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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 가을편지

  • 입력 2016.10.24 15:37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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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선선한 바람이 마음을 상쾌하게 하면서도 상념과 낭만에 젖게 만든다. 이맘때면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대중가요 ‘가을 편지’다. 고은 작시(作詩), 김민기 작곡, 최양숙 노래로 계절분위기에 딱 맞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로 나가는 ‘가을 편지’는 가슴을 찡하게 만드는 시적 표현의 노랫말과 멜로디가 좋다. 고은 시인 작품들 중 노래로 만들어진 게 많지만 이 곡만큼 가을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게 없는 것 같다. 선율을 모르는 채 그냥 읽어도 그리움의 리듬이 가슴을 파고든다.

패티김, 이동원 등 다른 가수들도 리메이크
여가수 최양숙이 1971년 발표해 히트한 ‘가을 편지’는 작품성을 인정받아 패티김, 이동원 등 다른 가수들도 리메이크해 취입했다. 지금도 해마다 가을이면 TV 가요프로그램은 물론 라디오방송, 카페 등지에서 들을 수 있다. 최양숙은 몇 년 전 언론인터뷰를 통해 ‘가을 편지’ 취입에피소드를 들려줬다. 김민기 씨의 기타연주가 잔잔하면서도 너무 아름다워 그 분위기에 취해 한 번 만에 노래녹음을 마쳤다. 음반은 판매 금지됐지만 젊은이들 사이에선 오랫동안 즐겨 불렸다. 세월이 흐르면서 잊히나 싶었으나 1980년대 중반 이동원 씨가 리메이크해 원조 ‘가을 편지’까지 인기였다. 최양숙의 창법이 클래식성악에 바탕을 둬 ‘가을 편지’가 가곡으로 아는 이들이 적잖다. 어떤 때는 ‘가을에 듣기 좋은 가곡’에 꼽히기까지 했다. 최양숙은 2012년 11월 9일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소장 최백호) 주최로 생애 첫 단독콘서트 겸 후배들이 마련한 헌정공연(‘최양숙을 아시나요’)을 통해 ‘가을 편지’를 다시 불러 화제였다. “대중가요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최양숙(崔良淑, 79세)은 서울대에서 성악을 전공, 프랑스로 가 샹송공부를 하고 온 우리나라 최초 샹송전문가수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외모, 성악에 바탕을 둔 클래식창법이 눈길을 끈다. 떨리는 듯 가녀린 음색의 창법이 이채롭다.

북한 태생…우리나라 최초 샹송전문가수
1937년 함경남도 원산서 태어난 최양숙은 경음악평론가이자 DJ였던 최경식 씨 동생이다. 원산 명석보통학교를 다니다 6·25전쟁 1·4 후퇴 때 피난 와 부산에서 임시로 문을 연 무학여중에 입학, 환도 후 지금의 서울예고에 들어갔다. 노래실력이 뛰어나 서울대 음대 주최 전국콩쿠르 때 ‘시인’을 불러 대상을 받은 뒤 1960년 서울대 성악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 중앙방송국(현 KBS) 전속합창단 활동 중 음반을 냈다. 라디오드라마 ‘어느 하늘아래서’ 주제가 ‘눈이 내리는데’를 첫 녹음한 뒤 영랑의 시에 손석우(작곡자 겸 중앙방송국 가요담당지휘자)가 곡을 붙인 ‘내 옛날 온 꿈이’를 음반으로 선보였다.
최양숙은 대학졸업 후 방송국합창단 활동을 접고 서울예고 음악교사가 됐으나 예그린합창단에 들어가기 위해 1년이 안 돼 그만뒀다. 합창단 해체와 함께 최양숙이란 본명으로 가요계생활을 한 그는 라디오프로그램 등에서 샹송을 부르다 고(故) 박춘석 작곡가에게 발탁, 1963년 가요계에 공식 데뷔했다. 그해 자신의 이름으로 낸 첫 발표곡이 ‘황혼의 엘레지’(박춘석 작사·작곡). 이어 ‘모래 위의 발자국’, ‘초연’, ‘호반에서 만난 사람’, ‘꽃 피우는 아이’, ‘세노야’ 등을 불러 인기가수대열에 이름을 올렸다. 애절한 탱고리듬의 ‘황혼의 엘레지’가 1966년 크게 히트하며 초대 MBC 10대 가수로 뽑히기도 했다. 대중적으론 사랑받았지만 클래식계에선 곱지 않은 시선이었다.

그녀가 가수가 되기까지엔 재미난 일화가 있다. 대학재학 중 합창단원이었던 그가 솔리스트로서의 자질을 인정받기 시작한 건 지휘자 이남수의 인솔로 해병대 의장대원들과 한국예술사절단 일원으로 외국공연을 떠나던 해군함정(LST, 상륙전용 군함) 안에서였다. 여흥시간 게임에 져 벌칙을 받아야했던 그녀가 부른 노래는 샹송 ‘고엽(Autumn leaves)’, 이어 앙코르로 부른 곡이 ‘자니 기타(Johnny Guitar)’였다. 반주 없이 부른 이 노래로 함께 갔던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방송국관계자들이 눈여겨봤음도 나중에야 알았다. 대학 3학년 때 합창단원인 그에게 솔로로 마이크 앞에 서는 기회가 왔다. 무대에 서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때 음악부장이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를 녹음 중인데 주제가를 불러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그는 처음엔 거절했으나 “연습 삼아 불러보자”는 말에 악보를 받아 마이크 앞에 선 게 가수의 길로 들어선 시작이 됐다. 연습 삼아 불렀던 노래는 ‘내 옛날 온 꿈이’(김영랑 작시, 손석우 작곡). 최양숙이 처음 음반으로 취입한 이 노래는 주미옥(朱美玉)이란 이름으로 발표됐다. 대학생 신분으로 본인이름을 밝힐 수 없어서였다. 팔순을 앞둔 그녀는 이젠 얼굴도 기억하는 이가 거의 없음에도 평범하고 조용히 살고 싶어 이름을 바꿨다. 1980~90년대 TV 성인가요프로그램과 카페무대에 서다 2000년대 들어 5년여 입원을 했을 정도로 건강이 나빠 은둔생활을 했다. 그러나 노래만큼은 영원히 떠날 수 없어 2014년 가을 남이섬 노래박물관에서 열린 ‘박성서의 토크콘서트-최양숙 가을음악회’ 무대에 섰다.

군산태생 고은, 승려생활·노벨상 후보 ‘눈길’
‘가을 편지’ 노랫말을 쓴 고은(본명 : 고은태 銀泰, 호 : 파옹 波翁) 시인 겸 소설가는 1933년 8월 1일 전북 옥구(군산) 태생으로 1958년 ‘현대시’에 ‘폐결핵’을 발표, 등단했다. 그 전엔 20세 때 입산, 승려(법명 : 일초 一超)가 됐다. 효봉선사(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의 상좌가 된 이래 10년간 참선과 방랑의 세월을 보내며 시작(詩作)활동을 한 그는 1960년 첫 시집(‘피안감성’)을 냈다. 이어 1962년 환속해 시인으로, 독재시대에 맞서는 재야운동가로서 험난한 길을 걷기도 했다.
 그는 세계의 수많은 문학상 등을 받고 해마다 노벨상후보로 거론될 만큼 나라안팎에서 유명하다. 미국 하버드대 하버드옌칭스쿨 연구교수, 버클리대 객원교수를 지냈다. 세계 10여개 언어로 50여권의 시집, 시선집이 간행됐다. ‘한국문학작가상’, ‘만해문학상’, ‘중앙문화대상’, ‘대산문학상’, ‘만해대상’ 등 국내 문학상 10여 개와 ‘스웨덴 시카다상’, ‘노르웨이 비외르손훈장’ 등 외국의 주요 문학상을 받았다. ‘고은 문학축제’가 열리고 있고 2015년 11월 24일 수원에서 고은재단이 발족됐다. 고은 생가 터 복원사업, 고은 문학관 건립이 이뤄지고 있다. 2015년 9월 고은학회 창립에 이어 ‘고은학’이 학문으로 열릴 전망이다. 2007년 영국 브리태니커백과사전에 이명박 대통령, 가수 비와 더불어 우리나라 문인으론 유일하게 이름이 오른 그는 술을 아주 좋아한다. 이처럼 에피소드가 많은 가요 ‘가을 편지’ 노랫말처럼 친필로 쓴 편지는 정이 흐르고 때론 사람을 감동시킨다. 슬픔, 고마움, 기쁨도 담겨있다. 그럼에도 요즘 사람들은 손 편지를 잘 주고받지 않는다. 정보통신(IT)이 발달하면서 이메일(전자우편),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등으로 대신해 아쉽다. 친필편지는 이메일, 문자메시지가 할 수 없는 기능을 한다. 쓸데없는 정보와 악성댓글이 넘쳐나는 이 시대 가슴 속의 온기와 마음이 담긴 손 편지가 그립다. 못쓴 글씨라도 아무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