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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소인력 앞 전봇대 옆에

  • 입력 2016.09.20 17:09
  • 기자명 신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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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직장인들도 그렇겠지만 개원 의사들은 점심시간이 고역이다. 규모가 있는 병의원의 경우에는 구내식당에서 메뉴를 정하여 차려주는 대로 먹으면 그만이지만, 동네 개원 의사들은 오늘은 또 무얼 먹나? 하는 고민을 하며 근처의 이 식당 저 식당을 옮겨 다니며 점심을 해결한다. 한편으로는 점심시간이 하루 중 유일하게 햇빛을 보며 바깥에 나가는 시간이므로 식사 후에 운동 삼아 동네를 천천히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 것이 작은 즐거움이 되기도 한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동네를 돌고 있는데 길거리 전봇대 옆에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눈에 띄었다. 초등학생이 입으면 어울릴 것 같은 반바지에, 붉은색과 푸른색의 가로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보는 순간, 저 옷은 어른의 옷도 아니고, 청년의 옷도 아니고, 어린 손자의 옷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아들이 입다가 작아져서 못 입게 된 헌 옷을 입는 경우가 있지만, 저 옷은 그런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세에 어울리지 않았다. 올려다보니 황소인력이라는 구인업체가 세 들어 있는 건물 앞이었다.

웅~ 하는 소리로 울고 있는 전봇대 옆에서 노인은 전봇대보다도 더 조용히, 표정 없이, 움직임 없이, 하염없이 서 있었다. 세월을 기다리다 세월을 놓치고 세월 따라 흘러가지도 못하고 머물러있는 모습이었다. 그 연세에 일을 구하러 나온 것은 아닐 것이고 이제는 일을 구할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가정에서 가장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혹시 가족들로부터 소극적인 학대를 받고 있는 지도 모를 모습이었다.

한 때는 근육의 갑옷을 입고, 가족들의 명운을 어깨에 짊어지고,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황소같이 센 힘을 자랑하였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은 하지정맥류가 드러나 보이는 가늘어진 종아리로 간신히 제 한 몸 지탱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멀리 오다가 돌아보니 황소인력 간판의 흰 바탕이 햇빛에 반사되며, 마치 흰자위를 드러내는 황소의 눈같이 희번덕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노인은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전봇대 옆 황소인력 간판 아래 서 있었다. 같은 건물에 세 들어있는 명가 한의원과 참우리 교회 간판도 보였다. 교회도 한의원도 인력보급소도 모두 세월이 외면하고 지나간 노인에게는 길거리의 간판에 불과해 보였다.

며칠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그 노인의 모습은 세월과 싸우다가 기진한 황소의 모습이었고, 머지않은 장래의 우리 모두의 가엾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