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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에서 옛 사랑 추억 떠올린 가요 '바닷가에서'

  • 입력 2017.07.20 10:53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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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나 홀로 외로이 추억을 더듬네
그대 내 곁을 떠나 멀리 있다 하여도
내 마음 속 깊이 떠나지 않는 꿈 서러워라
아 ~ 새소리만 바람타고 처량하게
들려오는 백사장이 고요해
파도소리 들리는 쓸쓸한 바닷가에
흘러간 옛날의 추억에 잠겨 나 홀로 있네

박춘석 작사·작곡, 안다성 노래의 ‘바닷가에서’는 전통가요 중 불후의 명곡으로 꼽힌다. 세미클래식풍의 4분의 4박자, 슬로리듬으로 애잔한 느낌이 든다. 노래 시작 전 전주 도입부에선 해변에 파도가 잔잔히 밀려오는 배경음이 도드라진다. 1958년에 만들어진 이 노래는 파도소리가 들리는 쓸쓸한 해변에서 옛 사랑의 추억을 더듬는 모습을 서정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가요다. 노랫말처럼 사랑하는 연인을 멀리 보내고 바닷가에 홀로 서서 그 옛날의 로맨스를 떠올리는 장면이 그림처럼 다가온다.

이 노래는 음악인 박춘석이 1958년 8월말 독립운동가로 국회부회장을 지낸 사람의 회고담을 듣고 만들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여학생을 희롱하던 일본 남학생을 때려 혼을 낸 조선 남학생이 쫓기는 신세가 돼 어느 어촌의 영애란 아가씨 도움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뒷산 동굴에서 두 달간 숨어 지내면서 무사했던 그 청년은 사랑이 싹터 결혼까지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청년은 바닷가에서 물장난을 하며 놀고 있던 중 일본 경찰들이 들이 닥쳐 멀리 도망쳤다. 그는 중국으로 가 사업에 성공했지만 빨리 돌아오지 못했다. 도피자금은 바닷가에서 헤어질 때 영애 아가씨가 쥐어준 금가락지였다. 그 반지는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 물려준 것으로 사랑의 징표였다. 영애 아가씨는 일본 경찰들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녀는 자신의 금가락지를 준 청년이 끝내 돌아오지 않자 동네 총각(유씨)과 결혼해 살다 세상을 떠났다. 세월은 흘러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다. 청년은 그 옛날 바닷가를 찾아 영애 아가씨 아들과 함께 뒷산에 묻힌 그녀의 산소를 찾으며 그 옛날을 떠올린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특유의 미성으로 감미로운 노래를 주로 부른 안다성이 KBS-1TV ‘가요무대’ 등에서 가끔 부르기도 하지만 젊은 후배가수들도 리메이크해 부른다. 2012년 3월 3일 오후 방송된 KBS-2TV ‘자유선언 토요일-불후의 명곡2 :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첫무대를 장식한 임태경이 ‘바닷가에서’를 클래식음악 분위기로 열창해 큰 박수를 받았다.

1963년 개봉영화 ‘유랑극장’에도 등장

이 노래를 패티김의 대표곡으로 아는 이들이 적잖다. 그러나 이 노래를 맨 처음 취입한 가수는 안다성이다. 1960년대 후반 패티김이 이 노래를 불러 여름에 그의 노래 ‘하와이 연정’과 함께 방송전파를 자주 타면서 인기를 모았지만 원창자는 아니다. ‘바닷가에서’는 1963년 개봉영화 ‘유랑극장’(강범구 감독)에도 나온다. 박노식, 이경희, 엄앵란 등이 출연한 영화장면 중 안다성의 노래 ‘사랑이 메아리칠 때’와 함께 흘러나와 노래가 더욱 많이 알려졌다.

‘바닷가에서’를 만든 박춘석(1930년생, 본명 박의병, 작고)과 안다성(1930년생, 본명 안영길)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신흥대학(현 경희대학교) 영문과 동문이자 또래다. 안다성은 청주중학교 6학년 졸업(1950년, 청주고 22회), 1951년 1102 야전공병단 군예대원 입대를 거친 신흥대 영문과 출신 ‘학사가수 1호’다. 그는 대학을 다니던 1955년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의 전속가수공모로 1956년 가요계에 데뷔했다. 영문학도였던 그가 가수시험을 친 건 그 무렵 서울중앙방송국 전속악단장 손석우 씨 권유에서였다. 손 씨는 서울 종로의 한 카바레에서 흥에 겨워 무대에 올라 가수 현인의 히트곡 ‘서울야곡’을 부르는 안 씨를 보게 돼 가수의 길을 권했다. 그렇게 해서 가수가 된 안다성은 1956년 오아시스레코드를 통해 선배가수 송민도와 함께 부른 우리나라 라디오 드라마주제곡 1호 ‘청실홍실’이 히트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안다성(安多星)’이란 예명은 금세기 최고의 흑인여성 앨토이자 흑인영가의 1인자로 불리는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에서 따왔다. 깊고 맑은 영혼의 노래를 부른 ‘앤더슨’을 좋아해 우리말 소리로 바꿔 지은 것이다.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무드 있는 노래를 자주 부른 안다성은 ‘사랑이 메아리칠 때’, ‘바닷가에서’, ‘에레나가 된 순이’ 등으로 유명세를 탔다.

세상일이란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그는 가수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 건강이 나빠져 1967년 위궤양수술을 받았다. 불규칙한 가요계생활에 지나친 흡연이 문제였다. 하루에 담배를 두 갑씩 피웠던 그는 그때부터 금연했다. 그는 요즘도 무대에 선다. 봉사단체의 자선공연, 지방의 효도잔치, 노래자랑대회 등이 주 무대다. 대회에선 초청가수 겸 심사위원 역할을 맡는다. 2013년 5월엔 신곡도 냈다. 사단법인 한국음악발전소장인 가수 최백호가 작사·작곡한 ‘그때가 옛날’이다. 조용하고 유장한 멜로디의 세미클래식풍이다.

노래 만든 박춘석, 2700여곡 작곡

‘바닷가에서’를 만든 박춘석은 가요계 거목으로 통한다. 국내 대중가요사상 개인 최다인 2700여곡을 작곡한 그는 ‘비 내리는 호남선’ 등 숱한 히트곡들을 만들며 1950~1980년대 가요계를 이끌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지구레코드사 전속작곡가, 한국음악저작권협회장, 거성레코드사 사장을 거쳤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도 1152곡이 등록돼 개인이름으론 가장 많다.

서울서 태어나 4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며 ‘신동’소리를 들었던 그는 봉래소학교, 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피아노, 아코디언을 혼자 스스로 익혔다. 1949년 피아노전공으로 서울대 기악과에 입학, 1년간 다니다 이듬해 신흥대 영문과에 편입해 졸업했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 베니김 등의 권유로 서울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오르면서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알렸다. 1954년 백일희가 부른 ‘황혼의 엘레지’로 작곡가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아리랑 목동’(박단마), ‘비 내리는 호남선’(손인호), ‘삼팔선의 봄’(최갑석), ‘사랑의 맹세’(패티김), ‘밀짚모자 목장아가씨’(박재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등을 발표하며 인기작곡가로 떠올랐다. 고인의 이름 뒤엔 늘 ‘사단’이란 말이 따라다녔다. 1960~70년대 패티김, 이미자,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 등이 ‘박춘석 사단’ 멤버였다. 특히 1964년부터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며 전성기를 누렸다.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흑산도 아가씨’ 등 500여곡을 같이 했다. 이미자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란 별칭을 붙여준 이도 박 씨다. 그의 히트곡 4분의 1을 이미자가 불렀고, 이미자의 히트곡 3분의 1을 만들었다. 그러나 박 씨는 1994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움직이지도, 말도 제대로 못했다. 16년간 투병했던 그는 2010년 3월 14일 80세로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홀몸으로 살아온 그를 돌보는 일은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동생 금석(84)씨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