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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카니발리즘으로 탄생되는 카니발

  • 입력 2017.12.18 15:40
  • 기자명 문국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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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제목 ‘식물의 카니발리즘으로 탄생되는 카니발’을 의미상으로 보면 모순이 개재되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이렇게 한 것은 완전히 저자 나름대로의 모험적인 생각에서이다. 즉 우선 ‘카니발리즘’과 ‘카니발’의 혼동을 피해야겠다는 생각에서이다. ‘카니발’은 마치 ‘카니발리즘’의 약어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카니발리즘’은 ‘cannibalism’으로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는 식인(食人)행동을 뜻하며, ‘카니발’은 ‘carnival’로 축제, 즉 사육제를 뜻하는 것으로 완전히 구별이 된다. 그러나 이를 한글로 표기하고 이를 그대로 발음하면 혼동이 오기 때문에 글을 쓰기에 앞서 이를 구별하여야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면에는 일반적으로 먹을 수 있는 식물(食物)은 그것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이 식물을 먹지 않는다 해도 모든 식물은 오래가지 않아 변성(變性)되게 마련이고, 이렇게 변한 식물은 부패되어 악취를 발하면서 소실 즉 죽어 없어지는 것이 식물의 운명인 것인데 이것을 식물로 볼 때는 자연사 하는 셈이다.

그러나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식물을 먹는다는 것을 식물로 볼 때는 살생(殺生)당하는 셈이다. 그래서 이를 식물의 카니발리즘으로 표현하고 싶었고, 또 식물이 이렇게 살생되면서 생겨나는 맛이 있어 이를 즐기면서 사람들이 모여 같이 즐기면 곧 이것이 축제, 카니발이 된다고 생각하면 두 용어의 한글표현과 발음에서 오는 혼동은 피할 수 있거니와 또 하나는 이 저서가 ‘맛의 예술을 탄생시키는 음식문화’라는 막연한 제목을 조금이나마 구체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택한 제목이라는 것을 변명삼아 기술해 본다.

▲ 그림 1. 무릴료 작 : ‘과일 먹는 소년들’1650, 뮨헨, 알테피나코테크
▲ 그림 1. 무릴료 작 : ‘과일 먹는 소년들’1650, 뮨헨, 알테피나코테크

혹시 전술한 ‘식물의 카니발리즘과 카니발의 관계’가 표현된 그림이 있겠는가를 찾아보았더니 스페인의 화가 무릴료(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가 그린 ‘과일 먹는 소년들’(1650)이라는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 화가 무릴료는 원숙하고도 자유로운 느낌을 주면서 감정의 진실이 잘 나타나는 그림을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로 그는 성화뿐만이 아니라 소년과 거지, 방탕한 자식, 농부의 아들 등을 다룬 풍속화도 그렸는데 그중의 ‘과일 먹는 소년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림의 주인공들은 천진난만하게 과일을 살생하며 두 소년은 그 맛을 감미하면서 서로의 눈길로 축제를 즐기는 것 같이 느껴졌다.

즉 그림의 주인공들은 맨발에다 옷은 무릎이 다 헤진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데 먹는 과일은 포도와 멜론 같은 고급 과일로 그것도 과일 바구니에 가득 차다 못해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소년들이 과일을 어디에서 서리 해 온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한 소년은 한손에 멜론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포도를 먹고 있는 것으로 보아 허기진 배를 채우기 바쁜 듯이 보인다.

이 소년들에게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과일을 먹는 것, 먹는다기보다 살생, 왜냐하면 그림의 오른쪽의 소년은 칼을 쥐고 멜론을 자르는 것이 마치 과일을 살해한다고 표현하는데 손색이 없을 것 같고, 또 살해한 과일을 입에 넣고 이번에는 씹는 행위를 계속하다 보니 그 울어나는 맛이 또한 즐거워 서로가 말은 못하고 오고가는 눈길로 즐거움을 나누고 있다. 특히 왼쪽의 소년은 기다란 포도 줄기를 들어 입에 넣으려는 순간 오른쪽의 멜론을 입에 한입 물고 있는 소년을 바라보며 서로가 눈길을 마주치는 것으로 맛의 축제를 올리는 것 같이 느껴진다. 즉 ‘식물의 카니발리즘으로 탄생되는 카니발’을 몸서 실천해 보이는 듯이 보여 진다.

식인, 즉 카나발리즘은 먹기에 관한 최대의 금기이지만 동서양의 역사에는 식인에 대한 기록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성체를 받는 성찬 또한 식인의 은유라고 볼 수 있으며, 또 어느 부족에서는 인육을 먹는 관습을 종교의례로 하는 사회도 있었고, 전쟁 중에 심한 기아 때문에 적의 시체를 먹는 전쟁 카니발리즘도 행해졌다. 이렇듯 세계 각지의 식인풍습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한국이 예외 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우리네 식인문화는 효도라는 발상에서 죽음 직전의 부모에게 자기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먹이거나, 허벅지 살을 베어 그 고기를 먹이는 소위 또는 할고(割股)행위 등이 있어 인육을 약으로 삼은 것은 신라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존재했으며, 근래에 와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선생은 자신의 자서전 ‘백범일지’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든 아버지에게 먹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의 아버지도 자신의 어머니 즉 백범의 할머니에게 손가락을 끊어 피를 마시게 해서 사흘을 더 살게 했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카니발리즘을 표현한 화가의 작품으로 그리스 로마신화에 나오는 이야기로 세상의 시작은 어머니 지구(가이아)와 하늘의 신(우라노스)이 짝을 맺었는데 우라노스가 가이아와의 사이에 낳은 티탄들을 지하 세계로 보내버리자 가이아는 복수심에 불타서 막내인 크로노스에게 낫을 주었다. 그 낫으로 크로노스(로마식 표기로는 사투르누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신들의 왕이 되었다. 그런데 아들의 손에 죽게 된 우라노스가 그 아들에게 “네가 나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지만, 그 벌로 너도 네 자식들 손에 의해 죽으리라!”는 저주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그림 2. 루벤스 작 :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 그림 2. 루벤스 작 :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사투르누스는 아버지의 저주가 두려워 자식들을 모조리 잡아먹는 장면을 그린 것이 신화의 카니발리즘 그림으로는 17세기의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가 그린 ‘아들을 먹어 치우는 사투르누스’(1636)가 유명한데 그것은 사투르누스의 광기보다 기겁에 질린 아이의 표정을 집중적으로 표현해 카니발리즘의 실상을 여지없이 나타낸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다.

▲ 그림 3. 제리코 작 : ‘메두사호의 뗏목(초벌 그림)’1818, 파리, 루브르미술관
▲ 그림 3. 제리코 작 : ‘메두사호의 뗏목(초벌 그림)’1818, 파리, 루브르미술관

하지만 미술사에서 가장 유명한 식인사건은 프랑스의 화가 제리코(Jean Louis Andre Theodore Gericault, 1791~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19)이라는 작품이 꼽힌다. 1816년 6월, 세네갈로 향하던 프랑스 해군의 프리깃 함 메두사호가 좌초되었다. 배에 타고 있던 총독과 부관 등 중요 인물들은 구명보트로 도망쳐 나갔지만 나머지 승선인원 149명은 커다란 뗏목으로 옮겨 타야 했다. 표류하는 뗏목 위에서 식량은 곧 떨어졌고 싸움과 자살이 이어지는 착란상태 속에서 기아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시체를 먹게 되었고, 표류 12일째에 가까스로 다른 군함에 견인되어 구출되었을 때 생존자는 불과 12명밖에 안되었다. 제리코는 생존자들을 인터뷰하여 상황을 자세히 들었을 뿐 아니라, 실제 뗏목의 모형을 만들고 병원에서 시체를 스케치하는 등 사건을 정확히 재현하기 위해 그림을 두 장으로 즉 초벌 그림과 완성된 작품으로 나누어 그려 표류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이렇게 공들여 완성한 작품을 1819년 살롱 전에 발표하여 커다란 화제를 불러일으켜 이 사건은 프랑스에서 엄청난 스캔들이 되었다. 이처럼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격변기에 제리코는 비극적인 사건을 냉정 하리만큼 사실적인 기법으로, 때로는 직접화법을 통해, 때로는 상징적 화법을 통해 그림속의 사람들의 몸짓만을 보고도 표류 중에 익사(溺死), 병사, 자살, 발광, 기아사, 심지어는 기아로 인해 죽은 사람의 시신을 먹은 카니발리즘이 있었다는 것을 대변하며 또 이런 상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지체 높은 상류계급은 보트를 타고 구명되었는데, 하류층 사람들은 이렇게 엄청난 고통으로 희생되었음을 폭로하였다.

▲ 그림 4. 제리코 작 : ‘메두사호의 뗏목’1818-19, 파리, 루브르미술관
▲ 그림 4. 제리코 작 : ‘메두사호의 뗏목’1818-19, 파리, 루브르미술관

이 작품은 그가 그린 일련의 대작 시리즈 중에서 최초의 것인데도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마치 획기적인 역사화와 같은 대작으로 엮어, 인간의 극한 상황의 마지막 단계에서는 카니발리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묘사함으로써 평상시에는 상상도 못했던 인식이 궁지에 달하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