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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되어봐야 부모님의 애틋한 맘 안다는 '부모'

  • 입력 2017.05.19 15:28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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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 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이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을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대중가요 ‘부모’는 멜로디가 부드럽고 노랫말에 포근한 느낌이 든다. 김소월(金素月, 본명 김정식, 1902~1934년)의 시에 서영은이 곡을 붙여 만든 노래다.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따뜻함이 묻어난다. 서영은은 코미디언 ‘비실이’ 서영춘의 친형으로 김소월 시에 멜로디를 붙여 가요로 만드는 작곡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89년 3월 21일 일본 동경의대 부속병원에서 62세로 별세했다.

1967년 첫 선을 보인 ‘부모’는 1967년 가수 유주용이 맨 먼저 취입했다. 가수 윤복희의 첫 남편이기도 했던 유 씨는 독일계 혼혈가수로 그 노래로 인기를 얻어 대표곡이 됐다. ‘부모’의 오리지널곡이 실린 컴필레이션음반(Compilation album)엔 7명의 가수가 취입한 12곡이 담겼다. 컴필레이션음반은 한 음악가 또는 여러 음악가들 노래를 특정분류에 따라 모은 음반으로 ‘편집음반’이라고도 불린다.

흥미로운 건 이 음반에 실린 김소월의 시 노래만 4곡이 된다는 점이다. 유주용은 ‘부모’ 외에도 ‘님과 벗’을 한 곡 더 노래했고, 당대의 인기여가수 최정자 또한 ‘진달래꽃’, ‘님에게’를 불렀다. 노래가 히트하면서 이미자, 나훈아, 박일남, 홍민, 김세환, 은방울자매, 문주란, 박인희, 이연실, 조미미, 이수미, 남궁옥분 등도 리메이크해 불렀다. 그 가운데 1987년 양희은이 부른 버전의 ‘부모’가 대표 격으로 가장 널리 알려졌다.

‘효심’에 초점 맞춰진 명곡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이면 들을 수 있는 이 노래는 가요로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고 할 만큼 명곡이 됐다. 노랫말 내용은 ‘효심’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는 함축적인 말에 방점이 찍힌다. 부모님을 알기위해 내가 부모가 돼 그 마음을 헤아려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를 짐작만으론 알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이란 존재의 뿌리가 되는 부모가 돼서 알아보려한다는 다짐이 효심을 뒷받침해준다. 노래 ‘부모’는 스스로 부모가 돼봐야 부모님의 애틋한 마음을 알게 된다는 애절한 가요다. 부모는 자녀에게 삶과 인생을 가르쳐주는 스승이라고 노래했다. 가사 끄트머리의 ‘알아보리라’는 김소월 시의 원문 ‘알아보랴’가 바뀐 것이다. 운율상 고쳐진 것으로 뜻엔 차이가 없다.

1920년대 창작된 시 ‘부모’는 김소월의 대표작에 끼지 못했지만 ‘진달래꽃’, ‘산유화’에 못잖은 작품에 들어간다. 더욱이 쉬운 우리말로 쓴 구절들이 가슴에 와 닿는다.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청각적 전통에 충실했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김소월 시가 가사로 쓰인 노래들이 적잖다. 대중가요, 동요, 가곡 등 장르를 넘나든다. ‘못 잊어’(장은숙 노래), ‘개여울’(정미조), ‘님의 노래’ 및 ‘옛사랑’(사월과 오월), ‘산유화(山有花)’(송민도), ‘먼 후일’(서유석, 최진희), ‘그리워’(양현경), ‘예전에 미처 몰랐어요’(라스트포인트), ‘초혼(招魂)’(이은하), ‘나는 세상 모르고 살았노라’(노래그룹 활주로), ‘실버들’(희자매), ‘진달래꽃’(최정자, 신효범, 마야) 등이 그것이다. 동요 ‘엄마야 누나야’(부루벨즈)도 김소월의 시에서 나왔다.

1968년 김소월 시가 대중가요 화두로 떠오르면서 2장짜리 프로젝트음반을 시작으로 김소월의 시 노래와 낭송음반(김수희 낭송 ‘접동새’ 등)이 1970년대까지 잇따라 나왔다. 시인들 작품이 노랫말로 쓰이는 것과 달리 시를 직접 쓰는 가수들도 제법 있다. 처음 시집을 낸 국내가수는 혼성듀엣 뚜아에무아의 리더 이필원이다. 그는 1976년 ‘바람꽃’을 발표했다. 중학생 때의 습작부터 인기가수로 활동할 때까지 쓴 65편의 시와 노랫말을 모은 시집이다. 박인희, 조동진,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 김현식, 백창우, 김현성, 이선희, 강인원, 조성모, 임지훈, 정태춘, 길은정, 이상은, 정태춘 등 많은 가수들도 시집을 내며 ‘시인가수’ 대열에 들었다.

국민시인 김소월, 32살에 삶 마감

김소월은 1902년 8월 6일 평안북도 구성에서 아버지 김성도와 어머니 장경숙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립인 남산학교를 거쳐 오산학교 중학부에 다니던 중 학교가 3·1운동 직후 문을 닫자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 졸업했다. 1916년 홍단실과 결혼한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상과대 전문부에 입학했으나 9월 관동대지진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오산학교 시절엔 조만식을 교장으로, 서춘·이돈화·김억(金億, 김안서)을 스승으로 모시고 배웠다.

1920년대 민요조 서정시를 써 등단한 김소월은 이별과 그리움에서 비롯되는 슬픔, 눈물, 정한 등을 주제로 해 일상적이면서 독특하고 울림이 있는 시를 썼다. 오산중학 시절 스승이었던 김억 추천으로 ‘창조’ 5호에 ‘낭인(浪人)의 봄’ 등 5편의 작품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1922년부터 김억의 주선으로 잡지 ‘개벽(開闢)’을 통해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진달래꽃’, ‘못 잊어’ 등을 발표했다. 1923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를 발표하고 1924년 김동인 등과 함께 문학동인 ‘영대(靈臺)’ 멤버로 활동했다.

1925년엔 시집 ‘진달래꽃’을 냈다. 민요조의 고운 가락, 그리움의 애달픈 정서가 잘 나타나있다. 당시 시단의 수준을 높인 작품집으로서 한국시단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시의 율격은 삼음보격을 지닌 7·5조의 정형시로 자수율보다 호흡률을 통해 자유롭게 성공시켰다. 민요적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독창적 율격으로 평가된다. 임을 그리워하는 여성화자(話者) 목소리를 통해 향토적 소재와 설화적 내용을 민요적 기법으로 나타내 민족적 정감을 눈뜨게 했다. 평생 허무의식 속에 살았던 그는 5~6년간 시를 열심히 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고향 곽산으로 돌아가 할아버지의 광산업을 돕다 실패하자 땅을 팔아 처가가 있는 구성군으로 옮겨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했지만 망했다. 가난과 실의에 빠진 그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장터에서 산 아편을 먹고 1934년 12월 24일 32살 나이로 삶을 마감했다.

그가 2세 때 아버지가 정주와 곽산 사이의 철도를 놓던 일본인 목도꾼들로부터 맞아 정신이상이 되자 광산업을 하던 할아버지 아래서 컸지만 비극을 맞은 것이다. 저서로 생전에 낸 시집 ‘진달래꽃’ 외에 사후에 김억이 엮은 ‘소월시초(素月詩抄)’(1939년), 하동호·백순재 공편의 ‘못 잊을 그 사람’(1966년)이 있다.

서울 남산에 ‘김소월 시비’

국민시인 김소월은 사후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68년 3월 한국일보사가 서울 남산에 김소월 시비를 세웠고, 1981년엔 대한민국 최고인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4남 2녀를 둔 김소월의 자손들 중 손녀, 증손녀가 남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증손녀는 성악가 김상은으로 몇 해 전 그의 증조외할아버지의 시로 된 노래들을 모아 음반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