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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ntal Clinic]도덕을 부르짖는 사회

본능적 욕구 강할수록 도덕적 요구 강해 … 사회도 자연치유 기능 있었으면

  • 입력 2004.1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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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료실에 있다 보면 여러 문제로 오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그중에는 도덕적인 문제로 오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인 개념이 없어, 또 어떤 사람들은 양심과 도덕이 너무 강해 문제가 된다. 도덕적인 개념이 없는 경우는 소위 반사회적 인격장애라는 것이 있는데 보통 범죄인들을 말한다. 이런 경우는 정신과 의사들도 별로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치료도 잘 안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에 반해 너무나 도덕적인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도덕적인 의무를 다하려고 애쓴다. 그러다 결국은 갈등이 많아지고 지쳐 도움을 청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분들에게는 의사도 상당한 공감을 느끼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이런 사람들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리고 다른 사람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많은 부담을 갖는다. 이때 의사는 “너무 의무를 다 하려고 하지 마세요. 세상에 완벽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너무 죄책감을 갖지 마세요. 사람이란 실수도 하게 마련이고 어떨 때는 거짓말도 하게 마련입니다. 좀 그렇게 한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겠습니까?”라는 식으로 접근하며 도와주는데, 효과가 있기도 한다.그러나 그래도 소용이 없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선하고 올바른 일을 하지 말라는 것으로 느끼고 그렇게 하지 않을 때 죄책감을 감당하기 어렵고 아무리 생각을 해도 도덕적으로 옳은 것을 옳지 않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도덕의 배후에는 강력한 본능 자리 이런 경우에 정신분석을 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마음 밑바닥에 있는 매우 강렬한 본능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본능에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성적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욕구이다. 사람은 자라면서 이 두 본능 중에 하나 또는 두 가지 다 매우 강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본능이 너무 강렬하면 생활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은 살 길을 찾게 된다. 즉, 이 본능을 제어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를 마음 속에 갖추게 된다. 이 도구가 바로 도덕적 개념으로 불리는 양심이다. 이 도구가 적당히 작동할 때 인간은 평화와 안전과 행복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 도구가 너무 강하게 작동될 때는 온갖 부작용을 양산한다. 적당한 도덕 앞에서는 편안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도덕을 너무 강조할 때는 뭔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갖게 마련이다. 그러한 불편한 느낌을 갖는 데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강조된 도덕의 배후에는 강력한 본능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강렬한 에너지를 느끼기 때문에 불편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정의와 도덕을 부르짖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과거력에 흠이 있는 사람들은 반성하라. 성매매와 같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으로 돈을 벌려 하지 마라. 우리나라 평균 임금보다 많은 돈을 벌면서도 부정청구, 허위청구로 가득한 의사 집단은 반성하라. 단돈 일원이라도 떳떳치 못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은 회개하고 참회하라. 자연이 물려준 재능에 의해서 이룬 것을 자신이 잘나서 이루었다고 착각하지 말고 그렇게 된 체제 자체를 고쳐야 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혜택과 행복을 누릴 권리를 갖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러니 차별화된 시스템을 고쳐야 한다.너무 엄격한 도덕 강조하는 사회 모두가 맞는 말이다. 듣고 보면 어느 것 하나 반박할 여지가 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면 부끄러운 점도 있는 것 같다, “맞아, 사회는 그래야 되는데. 그래야 모두가 공평하고 행복한 사회가 열리는데. 한마디도 틀린 점이 없어.” 그러나 무언가 불편하다. 더구나 그렇게 도덕적으로 행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처벌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뭔지 모르게 더 불편해진다. 맞기는 맞는데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왜 불편해질까? 적당한 도덕의 적용을 넘어 너무 많고 엄격한 도덕을 따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무의식적으로 그러한 도덕의 배후에 있는 본능의 에너지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적으로 볼 때 공격적이고 파괴적인 본능의 에너지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인류 역사를 보면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잔인한 일들이 행해졌는가? 그렇게 좋은 도덕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해질 수가 있는가? 종교적, 이념적으로 도덕과 정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지는 역사책을 찾아보지 않아도 누구나 아는 일이다.극과 극은 통한다 했던가? 엄격한 도덕의 배후에는 강렬한 본능이 있게 마련이다. 성적인 욕구가 강할 때는 도덕은 금욕과 심지어는 자학을 요구한다. 공격적인 욕구가 강할 때는 도덕은 정의와 원칙을 따를 것을 요구한다. 본능적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초자아라고 하는 도덕적 요구도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적개심과 증오가 충만할 때 수면 위에 떠오르는 것은 엄격한 정의와 예외 없는 원칙이다. 어느 사회가 예외 없는 도덕과 정의를 강조할 때 정신분석적으로 보면 그 사회는 적개심과 분노의 욕구가 매우 강렬한 사회이다.너무나 엄격한 도덕과 양심으로 괴로워하는 환자가 있을 때의 정신분석적 치료 방법은 무의식에 있는, 즉 본인이 알고 있지 못하는 본능의 욕구를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것을 무의식의 의식화라고 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환자는 그러한 치료과정을 순순히 따라가지 않는다. 정신분석적 용어로 그것을 저항이라고 한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엄격한 정의와 원칙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배후에 있는 본능의 욕구를 알게 해야 한다. 적개심과 증오와 분노를 알게 해야 한다. 그래야 병리적 사회가 아닌 건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개인의 정신병리는 정신과 의사가 치료한다. 사회의 정신병리는 정치지도자들이 치료한다. 그러나 문제는 존경받는 치료자가 없다는 데 있다. 또는 능력 있는 치료자가 없다는 데 있다. 좋은 치료자가 있어도 저항 때문에 매우 어려운데 능력 있는 치료자가 없으니 더 난감할 수밖에 없다.무슨 일이든 지나치면 넘치는 법이다. 새삼스럽게 중용의 도가 그리워진다. 보다 인간적이고 평화롭고 안정된 곳에서 살고 싶다. 휴머니즘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적당한 도덕이 적용되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잔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당한 실수나 거짓말은 용인하는 사회였으면 좋겠다. 사람의 신체에는 자연치유 기능이 있다고 했던가! 마찬가지로 사회에도 자연치유 기능이 있어 건강한 사회가 되길 기대한다면 너무나 순진한 생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