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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 Crime]클레오파트라의 미를 능가하는 '네페르티티'

  • 입력 2006.08.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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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는 새로운 왕국이 시작되는 18대 왕조에 이르러 이전과는 전혀 다른 혁명적 미술을 탄생시켰다. 이 새로운 미술은 아메노피스(Amenophis) 혹은 아멘호테프(Amenhotep) 4세(기원전 1380~1362)에 의한 것으로 일명 '이크나톤'으로 알려진 왕에 의해 단행된 대종교 개혁의 결실이라 할 수 있다.
이크나톤은 이집트에서 숭상해온 전통적인 신(神) 아멘(Amen)을 폐지하고 아톤(Aton)을 새로운 유일신으로 선포하고 아멘 신의 우상과 신전을 파괴했으며 또한 아멘 신의 이름을 신전과 심지어 파라오 자신의 이름에서조차 지워버리고 그 대신 아톤 신의 태양 디스크와 애무하는 손이 달린 햇살을 그려 넣는다. 이크나톤 왕은 아예 아멘 승려들이 세력을 잡고 있던 수도 테베를 버리고 나일강 상류 황무지인 아마르나로 수도를 옮겼다.
광신적인 파라오 이크나톤은 자신은 아톤 신의 아들이며 선지자로서 태양신은 자기를 통해서만 계시를 전달한다고 했다. 그리고는 새 수도에 궁전과 신전을 신축하는데 국고를 탕진해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를 참다못한 아멘 승려들과 가난한 국민들은 그를 증오하고 그의 행동에 반발했기 때문에 아톤 숭배의 종교개혁은 당대에 끝나게 됐다.
그러다 기원전 1331년 1월 26일 이크나톤이 사망하자 복수심에 찬 아멘 승려들은 수도 아마르나를 완전히 파괴하고 이크나톤의 영혼과 육체가 다른 파라오 왕들과는 달리 우주에서 영원히 만나지 못하도록 저주했다. 수도를 다시 테베로 옮기고 아멘의 옛 신앙을 다시 국교로 선포하는 등 종교개혁은 실패했지만 이크나톤은 이집트 미술에는 놀랍고 혁신적인 양식적 변화를 가져왔다.

'이크나톤 조각'은 꿈꾸는 듯 한 부드러운 모습과 감각적인 몸매를 보여준다
[1L] 카르나크에서 발굴:'이크나톤'기원전 1375년경, 카이로, 이집트 박물관


아톤 신앙은 몇 천 연간 계속된 이집트 미술의 전통과 인습에 갑작스런 단절과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이집트의 전통적인 죽음과 영원의 집착에서 해방돼 지구상의 인간의 삶에 대한 보다 큰 관심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카이로의 이집트 박물관에 있는 기원전 1375년의 '이크나톤 조각'은 꿈꾸는 듯 한 부드러운 모습과 감각적인 몸매를 보여준다. 긴 얼굴의 섬세한 윤곽과 곧은 코, 육감적인 두꺼운 입술.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으로 배와 하체는 에로틱하고 풍만하게 만들었다. 이는 얼어붙은 것 같이 경직된 이전 이집트 왕들의 조각과는 너무나 다르다. 유기적인 육체와 스타일을 뒤섞은 조각은 생동력과 표현주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등 이집트 미술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 이크나톤은 절세의 미인 왕비 덕분에 후세에 더 유명해졌다.
기원전 1360년 경의 '네페르티티의 조각'은 명상에 잠긴 듯 한 분위기와 섬세하고 깨끗한 윤곽의 고운 얼굴이다. 그녀의 얼굴 윤곽은 칼로 자른 듯이 선이 분명하다. 갸름한 얼굴, 이마와 눈썹, 눈 언덕과 눈매, 코, 입술, 볼, 턱의 선이 깨끗하고 얼굴색은 투명하다. 날카로운 턱과는 달리 그녀의 붉은 입술은 건강한 젊은 여인의 관능미를 발산한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빠진 긴 목을 가진 절세의 미인이었던 것.
[2R] 아마르나에서 발굴:'네페르티티 왕비'기원전 1360년경, 베를린, 국립박물관

무거운 왕관을 쓴 머리를 지탱하고 있는 철저한 미인의 긴 목에는 긴장한 듯 혈관과 근육이 보인다. 그녀의 목은 마치 여름날 무거운 꽃봉오리를 이고 있는 가늘고 휜 꽃줄기와도 같아 이 조각은 이집트 예술 중 최고 걸작의 하나로 꼽히며 그 아름다움은 현대 유럽의 여성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흉상은 그의 남편인 이크나톤 왕이 수도를 옮겼던 아마르나에서 유물을 조사하던 중에 발굴된 것인데 그 발견된 장소가 조각가 도도메스가 작업장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그런데 불가사의한 것은 우측 눈에는 유리 안구가 들어있으나 좌측 눈은 미완성인 상태라는 점이다. 좌측 눈이 없[3R]는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는데 눈병에 걸렸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왕비가 처음에는 조각가 도도메스를 총애했으나 도중에 냉대했기 때문에 이를 보복하기 위해 도도메스가 일부러 왼쪽 눈은 만들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또 흉상이 완성되기 직전에 도도메스가 급사했기 때문에 미완성인 상태로 남게 되었다는 설, 또 흉상이 완성되기 직전에 아마르나 시대의 종말이라는 극한 상태가 야기돼 왼쪽 눈을 만들어 넣을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라는 설 등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어느 것이나 근거 있는 것이 못 된다.

클레오파트라, 절세의 미인이라 하기에는 곤란?
세계적으로 절세의 미인이라 불리는 클레오파트라(기원전 69~30년). 중세 아랍 학자들은 수많은 문헌에서 한 번도 그녀의 미모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지만 화학, 의학, 철학, 수학, 건축학 등의 분야에서는 그녀의 업적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는 여러 나라 말에 능통해 통역 없이 외교사절과 대화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知)의 여왕'이라 불렸는데 중세에 아랍 문헌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미의 여왕'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얘기도 있다.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쓴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도 '성적 매력으로 가득한 헬레니즘 최후의 여왕이며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묘사한 것을'미의 여왕'으로 전해졌다고 했다.
[4R]고대에는 사진 같은 것이 없어 클레오파트라의 참모습이 어떠했는지 상상할 수 없으나 당시 만들어진 화폐나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석판을 보면 몸이 그렇게 날씬하지 않으며 그리 미인인 것 같지도 않아 절세의 미인이라 하기에는 곤란하고 오히려 네페르티티 왕비의 아름다움에 손을 들어 주어야 한다는 평가이다.
실은 네페르티티의 조각상은 1912년 아마르나에서 유물 발굴 작업을 하던 독일 고고학 유물조사단에 의해 발굴됐다. 이집트의 고대 조각은 개성이 없는 것이 많았는데 그녀의 흉상은 달랐다. 그래서 독일 발굴 조사단은 이집트 정부 고고국(考古局)의 출토품 검사를 받을 때 전혀 가치가 없는 조각편이나 석비(石碑) 조각들을 잔뜩 담운 상자의 맨 밑에 그녀의 흉상을 감추고 제출 서류에는 중요한 것을 발굴하지 못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집트의 검사관은 그 보고서를 믿고 위의 것들만 대충 들춰보고는 반출승인 검인을 찍어 주었다. 그래서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이집트를 떠나 독일로 가게 됐으며 베를린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진열됐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미인조각이 베를린에 전시됐을 때 네페르티티의 아름다움은 세계적인 화젯거리가 됐다.
이집트 정부는 밀반출한 걸작을 돌려달라고 했으나 독일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화가 난 이집트 정부는 독일인이 이집트에서 고고학 발굴을 못하도록 금지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조각가 도도메스에 의해 만들어진 이 작품이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자 이집트 정부는 자기 나라의 유명한 조각 '파라오의 두상(頭像)' 두 개와 교환할 것을 제의했으나 베를린 박물관 측은 이를 거절했다. 당시 신문들은 '두 파라오도 감당하지 못한 왕비'라는 제목으로 대대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네페르티티의 흉상은 더욱 유명해 졌다.
이렇듯 남의 나라의 문화재나 미술품이 그 경로가 도굴이거나 사기이거나에 무관하게 일단 그 나라를 벗어나 자기 나라에 들어오면 어떤 이유를 붙여서든 반환하는 일은 없다.
이집트를 위시한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의 경우 근 100년에 거쳐 많은 미술품이나 국보급 유물들이 국외로 밀유출되고 있어 미술 범죄의 온상이 되고 있다. 지하에 파묻혀 있던 것들이 고고학적 의의를 잘 아는 도굴자들에 의해 도굴이 성행돼 그 출토품으로 인해 미술시장은 오염되고 있으며 그나마 도굴할 때 파손이 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한 일로 여겨야 하는 것으로 위안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