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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비뇨기과학의 선구자, 김용균 박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김영균 명예교수 interview

  • 입력 2016.01.11 17:59
  • 기자명 김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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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폐허의 잿더미가 된 한국을 보며 외국에서는 ‘희망이 없는 땅’이라들 했다. 하지만 우리는 기적을 이뤄냈다.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 의료에 있어서도 세계를 선도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이 나라를 위해 노력한 피와 땀의 대가라고 한다면 과연 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최근 TV나 신문, 심지어는 홈쇼핑에도 전립선에 관한 광고가 줄을 잇고 있다. 남성들 사이에서는 ‘000가 전립선에 좋다더라’, ‘나이가 들면 전립선이 안 좋아지는데 어느 병원에 가면 좋겠는가’하며 많은 대화가 오간다. 심지어는 비뇨기과 의사보다도 더 해박한(?) 지식을 가진 환자들도 종종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15~20년 전만해도 전립선에 대한 인식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낮았다. 전립선과 갑상선을 헷갈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무슨 장기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짧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그 사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을까. 짧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20년 전 설립된 국민들의 계몽 단체인 바로 한국전립선협회가 그 효시가 되었고, 한 단계 더 올라가자면 대한민국에 처음으로 알리고 한국전립선관리협회를 설립한 김용균 박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일제 강점기에서도 우리 민족이 필요로 하는 의사가 되고자 마음먹었던 의학도, 해방 후 누구의 도움 없이 혈혈단신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의 의술을 배워 의료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의학의 뿌리를 내린 비뇨기과학의 선구자 김용균 박사. 계간 전립선은 한국전립선관리협회 설립 20주년을 기념해 초대 회장이자 대한민국 의료계의 역사인 김용균 박사를 만났다.

의학도 김영균, 비뇨기과학의 길을 택하다!

1926년 병인丙寅년 생으로 서울에서 태어나 교동공립보통학교와 경기공립중학교를 나온 김용균 박사는 1943년 일제 강점 하에서 일본인 학생들 사이에서 한국인이라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입학시험을 함께 치러 당당히 경성제국대학 예과 을류(의예과) 응시했다. 창씨개명을 강요당하던 시기, 집안 모두 끝내 거부했던 터라 성적과 상관없이 당락이 불투명했지만 김 박사는 당당히 경성제국대학에 합격한 것이다. 이로써 김 박사의 의학도로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의예과를 마친 김 박사는 1945년 4월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그해 8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면서 전쟁과 함께 우리 민족에 해방이 찾아왔다. 실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는 국립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바뀌게 된다.

“광복은 되었지만 경성제국대학에서 서울의대로 바뀌면서 학제에 크고 작은 변화가 많았고, 학부와 전문부 학생들의 합동강의로 수업환경이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도 내가 있을 당시에 ‘비뇨기과학’이 하나의 강좌로 독립이 되었어. 신장에서부터 부신, 요관, 방광, 불임증, 종양 결석까지 유사 유관 상호간에 연결고리가 매우 다양해서 정말 흥미로운 과였지.”

1945년 10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에서 ‘피부비뇨기과학’에서 ‘비뇨기과학(urology)로 독립 했다. 서구나 미국에 비해 우리는 매우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1949년 봄, 김 박사는 서울의대 3회로 졸업을 한다.

나는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평생 직업으로 비뇨기과학을 택하기로 했다. 졸업시험도 끝나고 바로 비뇨기과학 의국으로 출근했다. 해방된 것이 1945년, 그리고 4년이라는 세월이 지났건만, 눈에 띌만한 큰 변화나 발전은 거의 없었다. 전립선은 지금과 달리 관심거리가 아니었으며, 신장결핵이 흔했다. 신장 자체보다도 방광결핵이 진행되어 심한 방광염으로 변기를 거의 달고 다니는 환자가, 신장 적출 수술을 받고 웃음을 되찾는 모습 등을 보고 보람을 느끼며 함께 즐거워했다.

김영균의 의학산문 中에서

김 박사에게 의국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인턴체계가 없던 우리나라에서는 체계적인 의학 교육을 받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지금의 의술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무작정 외국 유명 병원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무작정 보내기를 얼마나 했을까, 아무리 두드려도 열릴 것 같지 않은 문이 거짓말처럼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바로 필라델피아 종합병원이었다.

존스 홉킨스에서 비뇨기과학의 세계적 거장 ‘스콧 교수’를 만나다!

‘2910’

이 숫자는 김영균 박사의 첫 번째 대한민국 여권번호다. 김 박사는 이 숫자가 적힌 여권을 들고 1953년 11월 17일 부산에서 출항한다.

S. S. 시 서펀트(Sea Serpent)라는 이름의 이 화객선은 일반객실이 부설된 미국 국적의 화물용 기선이었다. 날씨는 좋은 편이었으나 파도가 거세지면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밤이면 ‘내가 괜한 짓을 저질렀어, 집에서 편하게 있을 것을…’하며 후회하다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3년을 약속했으니 견뎌야지!’하고 마음을 다잡았다가 ‘집에 두고 온 돌 지난 석 달 된 딸과 아내는 어떻게 지낼지…’하는 생각에 울컥 눈물이 나오기도 했다.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꼼짝 못하는 게 바로 나의 신세였다.

김영균의 의학산문 中에서

김 박사는 1953년 12월 3일, 16일 만에 드디어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한다.

그리고 곧장 그는 필라델피아 종합병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시립병원이다 보니 환자는 많고, 공부할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필라델피아 종합병원에서 1년 반을 근무한 김 박사는 이후 세계 최고의 명문 존스 홉킨스 병원으로 옮기기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립선비대증과 전립선암, 특히 전립선암의 발생기전과 그에 대한 내분비요법(현재 쓰고 있는 호르몬요법)을 확립한 고로를 인정받아 196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허긴스 교수의 직계 제자인 스콧 교수에게 전립선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새로운 학문에 시간이 가는 줄 모르던 김 박사,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홉킨스에서 수련이 끝날 무렵 스콧 교수에게 호출을 받는다.

“펠로우십이 끝나면 어떻게 할 셈인가. 만약 자네가 원한다면 레지던트를 시켜주겠네.”

실로 기가 막힌 제안이었다. 하지만 김 박사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3년 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가겠다’는 아내와의 굳은 약속과 불 보듯 뻔한 한국의 의료 실정이 눈에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1956년 1월, 유학을 마친 김 박사는 드디어 고국의 땅을 밟는다. 부픈 마음으로 한국에 도착한 김 박사, 하지만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닥쳐보니 막막했다. 하지만 치료는 해야겠기에 경전병원(경성전기주식회사, 現 한국전력병원의 전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전립선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어려운 것이 있으면 일본과 교류를 하며 전립선학에 대한 연구를 서서히 넓혀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전립선학은 그렇게 김영균 박사를 통해 체계를 잡기 시작했다.

1995년 드디어 한국전립선관리협회가 탄생하다!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나는 전립선에 특히 많은 관심이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이미 전립선 건강에 많은 관심을 쏟고 있었으며, 일본의 사정도 비슷했다. 일본은 군마群馬대학의 시다 교수가 은퇴 후에 전립선재단을 만들고는 고군분투하는 현장을 여러 번 방문해 목격한 바 있어 나로서는 여러모로 참고가 되었다.

김용균의 의학산문 中에서

김용균 교수는 일본의 전립선재단을 보면서 스스로 구상을 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대학 등 연구기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전립선 관련 집회 등을 돕고 있어서 독자적인 활발한 역할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학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적 계몽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제1회 호암상 의학상 부문에 김 교수가 수상자로 선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시상식 다음날 김 교수는 상금 5,000만원을 의논 한마디 없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발전기금으로 기증해버린다. 모두가 노력해 이룬 결과를 한 사람의 공으로 세워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 교수는 호암상을 계기로 호암재단을 찾아 전립선협회의 취지를 전하고 직접 원조를 청했다.

“사실 크게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 그런데 의외로 너무들 관심을 보여주는 거 아니겠나. 호암재단은 물론 제약사나 다른 동료의사들이 뜻을 모아주었지. 일이 되려니 그렇게도 되더군.”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하지만 그 당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김 박사의 마음이 어땠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렇게 백방으로 모인 기금이 지금 한국전립선관리협회 탄생의 바탕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도움의 손길은 이어졌다. 그렇게 1995년 11월 27일 한국전립선관리협회가 설립되었고, 김 박사는 초대 회장을 맡게 된다. 이후 2001년 2월 권성원 교수를 제2대 회장으로 영입하면서 지금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김 박사는 경기도에 위치한 삼성 노블 카운티에서 지금도 자신의 연구실에서 쉼 없는 집필 작업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전후 폐허의 잿더미를 딛고 지금의 부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안위를 과감히 버리고 나라를 세운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 지금까지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이름 김영균 박사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