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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사화가의 치료적 풍자화

  • 입력 2017.11.06 15:09
  • 수정 2017.11.14 15:27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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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슈피츠베크 작 : ‘자화상’ (1839) 개인 소장
▲ 그림 1. 슈피츠베크 작 : ‘자화상’ (1839) 개인 소장

독일의 화가 카를 슈피츠베크(Carl Spitzweg 1808-1885)는 우리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나 클래식 음악애호가들에게는 LP나 CD앨범의 재킷 그림을 통해서 그의 그림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나름대로의 매우 독특한 화법을 구사해 한번 보면 나름대로 웃음을 유도하기 때문에 뇌리에 남는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슈피츠베크는 매우 성실한 성격의 소유자로 독일 사람으로는 보기 드물게 풍부한 유머 감각을 지닌 화가이었다. 그것은 프랑스의 화가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미에가 사회풍자나 비판에 대한 그림을 그렸다면 슈피츠베크의 작품은 풍자적이라기보다는 유머를 주축으로 한 서민의 애환 어린 애정이 깃든 그림을 많이 그렸다. 이렇게 유머가 풍부한 풍자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을 살피면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약사이었다. 그래서 그가 환자들에게 약을 지어줘 병을 고친다는 것은 그 개인을 치료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하고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는 것은 마음이 즐거워지기 때문에 병든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으며 또 그의 유머적 감각의 재능이 뒷받침되어 누구나가 보면 즐거운 마음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또 슈피츠베크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피아노를 쳤으며 합창단의 단원으로 그리고 아마추어 극단의 단원으로도 활약했다. 이렇게 다재다능한 슈피츠베크의 살아온 경력을 보면 그는 뮌헨에서 식품업을 하는 부유한 가정의 차남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머리가 명석하며 학업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월반을 여러 번하는 수재이었다고 한다. 뮌헨대학의 약학과에 입학하여 21세 때 약사가 되었다. 그는 여행을 자주하였는데 약사가 된 3년 후인 1832년에는 이탈리아를 처음 여행하였으며 이때 이탈리아 미술에 매혹되어 그림을 그릴 충동을 느끼게 되어 3년 후에 다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거장들의 그림을 직접 접하고 보니 자기도 모르게 천부적인 소질이 충동되어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슈피츠베크를 또 자극한 것은 콜레라의 유행이었다. 뮌헨에는 1836년에 콜레라가 유행하여 한 도시의 인구가 전멸하다 시피하였는데 살아남은 그는 하는 수 없이 시골로 피신하였다. 그 후에도 뮌헨에는 1854, 1874년에 걸쳐 콜레라의 대유행이 있었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으며 이렇게 콜레라의 공포증에 걸린 화가는 사람들이 콜레라에 대해서 공포를 안고 죽는 사람들에게 다소나마 마음에 위로를 주어 입가에 미소를 띨 수 있다면 화가로서는 최상의 사명을 다하는 것으로 생각 되였다.

즉 자기는 약사로서 그림을 그려 병든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어 건강을 증진 시키는 것이 약을 지어주는 약사로서의 역할보다도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화가의 역할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즉 예술이 병의 공포를 덜어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최선의 방법은 없을 것이라는 것으로 말하자면 콜레라의 공포가 그를 유머 풍자화를 그리게 한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 그림 2. 슈피츠베크 작 : ‘가난한 시인’ (1837) Deuts
▲ 그림 2. 슈피츠베크 작 : ‘가난한 시인’ (1837) Deuts

그의 유명한 작품 ‘가난한 시인’ (1837)을 구상한 것은 그의 나이 29세 때이며 이 작품은 의외로 좋은 반응을 일으켜 그는 약사로서보다 화가로서 더 알려지기 시작 하였다. ‘가난한 시인’의 그림을 보면 이 늙은 시인이 사는 것은 비가 오면 빗물이 새는 지붕 밑 골방이어서 언제나 우산은 천정에 매달아 놓고 있다. 창밖으로 옆집 지붕에 소복이 쌓인 눈이 보인다. 추운 겨울날 온기를 다스릴 땔감도 없이 냉방에 칩거하는 늙은 시인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시상에 몰두하다가 몸이 가려워 깃털 펜을 입에 물고 몸을 긁다보니 이가 잡혀 이를 오른손으로 잡아내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조금도 고독하거나 쓸쓸한 느낌이 없다.

서민의 별 볼일 없는 삶을 해학과 유머로 표현하기 좋아했던 화가는 자기 특유의 붓 솜씨를 보이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머리에 쓰고 있는 털실모자이다. 잠자리에 들 때 머리에 쓰는 털실모자는 19세기 캐리커처 화가들이 즐겨 그렸는데, 자유와 해방을 상징한다. 19세기 초 북유럽의 정치판은 한 마디로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 그 자체였다. 잠자리 털실모자는 독일 비더마이어 시대 소시민의 “밤잠이라도 두 발 뻗고 자게 해 달라.”는 최소한의 요구이며, 미쳐 날뛰는 정치판에 대한 소리 없는 저항의 표식이었다. 가난한 시인이 빈곤한 삶 속에서도 자유로운 시상을 꿈꿀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듯 시인이나 예술가는 쓰라린 고난의 아픔이 오히려 그 예술을 감동어린 깊은 의미의 철학으로 승화시켰는지도 모른다. 즉 먹을 것만이 삶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던 이 빈궁한 시절이 예술가들을 강인하고 치열한 승부정신으로 무장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것의 배경은 괴테의 “눈물과 함께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맛을 모른다”라는 의미심장한 명언이 함축 되여 있다. 그 후 슈피츠베크는 잡지 《Fliegende Blatter》와 《Nurnberger Trichter》 등에 데생을 발표하는 한편, 서민의 일상생활을 경묘한 필치로 그려내기를 계속했다. 플랑드르파(派)와 바르비종파(派)의 영향을 받아 소박하고 솔직한 서민의 일상생활에 바탕을 둔 부드러운 명암표현과 미묘한 색채효과를 특징으로 하였다.

▲ 그림 3. 슈피츠베크 작 : '책벌레' (1850) 개인 소장
▲ 그림 3. 슈피츠베크 작 : '책벌레' (1850) 개인 소장

그의 작품 ‘책벌레’(1850)를 보면 한 노인 학자가 책이 많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방을 잔뜩 채운 책 냄새를 맡으며 이책 저책 찾다가 나중에는 사다리를 놓고 맨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고는 입을 쑥 내밀고 책에 열중해 있는 모습을 그렸다. 노인은 왼쪽 옆구리에도, 왼손에도, 오른손에도, 심지어 무릎 사이에도 책을 끼고 있는 책벌레라는 점에서 웃음을 자아내지만 그 나름대로의 진지한 모습에 웃을 수가 없고 단지 속으로만 웃게 한다.

▲ 그림 4. 슈피츠베크 작  :  ‘위험한 연애편지’ (1860) Deutsch: Schweinfurt, Sammlung Georg Schäfer
▲ 그림 4. 슈피츠베크 작  :  ‘위험한 연애편지’ (1860) Deutsch: Schweinfurt, Sammlung Georg Schäfer

그의 작품 ‘위험한 연애편지’ (1860)를 보면 2층에 사는 청년이 아래층에 사는 처녀에게 연애편지를 전하는데 편지를 끈으로 묶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내고 있는데 처녀는 바느질에 열중하고 있으며 이것을 먼저 발견한 것은 보기에 신경질적이며 까다로워 보이는 그녀의 어머니이다.

▲ 그림 5. 슈피츠베크 작 : ‘예술과 과학’ (1880) 개인 소장
▲ 그림 5. 슈피츠베크 작 : ‘예술과 과학’ (1880) 개인 소장

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는 관자들이 판단할 몫으로 남기고 있다. 슈피츠베크의 작품 ‘예술과 과학’ (1880)을 보면 골목 안 풍경을 묘사한 것인데 모자까지 정장을 한 과학자로 보이는 신사가 노점 책장사의 책을 보고 있으며, 뒤에 보이는 건물의 2층에는 한 여인이 책을 보고 있으며, 3층에서는 건물 벽에 벽화를 화려하게 그리고, 4층에서는 한 여인이 플루트를 불고 있다. 즉 지상에서부터 과학,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의 순으로 표현되어있다. 지상에서 비둘기에게 모이를 주던 여인이 즉 한 서민이 바라보는 것은 그 시선의 방향으로 보아 미술쪽을 보고 있다. 마치 약사인 자기가 미술을 택하게 된 이유를 설명이라도 하는 듯이 재미있게 표현한 그림이다.

▲ 그림 6. 슈피츠베크 작 : ‘일요일의 하이킹’ (1841) Salzburg
▲ 그림 6. 슈피츠베크 작 : ‘일요일의 하이킹’ (1841) Salzburg

그의 작품 ‘일요일의 하이킹’ (1841)을 보면 한 가족이 일요일에 시골길을 걸으면서 하이킹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맨 앞에 가는 이는 가장인 아버지로서 배가 몹시 나와 있으며 다른 가족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양산을 준비하였으나 아버지는 모자를 벗어 이를 양산대신 사용하고 있다. 즐거워야할 하이킹이 배가 나온 아버지로서는 그렇지가 못한 눈치이다. 눈을 크게 뜨고 먼 곳을 바라보며 왼손에는 막내로 보이는 어린이의 손을 잡고 가고 있다. 즉 최대로 크게 보이는 아버지와 너무 작아서 풀잎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 어린이를 선두에다 그려 대조를 이루고 있다. 즐거운 것은 어른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딸애는 꽃을 꺾어든 것으로 그리고 뒤에 처진 아들은 곤충망으로 나비를 잡는 것으로 즐거움을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약으로 병을 치료하기보다 많은 사람의 감동과 공감을 주어 불안과 아픔을 희석하여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는 예술을 택하였다는 것을 여실히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