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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연기와 인생의 진정한 스승은 ‘어머니’

순돌 아빠 역 등 47년째 국민들 즐겁게 한 ‘연기의 장인’

  • 입력 2015.12.28 18:07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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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송추 한옥에서 사과농사 지으며 전원생활 즐겨
아내 별세 후 혼자서 딸 셋 잘 키워 결혼, 손주 5명 둬

탤런트 겸 배우 임현식(70)은 47년째 국민들을 즐겁게 해준 ‘연기의 장인’이다. 1969년 2월 MBC 1기 공채탤런트로 데뷔,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의 순돌 아빠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은 감초연기자이자 인기연예인이다. 털털한 인상에 맘씨 좋은 이웃집 동네아저씨 같은 풋풋한 연기로 사람냄새가 물씬 난다. 지난 10월 3일 방송된 MBC TV프로그램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연기장인 임현식의 한 지붕 세 가족편)에서 그의 일상생활이 공개돼 눈길을 모았다. 방송, 영화 등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탤런트’ 임현식을 서울교대역 부근 한국전립선관리협회(회장 권성원) 사무실에서 만났다.

임현식을 처음 만난 기자는 “MBC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를 잘 봤다”는 얘기부터 꺼냈다. 그는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서동자, 향년 53세)에 대해 그리운 마음을 드러냈다. “2004년 9월 29일 오후 아내가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교사였던 아내는 힘겨운 투병 중에도 소아암 환아(患兒)들을 보살폈습니다.”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방송에서 임현식은 딸들과 함께 아내가 잠든 묘를 찾았다. 그는 TV드라마 ‘대장금’을 찍을 때 중간 중간 짬을 내어 병석의 아내에게 갔다 오곤 했다. 그는 “아내가 암센터에서 머리를 깎고 누워있는데 매주 나가 연기할 건 해야 했다. 연기는 다 되더라. 내가 무당인가 싶었다”고 미안해했다.

임현식은 딸 셋(임남실, 쌍둥이인 임금실?임은실)을 뒀다. 배우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 사랑하는 어머니와 아내를 떠나보낸 그는 혼자서 세 딸을 잘 키워 모두 결혼시켰다. 설, 추석 등 아내의 빈자리로 쓸쓸하게 느껴지려고 할 때면 딸과 사위, 손주(5명)들이 그의 송추 집으로 모인다.

아내가 남겨준 ‘선물 같은 가족’들이 있어 꿋꿋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다. 교수인 첫딸은 세 아들의 엄마다. 둘째 딸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석사학위를 땄다. 큰 사위는 교수며 둘째사위는 미국식품회사 한국지사, 셋째사위는 LG전자에 다닌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송추 한옥에 홀로 남은 임현식은 2013년부터 둘째 딸 가족과 살고 있다. 요즘은 미운(?) 7살짜리 손자(주환)는 임현식을 미소 짓게 하는 꽃이자 짝꿍이다. 그는 넓은 마당이 딸린 고풍스러운 한옥에 살고 있다. 푸른 나무들로 뒤덮여있어 자연친화적 분위기가 난다. 마당에서 강아지를 키우며 전원주택생활을 즐긴다.

지금의 한옥은 어머니(배안순 권사, 1922년 6월 4일 전남 벌교 태생, 전남여고 졸업)를 모시기 위해 1999년 지었다. 여름엔 시원하게, 겨울엔 따뜻하게 지내시라고 마련했지만 어머니는 한옥에서 2년 반밖에 지내지 못하고 2002년 9월 9일 뇌졸중(향년 81세)으로 세상을 떠났다.

외아들 임현식 위해 헌신한 어머니

지금의 ‘국민탤런트 임현식’이 되기까지엔 그의 어머니가 있었다. 외아들을 위해 평생을 다 바친 어머니가 원군이자 큰 힘이 돼준 것이다. 신문기자였던 아버지(임병하)가 6?25전쟁 때 33살의 나이로 실종되면서 26세에 과부가 된 어머니였다. 음악선생님이어서 아들에게 음악공부를 많이 시켰다.

어려운 살림에도 비싼 일제전축을 사줄 만큼 아들을 위했다. 외가인 광주시에서 초·중·고를 다닌 임현식은 학창시절 바이올린을 배워 친구들로부터 부러움을 샀다. 어머니를 따라 영화관에도 자주 드나든 그는 고교시절 연극반활동을 했다. 그가 연기자를 꿈꾼 건 자연스러웠다.

“어머니는 동네 철길에서 가요, 가곡, 이탈리아 민요 등을 곧잘 부르곤 했어요. 내가 탤런트가 된 것도 어머니의 후광으로 그 피를 이어받았습니다.”

고교 3학년 때 그의 대학진학 목표는 연예인이 많이 나온 한양대 연극영화과였다. 하지만 성적이 중간정도라 어머니의 걱정이 컸다. 어머니는 한양대 교수를 찾아가 “아들의 전망이 어떻겠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 입시경쟁률은 20대 1이었다. 그는 “차범석, 김정옥 등 당시 쟁쟁했던 유명극작가들의 추천도 받아 여러모로 유리했다”고 회고했다.

임현식은 제대 후 연극 단역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힘들거나 흔들릴 때 마다 서울 자취집으로 꾸준히 보내준 어머니의 편지가 큰 힘이 됐다. “나는 너의 밑거름이 되겠다. 그래서 지금도 나는 노력중이다.

부디 네가 가는 길을 훌륭히 걸어가라”는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격려 글에 흔들리지 않고 연기자 길을 꿋꿋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 임현식은 “어머니는 내 인생, 연기의 스승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런 어머니가 광주에 있는 땅까지 정리하고 상경했다. 무명연기자인 아들의 생활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임현식은 그때 드라마출연으로 시골장면을 촬영할 때 지금 사는 지역을 수시로 다녔다. 서울서 1시간 거리라 어머니와 함께 둘러봤는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6611㎡의 땅을 사고 어머니와 살기 시작했다. 그때가 1973년이다. 그는 젖소를 키우고 싶었다. 어머니가 동물을 좋아한 이유도 있었다. 암송아지 5마리를 샀다.

그리고 어머니가 목부(牧夫) 1명을 두고 낙농을 시작했다. 그도 ‘낙농개론’ 책을 구해 읽으며 일을 거들었다. 어머니는 빈 땅만 있으면 소에게 먹인다고 옥수수를 심을 정도로 고생이 심했다. 그렇게 한 3년쯤 지나자 젖소도 늘고 형편이 나아졌다.

힘들었던 무명시절…1978년 연속극 ‘당신’에서 빛 봐

임현식의 무명시절은 무척 힘들었다.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3학년 2학기 때 ‘극단 광장’에 연구생으로 들어가 1년 반 동안 단역, 엑스트라로 활동하다 MBC 공채탤런트 합격 후 일주일이 지나 ‘수양산맥’이란 드라마의 포졸로 처음 출연했다.

그마저 A도, B도 아닌 ‘포졸F’였다. 수십 명이 입었던 포졸 옷에다 수염도 달아주지 않았다. 그 때 첫 대사는 “네!”란 한 마디였다. 게다가 가슴을 찌르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대충 서 있어라!”였다.

그는 ‘그래도 하란 대로 해야지’라며 자신을 다독였지만 눈물이 났다. 그 뒤 ‘수사반장’에서도 도둑 같은 단역이나 맡는 등 안 풀려도 너무도 안 풀렸다.

출연료를 몇 푼 받으면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며 “나는 왜 이럴까” 한탄하기가 일쑤였다. 처음 5년간은 무명연기자로 고생했고 부업으로 농사를 짓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성실하고 싹싹했던 임현식은 연예계 선배나 PD 등으로부터 동정표(?)를 많이 얻었다. 드라마배역으로 활동하던 중 기회를 잡았다.

1978년 김수현 작가의 일일연속극 ‘당신’에 출연하게 돼 끼를 발휘, MBC 연기대상 조연상을 받고 자신감을 얻었다. ‘한 지붕 세 가족’도 만났다. 1986년부터 순돌 아빠로 출연, 평범한 서민가장의 이미지로 큰 인기를 얻었다. 광고모델섭외도 줄을 이었다. 원래 방영계획은 1년이었지만 높은 인기로 7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순돌 아빠 역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SBS가 1992년 개국했다. 그는 SBS드라마 출연을 위해 MBC소속에서 벗어나 자유 신분(프리)이 되려고 했다. MBC가 반대했다. 결국 미움을 사 MBC를 떠났고 방영 중이던 ‘한 지붕 세 가족’에서도 이사 가는 걸로 퇴출당했다.

그럼에도 임현식은 매사를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MBC는 물론 KBS에도 출연하게 됐다. 명품조연으로 이름난 그는 ‘한 지붕 세 가족’, ‘허준’, ‘대장금’, ‘모래시계’, ‘약속’, ‘영웅일기’, ‘임꺽정’, ‘대물’, 영화 ‘튜브’, ‘라이어’, ‘미녀는 괴로워’, ‘유나의 거리’ 등 1000여 편의 드라마와 14평의 영화에서 감칠맛 나는 토종연기를 펼쳐 팬들의 사랑이 대단했다.

소탈하고 능청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그는 “그 같은 성공도 자식이 좋은 배우가 될 것으로 믿고 꾸준히 밀어준 어머니 덕분”이라며 “오직 저만을 위해 살다 가셨다”고 고마움을 나타냈다.

나눔과 베푸는 삶, 사랑실천에선 ‘으뜸주연’

명품조연으로 유명한 임현식은 베푸는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나눔과 이웃을 향한 사랑실천에선 ‘으뜸주연’이다. 올 3월 2일 화순전남대학교병원을 찾아 소아암 환아들을 위해 써달라며 1000만원을 기부했다. 화순전남대병원의 초대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2007년에도 1000만원을 기탁한 바 있다.

소문난 애처가였던 그는 2004년 9월 아내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치료받았던 국립암센터(경기도 고양시)에도 1억 원을 기부했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보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욕심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했다. “70인생을 살면서 드라마 일에만 신경 썼다. 더러 좋은 배역을 맡지 못하면 섭섭하기도 했고….

그러나 이젠 그런 것에서 벗어나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그리운 사람, 좋을 일들을 되돌아보고 싶어요. ‘외로움도 즐거움’이란 말이 있듯 마음을 비우고 많이 생각하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임현식, 건강관리 이렇게 한다!>
지난해 50년 가까지 피웠던 담배 끊고 몸 챙겨
집 부근 텃밭 가꾸며 산책…무리한 운동은 삼가

탤런트 임현식은 지난해 9월 15일 심근경색 진단 후 20살 때부터 50년 가까이 피워온 담배를 끊고 금연캠페인에 앞장서고 있다.

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로 활동했던 그는 지난해 허리디스크와 급성심근경색으로 방송활동을 멈췄을 정도로 건강에 적신호가 왔다.

드라마출연 등 거듭되는 방송 일에다 수시로 바뀌는 촬영일정, 여기저기서 부르고 만나자는 사람들이 많아 운동을 규칙적으로 할 수 없었던 탓이다.

게다가 허리디스크로 잘 움직이지 못하고 스트레스까지 겹쳐 합병증으로 심근경색이 온 것이다. 8개월여의 약물치료 끝에 완쾌됐지만 그는 요즘 건강에 아주 신경 쓴다.

집 부근 텃밭을 가꾸고 가벼운 산책도 하며 몸을 추스른다. 될 수 있는 대로 심한 운동을 삼간다.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마음을 편하게 먹으려고 한다.

“병을 고치기 힘든 이들을 돕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열심히 연기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부·봉사하며 살겠습니다. 환자와 가족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는 것은 돈도, 다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의사들의 따뜻한 말 한마디였습니다.”

2000년 경희대로부터 한의학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2012년 봄 사과나무 60그루를 심었다. 잘 길러서 상품(上品)은 조합원으로 가입한 장흥농협을 통해 팔고 나머지는 지인들과 나눠먹을 꿈을 꿨으나 올해 농사는 실패했다.

벌레에다 산비둘기, 까치들이 쪼아 먹어 과실을 망쳤다. 하지만 내년엔 꼭 성공시킬 각오다.

[임현식 주요 약력]
* 전북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출생(1945년 12월 31일)
*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한양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졸업(1964학번), 경희대학교 한의학 명예박사(2000년)
* 1969년 2월 MBC 1기 공채탤런트로 연예계 데뷔
* ‘한 지붕 세 가족’, ‘허준’, ‘대장금’, ‘멋진 친구들’, ‘모래시계’, ‘올인’, ‘타짜’ 등 1000여 편의 드라마 및 ‘라이어’, ‘미녀는 괴로워’, ‘올드미스 다이어리’ 등 영화 출연
* MBC 연기대상 최우수상(1990년), 백상예술대상 최우수연기상(1991년), SBS 연기대상 공로상(2004년) 등 수상
* 호남대학교 다매체영상학과 겸임교수, 중국 후난(湖南)대 겸임교수 역임(2006년 8월~)
* 서울 신설동 남서울예술종합학교 부학장 겸 연기예술학과 교수 역임
* 국민건강보험공단 홍보대사, 소소심(소화기?소화전?심폐소생술) 홍보대사, 착한운전 홍보대사, 양주시 홍보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