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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인천 연안부두서 태어난 ‘가슴 아프게’

  • 입력 2017.09.13 16:03
  • 수정 2018.03.23 12:13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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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날 인천 연안부두서 태어난 ‘가슴 아프게’
목포출신 가수 남진 가출 후 19살에 취입해 대히트
처음엔 1967년 ‘낙도가는 연락선’ 제목으로 작곡·작사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쓰라린 이별만은 없었을 것을
해 저문 부두에서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당신과 나 사이에 연락선이 없었다면
날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것을
아득한 바다 멀리 떠나가는 연락선을
가슴 아프게 가슴 아프게 바라보지 않았으리
갈매기도 내 마음 같이 목메어 운다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 남진 노래인 ‘가슴 아프게’는 1960년대 나온 인기대중가요 중 하나다. 4분의 4박자 트로트로 부르기가 쉽고 멜로디 연결이 자연스럽다. 맑으면서도 굵직한 목소리의 미남가수 남진이 젊은 시절 취입 곡으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다. 10세의 신인가수 남진이 샛별처럼 등장했고 국내는 물론 일본까지 뜨겁게 달군 ‘한류 1호 망향의 노래’로 기록된다.

이 노래는 남진이 가요계 데뷔 후 1년 만에 부른 것이다. 1966년 가수가 되기 위해 집을 나와 버린 남진은 ‘울려고 내가 왔나’를 데뷔곡으로 가요계에 발을 디뎠다. 그러나 그는 처음엔 대중들 눈을 끌지 못했다. 그랬던 그가 ‘가슴 아프게’를 불러 졸지에 유명해졌다. 대중적인 노랫말과 박정희 대통령 시절 경제개발바람을 타고 남녀의 만남이 자유스러운 분위기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던 무렵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했던 까닭이다.

정두수 씨, 인천 연안부두서 악성 떠올라 작사

이 노래의 원래제목은 ‘가슴 아프게’가 아니었다. 제목이 바뀐 사연을 더듬어보면 재미있다. 1966년 남진이 서울 경복고를 막 졸업한 뒤 어느 날이었다. 남진이 국내 연예기자 1호인 정홍택 당시 한국일보 기자(전 한국영상자료원 이사장 / 전 한국일보 부장·월간 편집국장)를 우연히 만났다. 그 땐 레코드취입 전으로 짧은 머리에 자주색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먼저 정 기자가 말문을 열었다. “자네 가출했지?”, “네! 부모님들이 가수 되는 걸 하도 반대해서 나와 버렸습니다.”, “다시 집으로 들어가. 부모 속 썩히지 말고, 공부나 하지 그래!”, “……”

아무리 타일러도 남진은 소용없었다. 끝까지 가수가 돼야한다며 막무가내였다. “최희준 씨처럼 훌륭한 가수가 되는 게 꿈”이라며 오히려 “좀 도와 달라”고 매달렸다. 정 기자는 자신의 말이 먹혀들지 않자 겁을 주기로 했다. “자네 실력으론 가수 되긴 틀렸으니 일찌감치 그만둬!” 그래도 남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도 더 노력할 테니 도와주십시오.”

결국 정 기자는 남진의 집념과 성의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가 가수가 될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써주기로 한 것이다. 음반을 낼 수 있는 지구레코드사의 전속가수로 연결시켜 주고 작사가, 작곡가와도 선이 닿게 다리를 놓았다.

경남 하동출신의 작사가 정두수(본명 정두채 / 시인 정공채 선생 동생)씨가 노랫말을 만들고 작곡가 박춘석 씨가 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 씨가 이 노래 가사를 만든 건은 1966년 비오는 어느 봄날이었다. 인천 연안부두술집에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젊은 여주인이 혼자 라디오 앞에 앉아 연속극을 듣고 있었다. 그때였다. ‘부웅~’ 하는 뱃고동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술집에서 뛰쳐나왔다. 소년시절 부산 광안리 바닷가에서 보낸 때가 떠올랐다. 궂은 날씨 때문인지 바다는 보이지 않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무엇이 이토록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바다와 나 사이를 짓누르는 게 무엇인가’라고 중얼거렸다.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그렇게 써 내려간 게 바로 ‘가슴 아프게’ 노랫말이 됐다.

남진을 위한 음반 취입준비 작업은 하나 둘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정 기자는 레코드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남진이 부를 노래작곡이 끝났으니 한번 들어봐 달라는 전화였다. 정 기자는 서울 충현동에 있는 작곡가 박춘석 씨 집으로 갔다. 작사가 정두수, 지구레코드사 임정수 사장, 노래를 부를 남진이 와있었다. 2층 작곡실에서 박 씨가 남진이 부를 곡을 피아노로 쳐주며 의견을 내달라고 했다. 노래제목은 ‘낙도가는 연락선’.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와 그 시절 대중들 취향에 맞는 노랫말은 좋다고 느꼈으나 노래제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의견에 작사가 정 씨도 동감한다며 제목을 바꾸기로 했다.

그 때만 해도 노래제목의 대부분이 명사로 끝나는 게 전통이었으나 과감하게 부사나 형용사로 만들어보기로 하고 몇 가지 가제목들을 달아봤다. 최종적으로 정해진 건 ‘가슴 아프게’였다. ‘아프게’란 부사로 노래제목을 단 것이다. 부사로 끝나는 제목이 드물었던 터라 노래는 나오자마자 인기였다. 방송전파를 타면서 남진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19세의 한양대 연극영화과 1학년생인 남진은 한 순간 유명세를 탔다.

같은 제목 영화도 나와…남진-문희 주연배우 출연

노래 여세를 몰아 1967년엔 같은 제목의 영화 ‘가슴 아프게’까지 나왔다. 영화에서 남진은 문희와 함께 주연을 맡아 가수 겸 영화배우로 날개를 달았다. 미남형 가수와 미모의 여배우 연기는 장안의 화제가 됐다. 노래는 영화와 더불어 상종가를 쳤다. 2011년 6월 충남 보령시 성주면 개화예술공원에 ‘가슴 아프게’ 노래비가 세워졌다. 비 맨 위에 남진의 얼굴이, 아래에 악보와 가사, 노래 소개 글이 새겨져 있다. ‘2011모산미술관 국제조각전 및 박춘석 작곡가 비, 남진 노래비 제막식’이 개화예술공원에서 주한대사 등 40여 개국의 외교사절단과 남진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본명이 김남진(金湳鎭)인 남진은 목포시내 부잣집아들로 태어나 서울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는 국내 가요계 황금기라 할 수 있는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가요계 간판스타였다. ‘오빠’소리를 처음 들은 가수, 가수팬클럽이 처음 만들어진 가수로 인기정상 가도를 달렸다.

그러던 중 남진은 젊은이들의 월남 참전바람을 타고 1969년 베트남으로 가 1971년 귀국 때까지 전장을 뛰었다. 제대 후 부산출신 가수 나훈아와 경쟁하며 귀국 첫해 ‘눈물로 끝난 사랑’, ‘마음 약해서’에 이어 1972년 히트곡 ‘님과 함께’로 가요계를 평정했다. ‘한국의 앨비스 프레슬리’란 소리도 들었다. ‘그대여 변치 마오’, ‘꽃분이’, ‘마음이 고와야지’, ‘미워도 다시 한 번’ 등 숱한 레퍼토리로 승승가도를 달려온 그는 한국연예협회 이사장, 가수협회장 등을 지냈다. 지금도 방송활동과 무대에 서며 노래 삶을 살고 있다.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지낸 작곡가 박춘석 씨는 뇌졸중으로 16년간 투병 중 2010년 3월 14일 별세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담은 2,700여곡을 만들어 한국가요 지평을 넓힌 작곡자이자 뛰어난 재즈피아노 연주자였다.

‘가슴 아프게’ 노랫말을 쓴 정두수(1937년~2016년 8월 13일) 선생은 3,500여곡의 노랫말을 만든 ‘전설의 작사가’로 통한다. ‘마포종점’, ‘흑산도 아가씨’, ‘마음 약해서’ 등을 작사한 음악인 겸 문인이다. 국민들 심금을 울리며 우리나라 가요를 대표하는 작사가로 이미자, 패티김, 남진, 나훈아, 배호, 문주란, 최희준, 하춘화, 주현미, 조용필, 태진아, 설운도, 조항조 등 유명가수들과 함께하며 우리나라 대중가요사를 썼다. 박춘석 작곡가와 콤비를 이뤄 가요산맥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그의 노래 시(詩)들은 대중성·작품성을 인정받았다. 390여 차례 상을 받았고 하동 등 전국 13곳에 노래비가 세워진 게 잘 말해준다. 1937년 하동서 태어나 부산 동래고, 서라벌예대 문창과를 나온 그는 1995년 장시 ‘지리산’, ‘섬진강’, ‘백두대간’, ‘하동포구 이야기’ 등을 발표했다. ‘알기 쉬운 작사법’, ‘시로 쓴 사랑의 노래’ 등의 저서도 있다. 부인(이영화, 경희대 성악과 출신)과 사이에 난 딸 셋(정다혜·지혜·선혜) 중 둘째는 성악을 하고 있다. 하동에 정 선생의 형제를 기리는 기념관(‘정공채 문학관’, ‘정두수 시문학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