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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을 읽고

  • 입력 2016.08.18 16:17
  • 기자명 최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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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덕수궁 현대미술관을 찾은 것은 이중섭 화가 탄생 백년의 신화를 전시한다기에 주말에 찾았다.

덕수궁 앞은 항상 외국관광객으로 붐비는 곳. 아침, 저녁 의장대의 교대식이 거창하게 진행되고 관광객들이 신기한 듯 조선 말기시절의 복장을 입고 취타소리에 맞춰 교대식을 하는 모습을 보고 탄성과 함께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다. 자주 보는 우리에게도 신선한 맛을 준다.

나도 옛날 외국여행 시 영국이나 유럽 쪽에서 그 나라의 이런 풍의 교대식을 보고 한나라의 볼거리로 만족해 보았던 추억이 있다.
외국 관광객들이 모여들어 신기한 풍경에 그들의 심경을 이해하고 나는 그들의 옆쪽으로 피해주며 덕수궁 안 현대 미술관을 향하여 갔다. 이중섭(1916~1950)은 평안남도 평원에서 태어나 외가가 있는 평양의 종로 보통학교를 나와 오산 고등 보통학교에 재직 중인 예일 대학교 출신인 미술교사 임용린의 지도하에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시작했다고 한다.

1936년 일본 도쿄의 제국미술학교를 거쳐 1936~1941년 문화학원에서 유학했는데 당시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교였다고 한다. 이중섭 그림에 대한 일본 중요 평론가들도 호평을 받고 회원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당시에도 일제 강점기에다 한국 전쟁의 동족살생의 처참한 시기, 누구나 다 여기저기 전전해가며 목숨을 이여가고 이중섭도 통영, 서울, 대구, 부산, 제주도를 전전하다 1956년 41살로 생을 마감 했으니 얼룩진 우리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천재화가 이중섭은 예술가로서의 삶을 고집했고 민족의 상징인 소를 서슴없이 그렸고 자신의 감정표현인 힘찬 황소그림을 쏟아냈다.

그리하여 그를 한국의 전통미를 표현한 민족화가로서 추앙을 받았다. 이중섭은 은지화가였다. 이중섭이 새로 창안한 새로운 기법의 작품이다. 양담배를 싸는 종이에 입혀진 은박을 새기거나 긁고 그 위에 물감을 바른 후 닦아내면 긁힌 부분에만 물감 자욱이 남아 그렇게 해서 패인 선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드로잉이 완성되는데 평면에서도 분위기가 생길뿐 아니라 반짝이는 표면과도 매우 특징적 이여서 매력적인 작품이 된다.



이러한 기법은 고려청자의 기법이나 철제입사기법을 연상시킨다. 이중섭은 상당히 오랫 동안 약 300점의 은지화를 제작했다고 하나 이 은지화들이 벽화로 그리는 밑그림이라고도 했다.

하나 거대한 벽화를 통해서 향유되는 꿈을 새기기도 했다고도 한다. 그 후 통영생활은 월남한 공예가 유강열의 주선으로 통영 나전칠기 견습소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아름다운 통영의 풍경을 유작으로 한 ‘소’ 연작들이 이때 제작 되었다 한다.

그리고 최초로 개인전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쌓아갔다고 한다. 이중섭은 이때가 비교적 경제적인 생활에 안정적인 시기였으며, 그 후 사랑하는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떨어져 살며 빚에 시달려 정신적 질환과 경제적 생활고로 거식증을 동반한 질환으로 말년을 보내고 한 많은 세월을 뒤로하고 41세의 짧은 생을 마감 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우리 화단의 뒷면을 보면 좀 잘나간다는 화가들도 거의 같은 그림들을 수도 없이 그려 파는가하면 번연히 살아계시는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그려 팔다가 대소동이나 자기가 낳은 자식을 자기가 몰라보겠느냐는 절규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있으며 바로잡지 않으면 절필을 한다는 말에도 끄떡없는 세상이고, 조x남이란 가수가 수십억 저택에 살면서 사이비화가 흉내를 내어 조수라는 화공을 시켜 수십 장의 비슷한 화투그림을 그려오게 하여 자기 사인만 해서 억대의 그림을 팔아 치부했다는 코미디 같은 소식을 듣고 부끄럽다.


프랑스화가 밀레의 ‘만종’이라는 유명한 그림이 있다. 해질 녘 농부가 수확을 마치고 감사의 기도를 그린 그림이다. 그도 처음부터 유명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의 그림을 눈여겨봤던 평론가들 중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사상가 ‘장 자크 루소’였다. 

밀레는 작품이 팔리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어느 날 루소가 친구인 밀레에게 찾아와서 “여보게 친구, 드디어 자네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며, “그림을 골라 달라고 나에게 선금 300프랑을 맡겨 놓고 갔다네”라고 전했다.

끼니를 걱정하던 밀레에게는 큰돈이며 자신의 그림이 인정받았다는 큰 기쁨과 용기를 얻은 그 심정이야 오죽 하였으랴 그 후 용기를 얻은 밀레는 생활에 안정을 찾아 그림에 열중하여 화단의 호평을 받아 유명해졌다. 경제적 여유를 찾게 된 밀레는 친구인 루소를 찾아 갔다.

그런데 몇 년 전 루소가 남의 부탁을 받고 사 간 많은 그림들이 그의 거실에 걸려 있지 않은가? 밀레는 남의 이름을 빌려 그림을 사준 우정을 그제야 깨닫고 친구의 고마움에 눈물을 흘렸다는 인생의 아름다운 우정도 있다는 것을 삼가 이중섭의 백년 신화 전에 바친다는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