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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시론]명의(名醫) 유감

  • 입력 2016.11.08 11:12
  • 기자명 M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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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어느 유명한 학술대회에 참석한다든가 어느 대학을 방문할 때면 가끔 느끼는 것이 있다. 학문의 어느 한 분야에 나름대로 많은 연구 업적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외국인 학자들을 만나서 몇 마디 이야기하면서 내가 너의 연구 결과에 관심이 있다는 시늉만 하여도 갑자기 얼굴에 화색을 띠고, 이방인인 내가 알아듣기 좋은 말로 다정함을 보인다. 그리고는 곧 이어서 자기가 그 분야에서는 세계적인 최고의 권위자임을 지나칠 정도로 자랑하는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아무리 서양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선비와 같은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서푼짜리 소인배 같다는 생각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이 코앞에 있다.
사실 알고 보면 본인이 자랑 삼아 떠들어대는 것만큼 그렇게까지 엄청난 업적을 낸 사람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자고로 겸양의 미덕을 바탕으로 살아온 민족이라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아마 이것은 외양적인 서양 사람들과 내성적인 동양 사람들과의 대조적인 삶의 형태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흔히들 말하길 요즘은 적당한 자기 PR의 시대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이 public relation(홍보)이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지만 우리말 해석이 훨씬 가슴에 와 닫는다. 즉 피할 것은 피하고 알릴 것은 알리라는 말이란다. 다재다능한 표현이 가능한 우리말의 진수를 보여주는 표현 같기도 하여 남모르게 배꼽이 춤을 춘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대학교수가 매스컴에서 자주 나타나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생각하였고 또 그런 교수들을 ‘매스컴 교수’ 또는 ‘현실에 영합하는 교수’라는 말로 비하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세월의 변화에 따라 최근에는 매스컴에 자주 등장하는 사람은 그 분야에 아주 능력 있고 대표적인 사람으로 평가받는 경향이고, 또 본받아야 할 적극적인 사람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다.

자기 홍보를 밑에 깔고 사회에 기여하는 모습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 볼 때 적절한 자기 PR에 해당될 수 있겠다.
언론 홍보가 무엇이고, 경영학이 무엇인지 문외한일 수밖에 없는 내가 볼 때 자기 알림이란 자기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지식을 알려 주고, 유형의 또는 무형의 적절한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폭주하는 정보와 점점 세분화, 전문화된 오늘의 사회에서는 일반 대중들은 정보와 지식의 ‘허’와 ‘실’을 구분하기 힘들기 때문에 여기에 중계자적 역할을 담당하는 매체나 사람들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들은 대중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정보를 제공하고 경제적 이익을 챙긴다. 이런 일련의 일들은 구태여 사회적 병리 현상이라고 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사회적으로 큰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이 다분히 존재한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아주 부러워하는 직업이 있다.
여기저기 텔레비전 대담프로그램에 나와서 걸쭉한 입담으로 세상을 농단하는 소위 사회 평론가, 정치 평론가, 대중문화 평론가라는 직업이다. 물론 이분들도 각자의 분야에서 열심히 공부를 해야 이야기 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그들의 예측이나 평론이 결과론적으로 다르게 귀착된다 하더라도 누구도 그들을 강하게 힐책하는 사람이 없다는 점에서 부럽다. 자기의 예측이나 평가가 잘못 되었을 때는 ‘나는 그 시점에서 그것을 그렇게 보았다’라고 하면 되기 때문이다.
아마 내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은 글 한 줄이나, 말 한마디라도 근거에 의하여 해야만 하는 빡빡하고 여유가 없는 특정적 삶을 살아온 탓이라 생각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훨씬 여유 있고 정이 넘치는 질퍽한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과 어울려 여러 가지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가는 가운데 참 웃지 못 할 일이 있었다.
오랫동안 개원을 하고 있는 한 친구에게 어떤 제의가 들어 왔었단다. 말인즉 200만원만 내면 자기네 출판사에서 발행 예정인 ‘명의’라는 책 속에 명의로서의 이름을 당당히 넣어주겠다는 제의였단다. 하도 기가 막혀서 이 사실이 ‘차라리 사기극이었으면’하는 말을 뇌까려 보았다. 한편으로는 왜 나한테는 그런 제안도 없었을까 하는 섭섭한 생각에 빠져 보기도 했다. 그 친구 왈 대학에 있는 학자한테 그런 제안하였다면 그들이 당장 탄로가 나기 때문이란다. 과연 그럴까?하는 생각도 떨칠 수가 없다. 사실 요즘 xx신문사, xx출판사, xx저널 등등에서 쏟아지는 소위 ‘명의 열전’이라는 신문 광고를 보면 방향을 잃고 떠도는 세상이 보인다. 사공을 잃고 표류하는 거룻배 같기도 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가 이리저리 나대는 꼴을 닮아가는 세상사다.
“아니 제 병을 이렇게 잘 고쳐주셨는데 어째 선생님은 왜 아직도 명의가 못 되셨나요?”
열심히 치료받으러 다니던 이 아주머니가 오늘은 어디서 무슨 말을 듣고 하시는 말씀인지 매우 진지하고 의아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던진다.
아직도 ‘명의’가 되기까지는 스스로 생각해도 요원한 길을 남겨 놓고 있는 내가 이 환자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평생을 열심히 노력하여도 명의 소리를 듣지 못할 가능성이 아주 높은데 말이다.

이제 의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지 30여 년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으로서 볼 때 우리 사회에는 분명히 ‘명의’가 있다. 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진정한 ‘명의’란 누가 ‘명의’라고 불러 주어야 되는 것일까?
‘명의’가 갖추어야 할 요소들은 무엇일까. 이것을 알고 있는 이 시대의 현자는 과연 있을까.
하루하루를 많은 환자들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는 의사로서 긴 숨을 내쉬어야 할 때가 너무 많다.
반드시 특정한 치료를 받아야 할 환자가 한동안 사라져버린 뒤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되어 나타난다.
포도요법, 솔잎요법, 마늘요법, 현미요법, 식초요법, 양파요법…헤아릴 수 없는 천하의 비방들이 버젓이 방송매체에 등장하고 첨단의 과학과 보편타당성을 가장하고 있는 상업 방송이 세상을 시끄럽게 하고 있다. 물에 빠진 채 사면초가의 외로움 속에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불쌍한 환자들에게 이들은 사악한 지푸라기가 되어 오히려 이들의 생명을 옥죄이고 있는 것이다. 무책임한 매스컴이 ‘황당한 건강 특집’을 통하여 환자들을 우왕좌왕하게 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이 마당에, 이것은 또 무슨 얼토당토않은 ‘명의’ 타령인가? “꺼져가는 생명을 놓고 진정한 ‘생명의 등불’이 아니면 켜지를 마시오.” “언제 그 많은 죄를 전부 면죄 받으려 하시오?” 이렇게 소리치고 싶다. 하나의 질병을 놓고 우리나라만큼 많은 치료법이 대두되는 나라는 분명히 전 세계적으로 아주 보기 드물다.

고통 받고 있는 환자들에게 ‘어떤 치료법이 좋다’고 권유하고는 무책임하게 사라져버리는 부도덕한 사람들이 많은 대표적인 나라가 우리나라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비윤리적인 결과를 낳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자기는 선의로서 조언을 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무심하게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를 즉사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우리나라만큼 특정 분야 전문가의 말이나 의견이 여지없이 묵살 당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왜 전문가는 양성하며, 학교에서 과학은 왜 가르치는지?
책임 있는 언론기관이 오로지 영리행위로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글이나 책을 써서 판매한다며 누가 이들의 작태를 막을 수 있겠는가?
아주 옛날이야기이지만 조선시대에 ‘비방지목’이라는 것이 있었다.
큰 길거리나 다리 입구에 표면이 널찍한 나무를 세워놓으면 오가는 사람들이 사회나 나라에 하고 싶은 말을 써놓는 곳이다. 이는 일종의 언로를 열어놓은 것과 같은, 즉 오늘날의 언론기관과 같은 역할을 하는 표시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방지목’에 나타난 의견들은 조작된 여론도 아니요 의도적인 외침도 아닌 사실 그대로의 여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비방지목’이 있으면 이렇게 써보고 싶다.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사람들 양심 좀 찾읍시다.’
이왕지사 ‘명의’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말인데 우리가 볼 때 정말 후학들에게 귀감이 되고 존경받으실 수 있는 분들이 계시기는 계시다. 그러나 대개 이런 분들은 특유의 학자적인 고집과 정도를 걷는 외곬적인 성격을 갖고 계셔서 아침저녁 춤추어대는 사회적 분위기에 영합하지를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낙후된 사고를 갖고 있는 추방되어야 할 권위주의자’로 또는 ‘참의료 실천에 저해요소가 되는 반진보적인 세력’으로 매도되기 일쑤이다.

본래 의업이란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지라 하나하나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짚어보고 또 짚어보고’ 하는 신중함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체적인 흐름이 매우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보주의적 흐름이 팽배하여가는 이 사회적 현실이 의료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과거의 기분으로 볼 때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요즘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 진취적인 사람으로 부상되는 현실은 과연 얼마 동안이나 지속될지 궁금하다.
‘명의’가 있든 없든 관계없는 건강한 사람들이야 혼돈에 빠질 이유도 없고 우왕좌왕할 필요도 없지만, 다분히 주관적이고, 아주 무책임하고, 과학적 근거도 없는 ‘명의’ 지침서 때문에 갈팡질팡해서는 안 될 환자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지 말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 가지 더 첨언한다면 공익방송매체나 신문이 정말 책임감이 있고 신중함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면 우리 사회는 한층 더 아름다울 텐데.
 

<이 몸은 내 몸이 아니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