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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힘

  • 입력 2016.12.22 17:26
  • 기자명 MD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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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름은 정말이지 덥기도 하고 환자도 없어 하루하루 시간을 보내는 것이 지겨웠다. 진즉에 생각이 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여름이 다 지나갈 무렵 길가에 핀 꽃들의 씨를 받아 작은 화분을 만들어 길러보았다. 화분에 옮겨심기 전에 우선 투명한 플라스틱 그릇 바닥에 물에 적신 화장지를 깔고 씨앗을 뿌려 싹을 틔웠다.

한련, 금송화, 채송화를 비롯한 몇몇은 싹을 틔우지 못했지만 민들레를 비롯한 몇몇은 새싹이 나왔다. 기왕 시작한 김에 스티로폼 박스에 흙을 채워 배추, 열무, 쑥갓 등 채소의 씨앗도 함께 뿌려보았더니 역시나 싹이 났다. 쑥갓과 열무의 순은 몇 차례 먹기도 하였고, 마지막까지 자라던 무는 인삼뿌리 정도 까지 굵어졌다. 베란다에서 텃밭을 가꾸는 도시 농부가 된 기분이었다.

호텔 뷔페식당에서 후식으로 먹었던 수박씨와 열대과일의 씨도 싹을 틔워보았더니 신기하게도 싹이 났다. 수박은 제법 덩굴을 뻗다가 꽃까지 피웠지만 정작 열매는 완두콩만큼 자라다가 시들어 버렸다. 열대과일은 아주 작은 선인장 모습으로 아직도 자라고 있다. 심지도 않은 참외도 노란 열매가 콩알 크기로 맺히다가 시들어버렸는데 아마도 종묘상에서 산 채소 씨앗에 섞여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개화산에서 파온 소나무 새싹도 자라다가 잎이 모두 갈색으로 변하며 시들어버렸지만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몰라 물을 계속 주고 있다. 작은 단풍나무는 잎이 모두 말랐다가 다시 새잎이 돋았다가 그것마저 시들어버려 생사가 애매한 상태이다. 생사의 결정은 내년 봄에 할 예정이다.

처음에는 씨앗에서 싹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고 점점 자라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느꼈는데, 욕심도 함께 덩굴을 뻗기 시작했다. ‘꽃을 보았으면 좋겠다. 열매가 달렸으면 좋겠다. 혹시 열매를 먹을 수는 없을까.’ 식물들도 감정이 있는지 나의 욕심을 알아차리고 기분이 상했는지 차츰 시들기 시작했다. 특히나 연휴나 주말을 지나고 나면 현저히 상태가 나빠지는 것을 느꼈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물의 힘, 흙의 힘, 햇빛의 힘, 농부의 정성 모두가 필요하겠지만 그것을 능가하는 것이 계절의 힘이 아닐까. 제철에 자연스럽게 자라지 못하고, 볕이 오후에만 드는 원장실 뒤 베란다에서 작은 스티로폼 박스 혹은 작은 화분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어떻게 자신의 잠재된 모든 것을 드러내 보일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계절이 늦어 내년 봄을 위해 씨앗들이 깊이 잠들어 있어야 할 시기인데, 철없이 재미삼아 씨앗들을 깨운 내 잘못이 크다.
시들은 줄기를 정리하면서 사과의 감정에 젖게 되었지만 내년 봄에는 올해 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새싹처럼 솟는 것을 보면 아직도 내 욕심은 살아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