음의 여유로움인지 아니면 아우들과의 하룻밤을 지내서인지 오늘따라 유난히도 하늘이 파랗게 보인다. 나주목사의 정갈한 고택과 잘 어울리는 200년이 족히 넘은 팽나무의 기상으로 보아 긴긴 세월동안 터를 지켜주면서 재임했던 목사들에게 지혜와 덕목을 심어주며 역사의 세월을 머금고 있는 듯하다.
문을 들어서니 좌우로 仁, 義, 禮, 智 유교의 네 가지 덕목인 어질고, 의롭고, 예의바르고, 지혜롭게 살아가라는 의미의 네 개의 방으로 나뉘어져 있다. 또한 본채에는 유석증 방과 김성일 방이 있다, 부임했던 나주목사 중, 청렴하고 바른 정치로 나주백성들이 십시일반으로 쌀300석을 바쳐 유일 무일하게 두 번이나 부임을 했던 유석증(兪昔曾)목사 방에서 하룻밤은 삶을 진실하게 사는 맑은 기운을 얻어 세상에 꼭 필요하고 늘 사랑받는 삶을 살게 된다고 한다. 또 한분인 경원서원을 창건과 신문고(현재 정수루 2층의 북)를 설치하여 “원통한 일을 하소연하고 싶은 자는 이 북을 치라”고 하여 아무리 어리석은 백성도 그의 판결을 들으면 고개를 끄덕이게 했다는 김성일(金誠一)목사의 방에서 하룻밤은 삶을 지혜롭게 사는 힘찬 기운을 얻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다는 소문으로 시험 철이나 기업의 인사철이면 두서너 달 전에 예약을 해야만 한다며 따뜻하고 은은한 녹차를 내어주며 살짝 귀띔을 해준다. 풍수학자들이 말하는 ‘목사내아(牧使內衙)’는 노령산맥의 용이 영산강 물을 먹으려 강 쪽으로 머리를 향할 때 정수리에 해당하는 부분이 목사내아의 위치라 하여 명당중의 명당이라 한다. 나주 목사는 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급 이지만 목사내아는 의외로 소박한 것이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

진하고 고소한 곰탕의 감칠맛에 달랑 두 가지 찬도 용서할 수밖에 없었던 나주곰탕
나주곰탕은 오래전부터 나주읍성 안의 닷새 장을 찾는 장돌뱅이들과 장보러온 사람에게 국밥을 팔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커다란 가마솥이 걸린 식당으로 들어서 복작거리는 한구석에 겨우 자리를 잡고 곰탕을 주문했다. 말로만 들었던 곰탕의 조리과정을 보고픈 호기심 발동에 잠시 일어나 나가 주방을 보니 미리 밥을 담아놓은 뚝배기 들고 설설 끓는 가마솥에서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랐다 하며 두세 번 토렴한 후 잘 삶은 수육을 뚝배기에 넣고, 계란 지단과 함께 대파를 넣는다. 북적거리는 손님 탓일까? 아침을 설렁하게 먹은 탓일까~ 허기에 기다릴 수 없어 아우님, 나 수육 먹고 싶은데……. 말 떨어지게 무섭게 대자로 하나 시켜주는데 잠시 후 보니 손바닥(?)만 한 쟁반에 고기는 열대여섯 점, 나 혼자 먹어도 부족할 만큼이다. 쫀득하게 잘 삶아진 맛에 참을 수 없는 식탐으로 또 한 추가하고 말았다. 이내 나온 곰탕의 뚝배기, 삭막하게도 반찬이라고 해야 남도 특유의 젓갈이 듬뿍 섞인 김치와 깍두기 딸랑 두 가지 만을 내려놓는다. 하지만 진하고 고소한 곰탕의 감칠맛에 달랑 두 가지 찬도 용서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수년 동안 여행칼럼을 써오면서 단 한 번도 음식점이나 별미라는 음식들을 소개를 하지 않는다, 각종 매스컴에 소개되는 음식점을 메모해 두었다가 찾아보지만 거의 90%는 내 까탈스런(?)입맛 탓인지 흡족해 본적이 없다. 실망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음식이란 사람마다 느낌도, 맛도, 즐기는 취향도 다를 텐데 어찌 내 입맛기준으로 무책임한 소개를 할 수 있나? 하는 노파심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만은 예외라고 할 만큼 자신한다, 고기 덩이의 숫자도 세어볼 만큼 맑고 투명한 국물에서 느끼한 맛은 전혀 없고 시원하면서도 구수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아우가 의문을 거든다, 뼈 국물이 아닌 고기로 육수를 만들어 맑은 것이라고…….

불상들은 하나같이 메주를 떨어트린 듯 못 생겼고 피부 또한 거칠고 투박스럽다. 그러나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나주 시내에서 한 시간 정도를 달려 천불천탑으로 알려진 운주사를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토종 열매를 파는 아저씨가 우리 하나하나를 향해 간이 안 좋다는 둥 신장이 부실하다는 둥하며 차를 권한다. 내가 어찌 그리 잘 알고 어떻게 아느냐고 물으니 얼굴만 보고 안단다, 얼굴 색깔에 오장육부의 부실함이 나타난다고 한다. 도사님 이 시네요! 빈정대는 투로 말했더니 뚱 한다. 우리나라는 배의 형국인데 북쪽은 큰 산이 많아 무겁고, 남쪽은 큰 산이 적어 균형이 잘 잡히지 않는단다. 해서 남쪽인 이 절에 천불천탑을 세워 무게로 균형을 잡으면 이 탑들은 돛대가 되고, 많은 부처는 사공이 되어 순항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머릿속으로 아무리 우리나라 지형을 배와 연관을 시키려 해도 토끼만 그려져 동의 할 수 없는 운주사의 전설이다. 아름 들이 나무숲에 싸인 다른 산사들과는 달리 민둥산의 모습들에 조금은 황량하게 느껴진다. 알고 보니 몇 해 전에 큰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그 큰 산불에도 천불천탑의 염원은 그대로 남아있는 듯 불상과 탑들은 운주사로 향하는 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특이한 점은 수없이 보아왔던 불상과 탑이 아니었다. 세련미도 없고 정교함도 없었지만 왜 그리 따듯하고 친근하게 느껴질까? 자주 봐왔던 귀공자 타입도 아니고 금의를 입고 있지도 않다, 불상들은 하나같이 메주를 떨어트린 듯 못 생겼고 피부 또한 거칠고 투박스럽다, 그러나 따듯한 온기가 느껴진다. 어쩌면 그 당시 일그러진 얼굴표정과 힘들어 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아닐까 짐작된다, 탑 또한 다른 곳에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스트라이프 문양과 사각의 도형을 이용했다, 그 당시에 이런 파격적인 기법을 사용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 하고 탑의 형태도 눈에 익었던 기법이 아닌 맷돌을 다듬어 놓은 것 같은 원형 탑도 보인다. 경내를 둘러보고 산정을 올라 탁 트인 산 정상에 누워계신 와불을 본다, 도선대사가 천상의 석공들을 데려와 하룻밤만의 작업으로 천불천탑을 만들려 했는데, 닭 우는 소리에 동이 트는 줄 알고 석공들이 하늘로 올라 갔다한다. 하여 마지막 불상을 일으키지 못하여 지금까지 누워 계신다고 하며 그 와불이 일어서면 새날이 열린다고 전해진다. 그 새날이 뭔지는 모르지만……. 아우님들~ 함께한 이틀이 내겐 진정한 새날인 듯하오.~

<글, 사진 任容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