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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처럼 살았군요'

  • 입력 2017.04.12 17:12
  • 수정 2017.06.15 10:59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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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향, 창밖에 떨어지는
낙엽 보고 작사·작곡·취입
1980년 대학가 ‘최규하 대통령 주제곡’…주부들에게도 큰 반향
‘한국 CM송 대부’, 도사, 기인 등 여러 애칭 속에 음악 삶 활발

어느 날 난 낙엽 지는 소리에 /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보았죠
그냥 덧없이 흘러버린 / 그런 세월을 느낀 거죠
저 떨어지는 낙엽처럼 / 그렇게 살아버린 내 인생은
우~ 바보 같은 내 인생 / 철없던 내 인생 내 인생

*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 늦어버린 것이 아닐까
흘러버린 세월을 /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을까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난 참 우~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우~우~
(* 반복)


세상이 어수선하다. 헌정사상 처음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파면)에 이은 대선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다. 정권을 잡겠다며 표를 노린 홍보전, 비방전, 여론싸움이 뜨겁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사례에서 보듯 인생사 ‘권불십년(權不十年)’이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리 높고 힘 있는 권세라도 10년을 가지 못하고 영원히 잘 나가는 일은 이 세상에 없다는 얘기다. 우리 인생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왜 그렇게 안달복달하며 움켜쥐기만 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후회를 할 땐 이미 늦었다는 게 역사가 말해준다. 요즘 같은 때 떠오르는 노래가 하나 있다. 가요 ‘바보처럼 살았군요’다.

‘인생무상(人生無常)’ 생각에 음악적 영감
이 노래는 김도향(72)이 작사·작곡하고 취입까지 한 빅히트곡으로 그의 간판곡이다.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태어난 건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7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이리역 폭발사건, 백건우·윤정희 납북 미수사건, 미국 뉴욕 25시간 대규모 정전 등 지구촌에 크고 작은 일들이 터졌던 해로 많은 사람들이 우울했다. 

김도향은 서울 충무로 사무실에서 우연히 창밖을 내다보다 낙엽 하나가 그림처럼 뚝 떨어지는 걸 보게 됐다. ‘그 낙엽이 어디로 떨어졌을까’ 하는 궁금증에 거리로 뛰쳐나갔다. 순간 자신이 바닥에 나뒹구는 그 낙엽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여름내 푸름을 자랑하던 나뭇잎이 바짝 말라 휘날리다 뒹구는 초라한 모습에서 텅 빈 자신의 처지를 대입시켜본 것이다. 돈도 벌 만큼 벌었고, 인기도 얻을 만큼 얻었으나 왜 사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온 나날들이 떠올랐다. 마음 한 구석에 왠지 모를 아쉬움, 허전함, 답답함이 몰려들었다. 갑자기 그에게 음악적 영감이 솟아났다. 곧바로 사무실로 돌아와 악보를 만들고 가사를 썼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는 비슷한 시기에 3명의 가수가 취입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흥미로운 건 3명의 음반이 모두 잘 팔렸다는 점이다. 맨 먼저 대중가요 ‘너’를 취입해 이름이 났던 가수 이종용이, 두 번째는 밴드출신가수 김태화(정훈희 남편)가 불렀다. 김태화는 1978년 가수 이장희와 함께 김도향을 찾아가 “이 노래를 ‘MBC 국제가요제’(1980년 4월 26일) 때 불러야겠다”며 내놓으라고 해 취입한 것이다. 

김태화는 가요제에서 이 노래를 불렀지만 큰 상을 받지 못했다. 대신 1980년 캐나다에서 열린 ‘태평양가요제’ 본선 출품곡으로 뽑혔다. 그러자 이 노래를 처음 불렀던 이종용이 “왜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줬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난감해진 김도향은 “그럼 내가 부르면 되지 않겠느냐”며 직접 취입해 크게 히트했다. 그는 언론인터뷰에서 그때를 회상했다. “아무 계산 없이, 정말 바보처럼 만든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더군요.”

샘 바닥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듯한 김도향의 감성적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듣다보면 ‘인생무상(人生無常)’이 느껴진다. 살기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어느 한 순간 ‘내가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며 자신의 뒷모습을 돌아볼 때 떠오르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지난날들, 돌이켜보니 너무도 하찮은 일이었다. 그것이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인 대부분의 사람들 가슴에 와 닿는 노래라 인기를 끌었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김도향은 그런 흐름 속에 1981년 ‘바람처럼 낙엽처럼’이란 음반도 냈다.

‘바보처럼 살았군요’가 크게 히트하자 에피소드도 많았다. 그 시절 대학생들 사이에선 ‘최규하 대통령 주제곡’이라고 불렀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힘없이 물러났음을 노래에 빗댄 것이다. 

최 전 대통령(1919년 7월 16일 원주시 태생~2006년 10월 22일 별세)은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1979년 12월 10일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광주 ‘5·18민주항쟁’ 등 격랑을 헤쳐가지 못하고 1980년 8월 16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바보처럼 살았군요’는 주부들에게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남편, 자식, 시집식구 뒷바라지만 하다 한평생을 보낸 ‘우리시대의 아줌마’들이 이 노래를 부르다 자신의 모습을 발견, 서글픔을 견디지 못해 울어버린 일이 적잖았다.

김도향, 1970년 ‘투코리언스’로 데뷔
노래주인공 김도향에겐 우리나라의 진정한 소울가수, CM송 대부, 도사, 노래하는 기인 등 여러 애칭이 따라붙는다. 다양한 삶과 ‘바보철학’으로 살아온 그의 진한 인생이야기는 특이하다. 삶의 키워드는 ‘바보’. “내 인생의 좌우명이 됐지요. ‘바보처럼 살자’. 그런데 ‘바보’란 뜻이 뭔지 아세요? ‘바로 보다’란 뜻이에요. 세상을 올바르게 보자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힘들지만 그렇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지금도 초빙강사로 가면 ‘바보가 되라’고 가르쳐요.” 언론인터뷰 내용처럼 그는 ‘바보’를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다.

그는 1945년 5월 3일 서울 당산동에서 3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경기중, 경기고(1964년 졸업), 중앙대 연극영화과(서라벌예대, 1968년 졸업)를 나왔다. 1970년 9월 군악대시절 친구 손창철과 만든 남성그룹 ‘투코리언스(Two Koreans)’로 가요계에 데뷔, ‘벽오동 심은 뜻은’, ’바보처럼 살았군요’, ‘언덕에 올라’ 등 히트곡들을 냈다. 

1980년 입산수도 후 흰 수염을 기르고 도사모습으로 나타나 명상음악가, 힐링뮤직(치유음악)전문가로서도 이름나 있다. 서울오디오 사장이기도 한 그는 가수 조영남·윤형주, 기자출신 방송인 이상벽 등과 친분이 두텁다. 젊은 시절엔 영화감독을 꿈꿨으나 집안이 어려워 노래를 불러 돈을 모았다. 항문조이기, 빠르게 걷기, 명상, 기공훈련, 노래 부르기가 건강비결이다. 

그의 가요계 데뷔는 첫 음반을 내기 전인 1970년 9월 1일 동양방송(TBC-TV)의 게임쇼 ‘명랑백화점’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노래짝꿍 손창철과 함께 불렀던 데뷔곡 ‘벽오동 심은 뜻은’이 히트하면서 출연섭외가 몰려들었고, 1972년엔 상복이 터졌다. 

그들은 다른 가수들의 부러움을 받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1974년 각자 길을 걷기로 하고 헤어진 것이다. 젊은이들 노래와 토론의 장이었던 출연무대 서울 명동 ‘청개구리’가 군사정권 눈 밖에 나 문을 닫은 데다 1974년 12월 ‘대마초 파동’에 휩싸이면서다. 

김도향은 방송출연, 음반판매를 못하게 되자 간간히 해왔던 광고 CM송 만들기에 본격 나섰다. 1975년 4월 1일 광고음악의 산실이 된 서울오디오를 차렸고 손창철은 미국으로 이민 갔다. 김도향의 CM송 데뷔작은 ‘아빠 오실 때 줄줄이~ 엄마 오실 때 줄줄이~’로 나가는 ‘줄줄이 사탕’(오리온). 이후 삼립호빵, 오란씨, 아카시아껌, 월드콘, 맛동산, 뽀삐화장지, 동원양반김, LG 등 만든 CM송이 3천여 곡에 이른다. 그래서 그는 ‘한국 광고음악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린다.

김도향은 세월이 흘러도 청년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현재진행형 가수’다. 2015년 3월 새 노래 ‘마리아 마리아’를 발표하는 등 음악 삶을 열심히 펼치고 있다. “저는 남은 인생설계를 하지 않아요. 늘 현재만 있죠. 바보는 내일을 설계하지 않는 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