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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과학의 만남 그 기묘한 표현의 명분

  • 입력 2017.06.19 17:51
  • 수정 2017.06.19 17:54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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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신비가 과학적으로 이해되는 역사적인 순간을 한 폭의 그림으로 현장감 있게 표현한 작품으로는 네덜란드의 화가 얀 베르메르(Johannes Jan Vermeer 1632~75)의 ‘천문학자’(1668)와 ‘지리학자’(1668~69)를 들 수 있다. 유명한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 등 주로 여성을 주제로 하였던 베르메르가 예외적으로 남성을 단독으로 그린 것은 이 두 작품뿐이다. 

이 작품들은 지금은 답답해 보이는 옛날 장면이 되었지만 사실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급변하는 세상의 진보적이고 전문적인 모습을 그림에 표현한 것이다. 실내에서 천구의(天球儀)를 바라보며 연구하는 장면을 그린 천문학자, 그리고 지구의(地球儀), 지도, 컴퍼스를 들고 창밖을 응시하는 장면을 그린 지리학자라는 두 작품은 종교와 과학, 관념과 이상, 현실과 변혁 등이 복합된 당시를 다양하게 암시한다. 17세기 전 까지 보수주의 과학자들은 천체의 운행이나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은 신의 뜻에 거슬리는 것으로 여겨 과학적 호기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며, 심지어는 고대의 학자들이 발견한 것들을 일부러 숨기기도 했다고 한다. 또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뮤즈 9자매는 각기 자기의 역할이 정해져 있었는데 그중 둘째인 우라니아(Urania)는 하늘에 대한 찬가를 맡아서 늘 천구의를 든 모습으로 그려지고 훗날 천문학자들도 우라니아를 숭배하였다. 당시로서는 예술과 과학은 같은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천문학도 예술에 속하는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베르메르의 ‘천문학자’는 과학사(史)의 대 변혁기에 제작됐다. 1637년에 덴마크에 코펜하겐 천문대가 건립 되었고, 1663년에 뉴턴은 그레고리 반사망원경의 성능을 크게 향상시켰고, 1667년에는 루이14세에 의해 파리 천문대가 건립되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1660년에는 현미경을 사용하기 시작하여 미생물을 관찰하게 되여 가장 큰 우주의 상태와 가장 작은 미생물의 존재가 알려진 것이다. 이 그림의 주제는 당시의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탄생된 것으로 급속도로 발전되고 있는 자연과학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동기가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우선 이 그림에는 한 실내에서 천구의를 바라보며 연구를 하고 있는 천문학자와 몇 개의 정물들이 묘사 되여 있다. 즉 책상 위에는 천구의가 놓여있고, 천구의와 천문학자 사이에는 메티우스가 저술한 ‘별들의 탐구와 관찰’이라는 점성술 책이 펼쳐져 있다. 주목하여야 할 것은 학자의 왼손은 책상 덮개로 깔아놓은 화려한 예술적 무늬가 있는 양탄자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천구의의 사수좌(射手座)와 물고기좌의 별자리에 올려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천문학과 점성술의 묘한 관계로부터 다시 예술과 신학과 과학의 묘한 관계를 표현한 것으로 짐작 된다.

‘천문학자’에 빛이 투영된 후면 배경의 좌측 옷장에는 리파의 엠블럼이라는 포스터가, 우측 벽에는 모세의 그림액자가 있는데 이에 대해서 베르메르는 리파의 엠블럼과 천구의 그리고 천문학자라는 인물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지혜’를 표현한 것이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리파의 엠블럼이란 사실상 유럽에서 점성술과 관련되어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출생차트(birth chart)가 은근히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 요즘도 구미 점성술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다트게임(dart game)판 같은 출생차트를 사용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측 벽의 모세의 그림은 강에 띄워 보내진 아기 모세가 이집트 공주에 의해 구해져서 생명을 건지는 장면이다. 출생차트와 모세의 그림을 연결하면 모세가 구해져 살아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 자만이 출생차트가 있는 것이고, 살았다는 것은 새로운 생명 또는 존재가 등장하는 것이다. 더구나 점성술에서는 사람의 운명을 별자리와 관련하여 해석하므로 당시 점성술과 천문학의 구분이 막연한 상황에서 천문학자, 모세, 출생 차트를 배열했다는 것은 발견과 탄생과 존재의 의미를 암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베르메르가 ‘천문학자’를 내놓은 지 1년 만에 다시 ‘지리학자’라는 작품을 그린 것은 아무래도 앞의 작품에 표현하지 못한 것이 있어 이를 보충하고 싶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인지 지리학자의 방도 천문학자의 방 그대로이며 그림의 주인공도 베르메르와 같은 해에 델프트(Delft)에서 태어난 안토니 반 레벤후크 (Anthony van Leeuwenhoek 1632~1732)라는 세균학자인데, 그는 세균학만 아니라 항해술, 천문학, 수학, 철학 등 다방면에 관심을 지닌 유명한 과학자이고 또 현미경을 사용하여 미생물을 세상에 알린 당사자이다. 

이 혁신적인 과학자와 친분이 있던 베르메르는 그를 천문학자와 지리학자의 모델로 한 듯하다. 또 그림의 구도도 비슷하다. 그림의 뒤편 벽에는 당시 발행된 벽걸이용 지도가 결려있으며, 방바닥에는 종이 뭉치가 흐트러져 있는 것으로 지리학자는 오랫동안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을 표현하였다. 또 지리학자는 자기가 중요시하는 지구의를 가구위에 소중하게 올려놓고 그의 왼손은 어떤 책 위를 짚고는 오른손에는 컴퍼스를 들고 있다. 양탄자가 깔린 책상에는 지도가 펼쳐져 있으며 학자는 컴퍼스를 들고 지도에 표시돼 있는 지점 간의 거리를 계산하다가 어떤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고개를 들어서 밖을 향하고 있지만 생각은 자기 내면을 향해 있는 듯 고요함 속에서 자신이 한 일을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학자의 이러한 고요한 회상의 몰두는 창문으로 들어온 밝은 햇살이 그의 영감을 부채질 하며 콧날을 중심으로 한쪽은 밝게, 한쪽은 어둡게 비치는 명암대비는 학자의 생각이 뒤바뀌는 가운데 학문적으로 중요한 것을 느꼈다는 것을 바닥에 떨어진 종이뭉치와 더불어 암시 하는 것 같다.

따라서 베르메르는 이 학자가 무엇을 느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이렇게 심각한 표정의 주인공으로 묘사하였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래서 두 학자의 몸짓을 연계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우선 화가는 천문학자의 경우 그의 왼손은 책상 덮개인 화려한 예술적인 무늬가 그려진 양탄자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은 천구의의 별자리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점성술이라는 종교예술적인 영역에서 천문학이 발전되었다는 관계가 잘 짐작되게 표현하였으며, 지리학자의 경우는 그의 왼손은 어떤 책 위를 짚고는 오른손에는 컴퍼스를 들고 작업을 하다가 무엇을 느꼈다는 몸짓으로 고개를 들어 사념에 잠긴 듯 창밖을 보는 몸짓은 왼손의 책을 지픈 것은 학문. 즉, 과학을 의미하며 오른손의 컴퍼스는 그 지식을 활용하고 교류하는 것. 즉, 통섭(統攝)을 의미하는 것으로 학문 간의 통합 또는 과학과 예술의 지식교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 된다.

이러한 생각은 고대 그리스의 사상에 뿌리 내려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여 그리스시대에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은 하나의 관점으로 여겼으며, 르네상스 이후에는 이런 개념이 점차 분화(分化)쪽으로 변하게 되였는데 화가는 고대그리스인처럼 과학과 예술의 통섭을 생각해서 표현한 것 같다.

다시 말해 예술과 과학의 두 분야는 기술이라는 연결점을 지녀 예술은 항상 혁신과 창조를 추구하여 기술을 발전시키며, 과학은 자연법칙에 관한 기술의 성과를 재료삼아 다시 새로운 기술을 창조하게 된다. 사실 과학의 새로운 증명과 발전에는 예술적 창조의 원리에 따라 이루어진 경향이 적지 않다. 즉 예술은 과학적 발견의 모델을 제공하고 과학은 예술에 수단과 새로운 재료를 제공하여 서로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관계로 발전돼 온 것이다.

학문 간 협력을 지니게 되면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은 최근에 들어서 강조되고 있는 통섭과학(統攝科學, consilience science)의 개념을 베르메르는 일직이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에 단시일 내에 두 과학자의 작품을 그려 그러한 자기의 생각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