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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 Crime]성애탐구 조각가 ‘첼리니’의 살인

초기 작품 대부분이 성행위 표현 … 미술가 최초 자서전 남겨

  • 입력 2005.04.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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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첼리니 작: '페르세우스', 1545~54, 피렌체, 베키오 다리

16세기 이탈리아의 조각가 첼리니(Benvenuto Cellini 1500~71)는 미켈란젤로의 제자로서 조각가로 대성해 로마 법왕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의 국왕 프란소와 1세의 적극적인 보호를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한 조각가이다.
첼리니는 1500년 피렌체의 한 플루트 주자(奏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그를 자기의 뒤를 잇는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었으나, 그는 아버지의 말에 따르지 않고 금속세공을 배우다 나중에는 조각가가 됐다. 피렌체의 유명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잘생긴 얼굴에다 승마와 검술로 다져진 당당한 체격이어서 여성들의 주목과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는 언변이 좋았으며 특히 기분 나쁜 상대에게 독설을 퍼붓기로도 유명했다.
그의 초기 작품은 남녀의 성행위 장면을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그를 성애탐구 조각가로 불렀으며 이것이 전 유럽으로 삽시간에 퍼져 성행위 장면의 조각을 ‘첼리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기량이 뛰어나 미켈란젤로 이후의 조각가로 자타가 인정했다. 그는 자존심이 강하며 사람들과는 비타협적인 성격이어서 주위 사람들과도 잘 싸웠기 때문에 경찰에도 자주 불려갔으며 처벌받는 일도 많았다.

상해, 살인, 강도, 성범죄
기록에 의하면 적어도 4번에 거쳐 재판을 받았는데 처음은 상해로, 두 번째는 살인으로, 세 번째는 강도, 네 번째는 성범죄로 처벌을 받았는데 그 중 가장 무거운 죄는 1534년에 로마에서 라이벌이던 폰페오 데 카피타네이스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사람을 죽인 그는 곧 도망쳐 이곳 저곳을 전전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었는데, 그의 조각에 관심을 보이던 법왕 파울스 3세의 각별한 배려로 면책되어 법왕 밑에 일을 하는 매우 관대한 처우를 받았다.
첼리니가 더욱 유명하게된 것은 미술가로서는 최초로 자서전을 남겼기 때문이다. 그 원고는 일단 18세기까지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돼 있었는데, 1805년에 괴테가 이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그 후 수 개 국어로 번역돼 출판됐다. 번역자인 괴테는 첼리니가 당시 이탈리아 전국에 알려진 무법자이면서도 그래도 조각을 계속하게 된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자기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자기 이외에는 믿을 곳이 없었던 시대의 일로써 ‘체면을 상한 자는 곧 복수하지 않으면 마치 육체적인 병과 같은 고통을 당하게 되어, 즉 일종의 열병과 같은 것에 걸린 것과 같아 그것은 상대의 피를 보아야만 치유되었다.’라고 말이다. 특히 첼리니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매우 특이한 일을 하였는데, 자서전의 마지막에서 그가 옥중에서 쓴 유명한 시를 보면 매우 고통스러운 곤경에 처해 있으면서도 절망과 후회가 뒤섞인 심정으로 신에게 호소한 구구절절한 내용은 평범한 심정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어린 페르세우스를 데리고 있는 다나에(1545~54)를 보면 그 탁월한 조형력과 기품에 넋을 잃게 한다’ 라고 극찬했다.
법왕인 클레멘스 7세는 첼리니를 화폐 제조자 겸 플루트의 주자로 채용했다. 그래서 첼리니의 공방은 단숨에 로마인들의 인기를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여기서 만든 금화나 메달은 귀족들이 앞을 다투며 사들였다. 그래서 첼리니는 하루아침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자 그는 술 마시고 여자를 가까이 하는 일로 소일하며 친구들과 밤을 새워가며 도박을 하다가는 싸움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는 가운데 사람을 죽이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리고는 경찰에 나가서는 죽인 자기보다는 죽은 사람이 나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었다고 변명했으며 그의 뒤에는 교황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경찰은 그를 옥에 가두지는 못했다.
클레멘스 7세는 그의 사람을 죽이는 행각은 관대하게 봐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화(鑄貨)에 사용되는 금을 질이 나쁜 금속으로 바꿔치기해 불량주화를 만들어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교황은 그를 당장에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를 체포하려고 경찰이 그의 집에 갔을 때는 이미 줄행랑을 놓은 후였다.
[2L]그는 자기가 지은 죄가 있기 때문에 로마를 탈출해 프랑스로 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프란소와 1세는 그를 궁정에 채용하려 했다. 그러자 파리의 화가들은 일제히 탄원서를 국왕에게 내어 그의 채용을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국왕은 그에게 성을 한 채 내주며 그를 정중히 대하였다. 첼리니는 걸작을 많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고관 귀족으로부터 정중한 초청을 받았으나 그러한 자리보다는 거리의 선술집에서 소리지르며 술을 마시다가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더 즐기는 편이었다.
한편 첼리니는 조각을 위해 많은 여성을 모델로 썼는데 그는 그 모델들을 작품을 만드는 일 이외에 자기의 사사로운 감정 발산과 자기의 욕망 채우기에도 이용했다. 그러다가 한 모델 여성으로부터 고소를 당하였는데, 그 이유는 ‘어린이를 만드는 장소 이외에서의 정사’라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경찰에 출두한 첼리니는 ‘그것은 이탈리아 식이다.’라고 답변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정동(情動)적 범죄
이렇게 사생활이 문란하던 그가 1558년에 들어서면서 돌연히 ‘신의 길’을 선택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가 자서전을 쓴 것도 이때인데 그는 서두에 ‘ 사회에 대해 아무런 공이 없는 인간이 사회를 위해 조금이라도 봉사하는 일은 자기가 살아온 생애에 대해서 솔직한 글을 써 남기는 일인데, 이 아름다운 일도 40을 넘으면 때가 이를 허용하질 않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여성들과 난잡한 관계를 맺다보니 그의 애라고 하는 아이가 8명이나 있었다. 그 중 6명은 서자(庶子)이고 2명만이 적자(嫡子)였는데 적자라는 것도 그가 64세에 환속(還俗)하여 결혼해 그 여인과의 사이에 낳은 어린이가 2명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71세로 사망하기까지 유럽의 여러 사회를 휘젓고 다니면서 작품도 많이 남겼지만 사회에 물의도 많이 일으켰다.
그가 남긴 작품으로는 자기의 모습을 조각한 ‘첼리니’라는 동상이 피렌체의 베키오 다리 옆에 있으며, ‘페르세우스’(1545~54)라는 작품은 페르세우스(Perseus)가 괴물 메두사(Medusa)의 머리를 쳐서 들고 있는 장면을 조각한 것인데 메두사의 목에서 흐르는 핏방울 하나하나를 묘사해 살인을 여러 번 한 사람으로서의 안목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3L]그의 금세공작품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사리에라 (Saliera)’(1540~43)인데 이것은 소금을 담는 금으로 된 상자로, 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회화 ‘모나리자의 미소’와 비교되는 조각의 모나리자로 불려왔는데, 작품에는 바다와 대지를 상징하는 남자와 여자의 나신(裸身)이 아름답게 조각되어있고 오스트리아 빈의 예술사박물관의 소장품이었던 것이 2003년 5월 12일 도난당했다. 박물관측에 의하면, 시가 5000만 유로(한화 약 600억원)를 호가하는 것이라 한다.
첼리니와 같은 범행을 범죄심리학에서는 정동(情動)적 범죄라고 한다. 정동이라는 뜻은 정서라는 일반어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화내고, 겁내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감정의 일시적인 흥분상태를 의미하지만 때로는 불만, 원한, 애정 등과 같이 강한 감정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도 정동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정동적 범죄는 감정의 흥분을 억제하지 못해서 급성 또는 만성으로 야기되는 범죄로 첼리니가 행한 그의 범죄행각을 분석하면 전형적인 정동적 범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동적 범인 겸 조각가가 남긴 작품을 노린 범인도 정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