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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에게 배운 마음치료 이야기

  • 입력 2017.04.12 17:01
  • 수정 2017.06.15 10:58
  • 기자명 전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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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 불교가 넓은 의미에서 정신 치료이고 붓다는 위대한 정신치료자라고 생각해왔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데에는 여러 가지 계기가 있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한 여인이 외아들을 잃고 거의 실성하다시피 하여 머리는 산발하고 옷은 아무렇게나 입고 울부짖음 같은 목소리로 길거리에서 지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자기 아들을 살려내 달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어찌하여 붓다를 만나게 되었다. 붓다를 만나서도 막무가내로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내 달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여인을 붓다는 처음에는 묵묵히 바라보기만 하였다. 여기서 잠시 오늘날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의 상황이라면 가족이나 친지, 아니면 공공기관이라도 그 여인이 그렇게 길거리에 헤매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병원으로 데려갔을 것이고 그래서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됐을 것이다. 그때 그렇게 감정적으로 극도의 격앙과 혼란의 상태에 빠져있는 그 여인을 대부분의 정신과 의사는 진정제로 재우거나 그렇지 않고 좀 더 여유가 있거나 정신 치료에 관심이 있는 정신과 의사라면 그 여인의 마음이라도 좀 가벼워지도록 대화를 통해 감정을 뱉어낼 수 있게 시도해 봤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했을 때에도 그 여인의 이야기는 들어줄 수 있지만 그 여인이 자기 아들을 살려내 달라고 울어댈 때, 죽은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집착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 한 아픔에 몸을 떨 때, 우리는 대꾸할 말을 잊고 무력감 속에서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제는 진정제가 필요할 때다 하며 약으로 그 여인을 재울 것이다. 한숨 푹 자고 나면 뭔가 변화가 있겠지 하고 기대한다. 그 이상의 뾰족한 처방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 부딪칠 때 정도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붓다는 어떻게 하였는지 2천 5백여 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붓다는 한참을 침묵으로 있다가 먼저 그 여인이 가장 갈구하는 것을 이루어주겠다는 뜻으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당신의 죽은 아들을 살려주겠소. 단,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면….” 그러자 여인의 눈에 희망과 생기가 돌고 날 듯이 기뻐하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빨리 말해달라고 했다.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람이 죽어 나간 적이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한 줌을 얻어 오시오. 그러면 당신의 아들을 살려주겠소.” 

그 여인은 아들을 잃은 슬픔에만 사로잡혀서 자기만 아들을 잃고 다른 사람들은 그런 일 없이 사는 줄 알고 금방이라도 겨자씨를 얻어 그렇게 보고 싶은 아들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쁨에 쏜살같이 그곳을 떠났다. 몇 시간이 지나 그 여인이 돌아왔다. 빈손이었지만 손은 축 늘어져 있지 않았다. 얼굴에는 몇 시간 전의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시고 차분함과 안정감 그리고 어떤 의미를 자각한 그런 표정이었다. 그 여인은 붓다에게 삼배를 하고는 말하였다.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저 혼자만이 이런 고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집집마다 누구나 다 이런 아픔을 갖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구나 빠르고 늦고의 차이는 있지만 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아들에 대한 그리움과 애통함으로 제 마음이 괴롭긴 하지만 이제는 견딜 수 있겠습니다. 어리석은 저에게 진리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부처님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불교 교단에 출가를 한다. 이 경전을 보면서 나는 붓다의 정신 치료자로서의 위대한 면모를 보았다. 고통 속에 놓인 사람에 대한 정확하고 깊은 이해, 문제의 핵심에 대한 확실한 통찰, 그리고 거기에 근거한 정신 치료적 해결 과정이 병원까지 갈 필요 없이 현장에서 그대로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고 치료 후 문제 해결 및 증상의 해소뿐만 아니라 인생의 본질에 대한 이해마저 하게 되어 그 여인의 인격이 그 전보다 더욱더 성숙하게 된 것은-그것도 단 한 번의 치료로-위대한 정신 치료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다. 

정신분석 치료에서 수년간 수백 시간을 통해서만이 이룰 수 있는 인격의 변화를, 붓다가 단 한 번 몇 시간 만에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불교가 정신 치료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고 붓다가 위대한 정신 치료자적 자질을 갖추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