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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를 질투하는 고양이, 희롱하는 고양이

  • 입력 2016.08.18 16:08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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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고양이 화가 루이스 웨인 (Louis Wain, 1860 ~1939)은 고양이를 사람처럼 의인화해서 재미있게 묘사함으로써 명성을 얻은 화가이다. 그의 그림에서 고양이들의 털이 날카로워지면서 거친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흔히 하는 말로 개와 고양이는 감정표현이 서로 반대라고 한다. 상황에 따라 들어맞는 경우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개는 꼬리만 보아도 좋다는 기쁨이나 상대에 대한 공포를 알아차릴 수 있지만 고양이는 꼬리뿐 아니라 표정이나 시선, 자세 등 몸 전체로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그리 쉽지가 않다.

그렇게 고양이의 선천적 감정이 잘 표현된 그림으로는 루이스 웨인의 ‘나비를 보는 고양이’와 ‘나비 잡는 고양이’의 두 그림을 볼 수 있다. ‘나비를 보는 고양이’ 그림은 자작나무가 있는 강가의 풀숲에 이름 모를 흰 꽃이 피어있는 속에 나이든 고양이 하나가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 있는데, 그 눈길이 심상치가 않다. 마치 날아가는 나비를 덮치려는 듯한 눈초리에다 고양이 목덜미의 흰털을 일떠세우고 있어 그 내심을 짐작할 수 있다.

나비는 춥고 황량했던 겨울을 지나 만물이 생동하는 계절에 찾아드는 봄의 전령이다. 옛사람들에게 겨울은 지금의 우리가 느끼는 것 보다 혹독했을 것이고 춥고 배고픈 계절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봄을 맞이하는 기쁨은 지금보다 컸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봄을 알려주는 나비 또한 기쁨의 상징이 되고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꿀을 따는 나비의 모습이 옛사람들에게 즐거움으로 비춰졌기 때문에 나비의 상징 의미가 기쁨, 즐거움이 된 것 같다. 또 어떤 젊은이가 나비를 잡으려고 따라가다가 어느 대갓집 뜰에 뛰어들게 되어 미인을 만났다는 이야기가 있어, 나비는 남녀 화합의 상징으로 여기게 된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그림의 고양이는 나비의 이러한 상징과 자기가 할 수 없는 나는 기능에 질투하여 이를 공격할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루이스 웨인의 또 하나의 나비와 고양이의 그림인 ‘나비 잡는 고양이’를 보면 이 그림 역시 강가의 자작나무가 있는 풀숲이 있는 길가에서 의인화된 어린 고양이가 곤충망 채를 들고 나비를 잡으려는 순간의 그림인데, 그 옆 자작나무가 있는 풀숲에는 “불법침입자는 개를 조심하라!”는 푯말이 있고 그 밑에는 한 마리의 개가 목을 빼고 들어오기만 해라 내가 너를 처리 할 것이라는 눈초리를 보이고 있다.

이것을 전술한 나비를 쫓다가 대갓집 뜰에 뛰어들게 되어 미인을 만났다는 행운의 전설과 비교하면 나비를 쫓다가 잘못하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루이스 웨인의 그림과는 나비와 고양이의 관계를 보는데 눈높이의 차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할 때 고양이는 육식동물이어서 쥐를 잡아먹는 것으로 유명하며 그 동작이 빠른데다가 판단이 정확하기로 유명한 동물이다. 또 고양이 모피에는 정기를 띠고 있어 그 감정이 곧 목덜미의 털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앞서 기술한 루이스 웨인의 그림 ‘나비를 보는 고양이’에서의 고양이는 마치 날아가는 나비를 덮치려는 듯한 눈초리에다 목덜미의 흰털을 일떠세우고 있는 모습이 나비를 습격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목덜미 털을 일떠세우는 장면이 고양이의 공격성을 의미한다는 것은 성숙한 고양이에서만 보는 것이 아이라 어린 고양이에서도 볼 수 있다. 즉 루이스 웨인의 또 다른 고양이 그림인 ‘쥐덫 보기’라는 그림을 보면 두 마리의 어린 고양이가 쥐덫을 보고 있는데, 한 마리는 흰색과 검은색의 줄 문이 고양이고, 다른 하나는 갈색과 검은 줄 문이 고양이 인데, 쥐덫에는 쥐가 잡힌 것도 아닌데 전에 잡혔던 쥐의 냄새가 배여서 그런지 흰색 줄 문이 고양이는 눈을 사납게 아래를 주시하며 마치 덫에 잡혔던 쥐가 나오면 물어뜯겠다는 표정이며, 갈색 줄 문이 고양이는 잡힌 것이 없는데 놀랐다는 표정이며 어린 고양이지만 두 마리 모두의 목덜미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이렇듯 고양이들은 공격적 의지가 발동되면 자연이 목덜미 털이 일떠서는 것이 본능적인 표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고양이들은 나비를 보면 자기가 할 수 없는 나는 기능에 질투하는 한편 자기의 먹을거리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 같다.

미국의 화가 오듀본 (John woodhouse audubon, 1812~ 1862)의 작품 ‘나비를 뒤쫓는 고양이’(1861)를 보면 역시 고양이는 나비를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흰나비가 나무에 붙어있는데 그리 높은 데가 아니라 앞발로 치면 떨어질 수 있는 높이이기에 고양이는 우측앞발을 들어 이에 가능성을 제고 있다.
이렇게 고양이는 나비를 보면 질투심이 발동하고 먹을거리로 생각해서 이를 잡으려한다는 것을 표현한 서양화가들의 표현에 비해 이 작품들과 비슷한 시기에 우리나라 화가들은 고양이와 나비의 관계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를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과제로 생각된다.

우리나라에도 조선시대 민화 중에는 고양이와 나비를 그린 ‘묘접도(猫蝶圖)’라는 그림이 있다. 즉 우리 옛 그림 중에 앙증맞은 고양이와 나비를 그린 그림이 여럿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김홍도(1745~1806?) 화백의 ‘나비를 희롱하는 고양이’라는 그림이 유명하다.
황갈색 고양이가 검은색 호랑나비를 고개 돌려 쳐다 보는 그림인데, 이 그림에 그려진 꽃은 패랭이꽃이고 바위 옆에 피어있으며, 땅바닥에는 제비꽃이 딱 한 송이 피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봄에 피는 제비꽃과 여름에 피는 패랭이꽃이 함께 그려져 있다. 그것은 나비는 봄여름 할 것 없이 이 꽃 저 꽃 가리지 않고 날아 다니는 것으로 고양이는 이것을 보고 질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 늦가을이나 겨울에도 날아 보아라는 듯이 희롱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 그림은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는 해설도 있다. 즉 고양이는 한자로 ‘묘(猫)’라 쓴다. 중국 발음은 ‘마오[mao]’다. 그런데 70세 먹은 노인을 나타내는 모(?)자의 발음도 이와 같다. 그래서 옛 그림 속 고양이는 70세 노인을 나타낸다고 하며, 또 나비는 한자로 ‘접(蝶)’자를 쓰고, ‘디에[die]’로 읽는다. 그런데 80세 노인을 뜻하는 질(?)자의 중국 음이 또한 ‘디에’이어서 그림 속의 나비는 80세 노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고양이와 나비는 각각 70세와 80세 노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한편 패랭이꽃은 한자로는 ‘석죽화(石竹花)’로 부른다. 그 옆의 바위도 한자로는 ‘석(石)’이다. 바위는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 오래 살라는 장수를 상징한다. 또 대나무 ‘죽(竹)’자는 중국 음으로 ‘주[zhu]’로 읽는데, 축하한다는 뜻을 지닌 ‘축(祝)’자와 소리가 같다. 그래서 패랭이꽃과 바위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라는 ‘축수(祝壽)’의 뜻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림의 맨 아래의 제비꽃은 꽃대를 가만히 살펴보면 낚싯바늘처럼 휘어져 있다. 중국 사람들이 효자손처럼 가려운 곳을 긁을 때 쓰는 ‘여의(如意)’라고 부르는 물건과 생김새가 꼭 같다 해서 이 꽃을 한자로 ‘여의초(如意草)’라고 불렀다는 것이며, 여의란 용어는 글자 그대로 ‘뜻과 같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제비꽃은 모든 일이 뜻대로 다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한 문장으로 만들면 “할아버지, 할머니! 70세, 80세까지 마음먹은 일 다 이루시고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는 웃어른들의 건강과 장수를 축복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해석이 있다.

우리나라의 고유한 언어인 ‘멋’이라고 하는 말에는 인위적으로 너무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가장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뜻이 들어 있다. 한국의 멋은 자연스러움과 조화에 초점을 맞춘다고 볼 때, 그것은 비단 예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모든 면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나비와 고양이의 한 폭의 그림을 통해서도 서양과 동양의 생활문화가 인생관에 영향을 미쳐 예술적 감각미를 낳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