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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가을의 향연, ‘두타산’

  • 입력 2013.11.16 12:10
  • 기자명 임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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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정이 가까울수록 바람과 나뭇가지의 움직임들은 세상을 밝히기 위한 기지개였을 뿐이다.

밤새타고 내려간 버스의 도착시간은 새벽4시, 버스의 불빛아래서 간단한 요기를 끝내고 무릉계곡 골짜기를 휘감아 도는 삼화사의 은은한 범종소리를 지척에서 들으며 두타산 정상을 향해 오른다, 어둠과 적막뿐인 산길을 오르며 차분하게 깔린 주위의 무거운 공기에 싸늘함이 느껴진다. 오전 7시경. 두타산정상은 아직 뿌옇게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동해안 가까이에 솟아 있어 고도차가 무려 1200m로 약 3시간정도가 소요되었고 1353m의 정상에 오르는 동안 본 것이라곤 끝이 안보이게 어둠속의 하늘로 곧게 뻗은 낙락장송의 소나무의 기상과 랜턴의 반경 3m정도만의 가파른 된비알 길만 쳐다보며 올랐다, 수려할 것 같은 하늘도, 웅장한 산세도, 푸른 동해바다도 본 것이 없다, 앞길을 밝혀주는 내 불빛만 없었다면 한치 앞도 나아길 수없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 무서움도 커 가끔 오르던 길을 멈추고 후미의 일행들 인기척과 랜턴의 불빛을 확인하고서야 안심하고 전진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내 상상에의 한 공포감 일뿐 두타산의 모든 만물들은 그들이 있는 그대로 잠을 자고 있었을 뿐이었다,

홀로되는 상황들이 내겐 또 다른 기쁨과 만족을 주는 보람된 힐링의 시간
오르던 길에 험준한 지세를 이용하여 쌓은 두타산성을 일부 보았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에 의병장 최원흘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왜적과 싸워 물리친 싸움터라 한다. 3일간 일진일퇴의 격전에 왜군은 4500여 명이 사망하고 겨우 500여 명만 살아남았고 의병과 백성도 5000여 명의 인명피해로 무릉계곡과 마을 개천까지 피로 붉게 물들었다고 하는 격전지 이지만 짙은 어둠속이라 랜턴의 불빛에 비치는 일부분만 본 것이 못내 아쉽다.
산정에 가까워 올수록 계곡에서 올라오는 스산한 바람에 비벼 우는 나무 가지들의 음산함 때문에 와락 느껴지는 무서움에 오싹하기도 하지만 야간 산행의 무서움은 깊은 어둠보다도 적막감이 주는 공포가 더욱 큰 것 같다, 어둠속에서 금방이라도 뭔가가 튀어 나올듯한 공포에 흥얼흥얼 어릴 적 불러보던 동요를 부르다 가사를 잃어 휘 바람을 불다 멈춘다. 휘 바람 소리가 도리어 음산함과 절묘하게 어울려 나를 쫄게 만든다. 하지만 모두가 내가 만들어 내는 상상에 의한 공포였을 뿐 두타산의 만물들은 모두가 잠들어 있었고 산정에 가까울수록 바람과 나뭇가지의 움직임들은 세상을 밝히기 위한 기지개였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던 즐거운 시절이 대부분이지만 언제부턴가 나 자신도 모르게 트레킹에 나설 때면 조용함을 느낀 산행이 나를 위한 값진 힐링의 시간 이였음을 느끼게 된 후론 낮 산행의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음을 피해 새벽산행을 가끔씩 즐기게 되었다.

넌 평소에 죄를 많이 져서 무서운 거야! 착하게 살면 세상에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별로 없을걸!
안타깝게도 내게 아름다운 기억들을 남긴 체 암벽등반 사고로 인해 하늘나라로 먼저 간 후배와 야간 산행 때 유난히도 무서움을 많이 타는 후배에게 “넌 평소에 죄를 많이 져서 무서운 거야! 착하게 살면 세상에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별로 없을걸! 아니면 귀신도 놀라버릴 만큼 무서운 죄를 지으면 두려움이나 공포는 느끼지 못할지! 하고 골려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잠시지만 그동안 나도 모를 못된 짓을 했었나? 하고 되돌아본다. 마음이 두렵고 불안한 느낌이 드는 공포와 무서움은 왜 느끼는 것일까? 사람은 물질세계의 존재로 자신의 보존본능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헌데 그 공포심의 대부분이 스스로의 상상으로 생겨난다고 한다, 어쩌면, 어둠의 숲 속에서 금방이라도 반달곰이 뛰쳐나와 나를 후려칠 것 같은 공포감도 내 스스로가 만든 두려운 상상에 빠져 있기 때문인가 보다. 이내 생각을 바꿔 동이트기 전에 속세의 번뇌를 버리고 불도 수행을 닦는다는 의미라는 두타산 정상에 내가 제일먼저 올라 동해바다에서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그 웅장한 기운을 나 혼자 몽땅 받을 욕심의 상상으로 무서움을 떨친다.

촉촉하게 내린 가을비에 너무도 선명하게 물들어가는 가을 색들이 환상적이다
날이 밝으니 흔히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진다, 남들이 곤하게 자는 시간에 어둠을 뚫고 1400m의 정상을 힘겹게 올라온 선물일까? 이렇게 촉촉하게 내린 가을비에 너무도 선명하게 물들어가는 가을 색들이 환상적인 아침을 맞는다. 비를 뿌리는 스산한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는 오한도 들지만 황홀할 만큼 선명한 나뭇잎들이 너무도 멋진 가을을 선사한다, 사람마다 가을을 맞이하는 형태는 다르겠지만 이 높은 산정을 촉촉하게 가을비로 적시는 환상적인 아스라한 산정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형형색색으로 물들어가는 두타산의 풍요를 가슴에 가득 담는 것이 이 얼마나 멋진 행복인가! 이른 아침 첫 손님인 나를 반기려는 것일까? 따다닥, 따다닥, 딱따구리가 나무껍질을 쪼는 소리가 숲속에 울리자 장단을 이어받듯 이내 다른 새가 날아가며 쪽쪽쪽, 청아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산정을 깨우는 자연의 오묘한 조화와 순리는 경이롭게 느껴진다. 두타산정상에서 박달령을 지나 청옥산까지는 약 두시간정도의 거리로 해발고도 1350m를 오르내리는 길이지만 동내 뒷산만큼 길이 정갈하고 편안하기도 하며 주변은 숲이 깊고 문명의 때가 전혀 없는 태곳적 울창한 모습으로 이름 모를 야생화며 버섯들이 선명한 몸짓으로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며칠 전, 알지도 못하는 자동차 대리점 판매원이 내게 보낸 홍보물 중에 곰배령에 사는 어린이가 지었다는 동시가 이곳 분위기를 보고 쓴 듯한 착각이 든다.
“어느 산골에 나무 하나 살았네. 나무는 친구가 없어 슬펐네. 어느 날 비가 와서 나무랑 친구하자 그랬네, 비가 나무를 안아 주었네. 나무는 너무 기뻐 볼이 다 빨게 졌다네. 그래서 단풍이 되었다네.”
아름다운 동심에 몸과 마음까지 빨갛게 물드는 것처럼 두타산과 청옥산의 나뭇잎들도 곱고 예쁜 빨간색으로 물들어 있다.

친구의 말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만큼 물맛이 깨끗하고 달게 느껴진다.
청옥산정상은 사방이 잡목수림으로 에워싸여 있고 그 분위기에 맞춰진 듯(?) 통신탑 들이 너저분하게 설치되어있어 정상 분위기는 영 아니다, 비구름이 산을 덮고 동해에서 불어오는 해풍과 함께 굵은 빗방울들이 얼굴을 때린다, 동해의 푸른 바다와 산세를 볼 수 없는 아쉬움이 크기도 하지만 1400m의 높은 곳에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샘터로 향하여 청정의 물맛을 음미하며 가슴깊이 담는다. 아무리 힘들어도 청옥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100m아래에 있는 샘터의 물맛은 꼭 보라며 내게 전해준 친구의 말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알만큼 물맛이 깨끗하고 달게 느껴진다. 이미 비를 흠뻑 맞고 나뭇가지에 맺혔던 빗방울들의 애무에 바지와 등산화는 흠뻑 젖었고 등산로 또한 미끄러워 애초의 계획을 변경하여 중간 길로 하산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언제 또 와볼까 싶어 예정대로 두타산과 높이가 거의 같은 고적대(1353m)를 거쳐 지겨우리만치 길고 길게 느껴지는 무릉계곡을 따라 하산한다. 비에 적셔진 흙과 돌 더미들의 미끄러움, 내 은밀한 것을 보호하는 속옷까지 흠뻑 젖은 탓인지 걸음에 고환의 쓰린 아픔으로 애를 먹으며 하산시간은 지체된다. 오름보다 여유로운 하산길이지만 비구름이 온통 산세를 덮고 있어 시각으로 속살을 볼 수 없는 것이 더욱 지루하게 느껴진다.

가슴이 저릴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굽이굽이 펼쳐지는 무릉계곡-
무릉계곡은 인간의 세계를 넘어 신선들이 노니는 선계로 느낄 만큼 풍광이 빼어나 아름다움의 극치라고들 말한다.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청정계곡으로 호암소의 시작부터 약 4km 상류 용추폭포가 있는 곳까지를 말한다,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어 마치 현존의 선경에 와있는 듯한 느낌으로 태고의 신비와 전설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넓은 바위 바닥과 바위 사이를 흘러서 고인 넓은 연못들이 볼만한 무릉계곡은 수백 명이 앉을 수 있는 무릉반석을 시작으로 계곡미가 절경 중에 절경이다. 삼화사, 학소대, 옥류동, 선녀탕 등을 지나 쌍폭, 용추폭포에 이르기까지 가슴이 저릴 만큼 아름다운 풍광이 굽이굽이 펼쳐지는 곳으로 고려시대 동안거사 이승휴가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저술하였고, 조선 선조 때에 삼척부사로 재직 하고 있던 김효원이 제명 하였다고 한다. 무릉계곡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조선조 명필 양사언이 이곳의 절경에 감탄하여 무릉반석에 "武陵仙院 中坮泉石 頭陀洞天 (무릉선원 중대천석 두타동천)"이라고 쓰면서부터 라고 한다. 온 종일내린 가을비 탓인지 오를 때 뛰어 건넜던 돌다리가 물에 넘쳐 철다리로 건너며 두타와 청옥산의 의 힘찬 흐름과 소리가 소멸되어가는 기운을 다시금 돋는다. 약 20여km, 새벽부터 10시간에 걸친 지속적인 우천등반으로 피곤도 몰려오고 흠뻑 젖은 옷과 신발들의 불쾌함도 잊은 채 버스를 타고 오는 내내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다.
<글, 사진 任容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