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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al Clinic] 사랑 병(病)과 상사병(相思病)

  • 입력 2003.08.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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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人生)을 살아가면서 가장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지나간 사랑의 그림자, 순수하게 불타올랐던 그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모습일 것이다. 산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얻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다. 문학에서는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人生은 사랑으로서 아름다워지고 보람이 있다’라고. 사랑이 어찌 남녀간의 사랑만 있겠는가. 부모, 자식, 이웃, 종교적 사랑이 있는가 하면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자연사랑, 신(神)에 대한 사랑(아가페적)이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온통 사랑 속에 휩싸여 있는 셈이다. 의사는 공부를 많이 하는데 이런 지식 사랑은 philosophia요, 이데아에 대한 동경(憧憬)과 추구는 플라토닉 사랑(platonic love)이다. 요즈음 남녀 사랑은 다른 문화도 그렇듯이 세대간에 모습이 매우 다르다. 옛날 전통적 한국적 문화를 조금이나마 체험한 40대 이상의 세대는 요즈음의 현대적 사랑을 이해하기 어렵다. 결혼은 늦고 독신주의자가 늘고 있으며, 性은 소중히 하기보다는 상품화 내지는 즐기는 도구로 변해가고 있다. 사랑은 더 이상 생각이나 상상하기보다는 직접 자극을 통해 확인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리고 마음의 결정도 빨라서 결혼도 속히 하고 이혼도 즉시 한다. 무엇보다도 뚜렷한 것은 불확실성에 대한 참을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필자는 중학생 때 유행가에 사랑이란 가사를 우물거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어찌 지금 세대가 이를 이해할 수 있으랴. ‘철수는 영희를 사랑한데요’라고 놀리기라도 하면 철수는 불같이 화를 내고 영희는 울면서 길 밖에 나올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 이조 시대인들 없었으랴만 지나간 시대에 연인은 사랑을 부르짖으며 편지를 쓰고 공상과 상상으로 날을 밝혔다. 이러한 고뇌는 다분히 시적(詩的) 능력을 키위주기도 했다. 이런 상상과 공상이 요즈음 젊은 세대에서는 판타지 소설과 SF 영화로 대체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역사가 흘러도 남녀간의 사랑, 그 애절함과 격렬함, 그 터질 듯한 실망과 좌절은 예나 지금이나 같을 것이다. 다만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요즈음 사랑은 범위는 넓어진 것 같은데 깊이는 얕아진 것 같다.
문학에서는 물론 역사에서도 기막힌 사랑이 심금(心琴)을 울리고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사랑하던 님과 이별하고 나서 우울증에 빠지거나 간혹 심각한 정신병적 상태가 되기도 한다. 이별이 한(恨)이 되어 한 평생 우울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사업으로 성공하거나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도 있다. 이별 후 평생 한스럽게 살아가는 사랑의 노래를 들어보자.

------------------------- 얼음 밑을 흐르는 눈물 - 이옥봉 한평생 이별의 한 깊은 병 되어 술도 소용없고 약도 소용이 없네 이불 속 짓는 눈물 얼음밑 강물같아 밤낮없이 흐르건만 남은 알지 못하네

---------------------------- 이 경우는 한스러울망정 그래도 살아가고 있다. 옛날 이야기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 나머지 별당 아씨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예가 많았다. 이름하여 상사병이라는 것이다. 그 슬픔이 얼마나 깊었기에 죽음에 이르렀던 것일까? 그 아씨는 이미 우울병을 앓고 있던 중에 이루지 못한 사랑의 충격을 받고 우울증이 악화되어 죽고 만 것일까? 아니면 건강하던 아씨가 생전 처음 이성에 끌려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자극이 너무 큰 나머지 쇼크로 죽은 것인가? 상사병은 여자에게만 있었을까? 가슴 찡한 황진이의 시가 있다.

-------------------------- - 황진이 어뎌 내 일이여 그릴줄를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졔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情은 나도 몰나 하노라. (아아 나의 한 일이여. 막상 보내놓으니 더욱 그리워할 줄을 몰랐더냐 있으라고 했더라면 가겠느냐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나서 그리워하는 이 심정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로구나)

--------------------------- 이 시는 황진이를 죽도록 짝사랑 하다가 이를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이웃에 사는 홍윤보라는 떠꺼머리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움직이지를 않았다. 이에 황진이는 자신의 속적삼을 내다가 덮어 주었더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 한다. 순진한 총각의 목숨을 건 진실한 사랑에 황진이가 감동되어 지은 시조이다. 죽음은 슬프지만 남겨진 순수한 사랑의 흔적은 많은 이들의 마음을 적셔 준다. 위의 청년처럼 우울증이 심해져 죽음에 이른다는 것은 오늘날의 의학 지식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우울증 중에는 신경증 정도라면 이는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감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심해져서 주요 우울증(major depression) 상태라면 심각한 문제다.

이는 심한 우울 기분과 함께, 먹는 것, 소화되는 것, 잠자는 것, 의욕 등 삶의 기본적 생리 기능의 저하를 동반하는 것으로, 만일 이것이 제대로 치료되지 못하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 전국 여러 곳에 상사병과 관련하여 相思바위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죽음에 이르는 상사병은 이제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요즈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죽긴 왜 죽어” “죽을 기운 있으면 살고 말지”라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순수한 사랑은 무모할 수 있다. 맹목적이기도 하다. 사랑의 순수함은 약해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개인적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무시하기보다는 이에 미치지 못함을 더욱 안타까워하지 않는가? 위에서처럼 죽을 정도의 사랑은 아니라 하더라도 사랑에 빠져 허우적대는 친구가 있을 때 우리는 “저 사람 사랑에 빠져서 제 정신이 아니야”라고 농담한다. 이 친구는 사랑에 몰두되어 애인 생각에 일도 못하고 애인의 모습이 자꾸 떠오르고, 잠시라도 잊고 다른 일을 하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다. 스스로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라고 한다. 이 상태는 단순히 마음의 움직임일까? 병일까? 사랑에 빠진 것도 뇌 기능의 변화에 의할 것이라는 가설을 토대로 Mararriti과 Akiskal (1999)이 재미있는 연구를 하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세로토닌(5-HT)의 기능 변화를 혈소판의 3H-paroxetine 결합체(binding site)의 수를 재서 이를 정상인과 강박 신경증 환자와 비교해 본 것이다(표). 표. 혈소판의 3H-paroxetine 결합체(binding site)의 최대 결합능력(Bmax)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나이(세) 강박증 척도 우울정도 Bmax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에 빠진이 24 8 2 625 강박증환자 29 19 4 736 정상인 29 2 3 1324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표에서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625)에서 세로토닌 결합 능력(Bmax)이 정상인(1324)에 비해 의미 있게 낮았으며 강박 신경증 환자(736)와는 비슷한 정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정상인과는 구별되는 ‘사랑病’에 걸렸다고 할 수 있는 소견이다. 그런데 이들을 1년 후 재검사하니 원래 상태로 정상화되었다. 즉 이러한 현상은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감정을 뇌의 단일 물질의 기능 변화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일시적이나마 강박 장애 내지는 신경증적인 상태이며, 만일 이것이 깊어지면 심각한 우울병으로 이행(移行)될 수 있다. 요즈음 우울병 치료에 많이 사용되는 세로토닌 재흡수 차단제는 강박장애에 사용하여 효과가 있을 뿐만 아니라, 수면, 식이(食餌), 월경, 충동 조절 장애를 조절해 주기도 한다. 이들 현상이 세로토닌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강박 성격인에서 우울증에 잘 걸린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강박 성격인이 사랑에 빠지면 병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들은 항상 목표가 높고 목표 지향적이어서 이에 미치지 못하면 좌절에 빠지기 쉽고 자기 비난이나 열등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대부분 꼼꼼한 성격인 의료인들은 특히 반(反) 강박적으로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즈음 살기도 어려운데 이 무슨 사랑 타령이냐!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자.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무슨 힘으로, 또 무슨 보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매일매일 지치고 짜증 는 일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내가 갖고 있는 조그마한 사랑을 키워가야겠다. 아름다운 시(詩) 한 편 읽거나 꿈을 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사랑 거즛말이 님 날 사랑 거즛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긔 더욱 거즛말이 날갓치 잠 아니오면 어늬 꿈에 뵈리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