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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nting & Crime]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왕비

  • 입력 2006.09.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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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비게 레브른 작: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상'(1770) 베르사유 궁 미술관

프랑스 루이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1755-1793)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다섯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1770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왕세자였던 루이 16세와 결혼하였는데 그 당시의 왕비의 모습을 화가 비게 레브른(Louise-Elisabeth Vigee-Lebrun 1755-1842)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18세에 왕비가 되었고 21세에 임신할 때까지 7년 동안 루이 16세는 몸의 병 때문에 왕비를 처녀의 몸으로 그대로 지내게 하였다. 한동안 자녀가 없다가 왕위를 이을 왕자를 출산하고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화려한 생활과 스캔들 등으로 인해 생활고에 시달려 오던 국민들의 증오의 표적이 되었다. 물론 루이 16세가 몸에 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처녀로 지내게 하였다는 사실은 나이 어린 왕비의 정신적인 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된다.
왕비는 무료한 생활에 한계를 느껴 쾌락을 얻기 위해 밤이면 마차를 몰고 젊은 족속들과 어울려 극장과 도박장을 출입하기 시작했고 이에 실증을 느끼고는 보석과 값진 장신구를 사들이는데 열중하였다. 나중에는 1년에 무려 100벌의 옷을 만들게 하였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새로운 장신구에도 눈을 돌리는가하면 연극, 경마, 무도회를 매일 밤 열고, 베르사유 궁전 안에 '꿈의 궁전' 이라는 작은 별장을 짓게 하고는 매일 밤 친구들과 고관대작의 부인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열었다.
당시 귀부인들의 최대의 관심사는 누구의 유방이 가장 아름다운가에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모이면 서로의 유방을 겨루는 '유방 콘테스트'를 열곤 했는데 1위는 언제나 앙투아네트 왕비가 독차지 했다.
그녀가 남편과의 결혼 생활에서 무료함을 달래는 길은 이렇게 새로운 쾌락을 발굴하는 길이었는데 루이 16세는 남성으로서의 구실을 할 수 없어 부인이 옆에 오지 못했기 때문에 왕비의 낭비와 사치를 방관하는 수밖에 별도리가 없었다.
이러한 사정을 전해들은 앙투아네트 왕비의 오빠인 요셉 2세는 매우 걱정이 되어 빈에서 일부로 파리로 와서 루이 16세를 설득해 외과 수술을 받게 하였으며 그 결과 사나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비로소 결혼 7년 만에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으며 그 다음날 왕비는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사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루이 16세의 병이 고쳐짐에 따라 부인과의 결혼 생활도 원만해졌고 왕비는 임신이 되었다. 그러나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은 점점 더 심해만 갔다.
그래서 후세 역사 평론가들은 단지 원만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었던 것만이 왕비의 사치와 낭비벽의 원인이 아니라 그녀의 성격상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어려서부터의 엄격한 종교 교육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하여튼 혁명전 귀족 문화를 대표하는 향락 생활을 주도하였던 것이다.
혁명세력이 그녀에 대해서 더욱 분노한 것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다. 1785년 마리 앙투아네트가 647개의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엄청난 가격의 목걸이를 구입하고 싶어 했는데 왕비의 충성스런 신하 motte 마담이 이 사실을 눈치 채고 추기경에게 은밀하게 부탁하여 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하지만 마리의 손에 들어오기도 전에 영국으로 밀수출되어 버린다.
결국 보석상에 의해 이 사건의 전말이 폭로되어 추기경은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motte 마담은 유죄를 선고받아 감옥에 가게 되고 국민들은 왕비가 이 일에 연루되어 있다고 믿었고 그 결과 마리는 프랑스혁명 때 단두형에 처하는 이유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의 혁명 세력에서는 왕비를 '적자 부인 (赤子婦人)'이라고 비난하였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발발 이후 혁명군에 의해 감금되어 지내다가 1793년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단두형에 처해졌다.

[2L]길로틴의 모형도

단두형은 1789년 프랑스의 의사 기요탱(J.I.guillotine)이 고안한 단두기구(斷頭機具)를 길로틴식 단두기 (guillotine shear)라 하는데 그림에 제시된 것과 같이 두 기둥 사이에 비스듬한 칼날의 도끼를 달아놓고, 그 밑에 죄수를 누인 후 밧줄을 당기면 도끼가 떨어져 목을 자르게 되어 있는 가공할 만한 사형 집행 기구이다.
단두기는 그 전부터 남프랑스 및 이탈리아에서 사용되던 것을 의사이며 입헌의회(立憲議會) 의원이던 기요탱이 유죄자(有罪者)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이의 사용을 제안한 데서 기요틴이라 이름 지어졌다. 고통이 순간적이며 처형에 필요한 시간도 짧다는 의미에서 혁명정부가 모든 사형(死刑) 집행을 이 기구로 해야 한다는 법 제정 이후 373명의 귀족, 왕당파, 반혁명 자들이 길로틴에 의해 목이 잘렸다. 당시 이 단두 사형집행은 그 이전의 방법보다 고통을 크게 줄였다는 점에서 인도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으나 1793년 이후 공포정치시대에 많은 사람을 처형하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공포정치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혁명정부에 의한 왕비에 대한 공판은 10월 14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놀라운 오명을 쓰게 되었다. 즉 왕비는 자기의 9세 된 아들에게 성적인 쾌락의 방법을 가르쳐 그 아들과 근친상간을 계속해 왔다는 죄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증인으로 채택되어 공판장에 나온 아들과 루이 16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도 재판장의 심문에 여왕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였다.
불과 8년 6개월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성적인 상대로 삼았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 어려운 죄상이었다. 물론 이 문제만이 아니라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만 해도 왕비는 단지 그 목걸이가 탐이 난다는 이야기를 하였을 뿐인데 이를 빙자해서 그 주변에서 이를 사기 쳐 이를 밀수출한 것인데 일반에게 알려지기는 마치 왕비가 한 것으로 알려져 결국은 국민의 분노를 샀던 것이다.
70일간 감금되어있던 왕비는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38세라는 나이에는 걸맞지 않게 머리가 희끗희끗 희게 되고, 얼굴에는 불안이 가득 차 있었고 비탄에 잠겨 모두가 무관심하다는 표정이었다. 햇빛이 차단된 방에 감금되어 있다 햇빛을 보아서 그런지 왕비의 눈은 금방 출혈이라도 될 듯이 충혈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정에 나왔을 때 왕비는 목에 힘을 주어 꼿꼿이 세우고 애써 위험을 찾으려는 듯이 재판장을 바라보고 심문에는 확신을 갖고 침착하게 말의 반복이나 더듬이 없이 또박또박 대답하였다.
검사가 기소장을 낭독하자 모두가 사실과 다르다는 듯이, 그러기에 애써 듣지 않으려는 듯이 시선을 다른데도 돌리고 침묵하고 있었다. 검사의 기소장이 낭독된 후에 배심원들의 의견을 묻자 배심원은 전원 일치해서 왕비의 죄를 인정하고 유죄를 선고하였다. 이 결정을 보고서도 왕비는 각오가 되어있다는 듯이 무감각한 표정으로 화를 내지도 않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그 후로는 재판장의 심문에도 묵묵부답으로 단지 부정의 몸짓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 뿐이며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이 났으니 한시 바삐 죽음을 달라는 표정이었다.
그녀가 사형을 집행받기 위해 혁명광장에 끌려간 것은 1793년 10월 16일이었다. 광장에는 군중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군인들에 의해 삼엄한 경비가 철통같이 펼쳐진 가운데 왕비를 태운 마차가 단두대에 이르자 망나니 산손은 왕비를 마차에서 내리게 하고는 단두대에다 양 팔을 결박해 고정하였다. 그러나 왕비는 조금도 흩어짐이 없이 남아있는 정신력을 총집중해서 전면을 응시하였다. 이 광경을 당시 이를 목격한 사람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이라는 이름의 그림을 남겼다.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길로틴에 의해 왕비에 목이 잘리자 그 목을 창에 꽂아 군중을 향해 높이 들자 군중은 이에 호응하여 "10공화국 만세!"을 소리 높이 외쳤다고 한다.
[3L]
당시인의 그림: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형 집행'(17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