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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피난시절 만난 여대생 떠올려 지은 가곡 ‘그리움’

고진숙 詩에 조두남 곡 붙여 1963년 선보여 애창, 1944년 처음 만들어졌으나 가사 바꿔 거듭 태어나

  • 입력 2017.12.18 15:48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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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약 없이 떠나가신 그대를 그리며   
먼 산 위에 흰 구름만 말없이 바라본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오늘도 해는 서산에 걸려 노을만 붉게 타네

귀뚜라미 우는 밤에 언덕에 오르면  
초생 달도 구름 속에 얼굴을 가리운다  
아~ 돌아오라 아~ 못 오시나       
이 밤도 나는 그대를 찾아 어둔 길 달려가네

사람은 누구나 추억과 그리움을 먹고 산다. 두고 온 고향, 떠난 님, 헤어진 가족, 동창생, 전우 등 대상은 다양하다. 그래서 우리 가곡엔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게 많다. 특히 그리움을 소재로 한 게 두드러진다. 그리움이란 제목을 붙인 각기 다른 작사·작곡가의 작품만 수십 곡에 이른다.
국어사전에 ‘그리움’이란 ‘어떤 대상을 좋아하거나 곁에 두고 싶어 하지만 그럴 수 없어 애타는 마음’으로 돼있다. 가곡 ‘그리움’이 그런 내용을 담은 노래다. 애상조의 연가로 중·장년층의 경우 학창시절에 많이 불렀던 곡이다. 한해를 마감하는 연말이면 더욱 생각나는 노래다. 

북한출신 조두남, 20대 후반 작사·작곡
‘그리움’은 고진숙(본명 고봉선, 시인 및 교육자 / 1934년~)이 쓴 시에 작곡가 조두남(1912~1984년)이 곡을 붙인 것이다. 4분의 3박자로 ‘좀 느리게 열정적으로’ 부르도록 돼있다. 이 노래는 조두남이 20대 후반인 1944년 만주(중국 동북지방 하얼빈)에 살 때 처음 작사·작곡한 곡이지만 40대 후반 고 시인이 개사해 태어났다.

조두남은 젊은 시절 자신이 만든 아 노래를 노을 진 저녁이나 외로움이 몰려오는 밤에 그 누군가 이상형의 여인을 그리며 불렀다. 그러나 왠지 맘에 들지 않아 고 시인에게 “가사를 새로 지어달라”고 부탁, 노랫말이 바뀌어 태어난 것이다. 1963년 다시 선보인 ‘그리움’의 노랫말은 고 시인이 6·25전쟁 부산피난시절 3년 연상의 여대생을 생각하며 지은 시에서 비롯됐다. 이 노래는 훗날 조두남의 가곡집 ‘분수’에 실렸다.

그 사연은 이렇다. 6·25전쟁 때 북한에서 마산으로 피난 와 살던 조두남과 같은 북한태생 음악교사 고진숙이 1958년 어느 날 그리움에 관한 이야기로 실의를 달래며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마산이 ‘제2의 고향’으로 타관객지생활을 하고 있던 두 사람은 음악을 연결고리로 친하게 지냈다. 그 자리에서 조두남은 악보를 그려주며 “노랫말이 맘에 들지 않으니 가사를 새로 써 달라”고 부탁했다. 악보를 받은 고 시인은 그리움의 이미지를 담기위해 6·25전쟁 피난시절 헤어진 사람, 그중에서도 얼굴이 유독 하얗던 미모의 한 여대생(한영희)을 떠올렸다.

부산서 대학을 다녔던 고 시인은 부산대학교 사범대 음악과를 졸업했지만 본래는 문학청년이었다. 마침 그의 옆집엔 서울서 대학 2학년까지 다니다 혼자 피난 온 문학도 여대생 한 씨가 살았다. 그녀는 돈을 벌기위해 노동을 하면서도 꿈을 잃지 않고 글을 쓰고 책도 읽었다. 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임에도 취향이 같았던 두 사람은 남매처럼 의지하며 가깝게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과로와 폐병으로 숨지고 말았다.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난 그 여대생의 죽음이 너무나 슬펐던 기억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고 시인은 그녀를 소재로 한 ‘그리움’을 작시(作詩)했다. 시를 받아든 조두남은 만족했고, 노래는 새로운 가사로 거듭 태어났다. 노랫말이 된 시는 하늘나라로 간 여대생에 대한 그리움을 읊은 것이다.

그리운 사람에 대한 공감대가 깊이 오버랩 되면서 노랫말이 바뀐 가곡 ‘그리움’은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61년 5·16군사정변 후 중·고교 음악교과서에까지 실려 애창됐다. 이어 개성출신 성악가 김자경이 처음 녹음하고 김성길 교수(바리톤) 등 여러 음악인들도 연주하면서 대중에게 소개됐다. 음악교사로 활동했던 고 시인은 훗날 옛 제자들과의 만남에서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부산에서 여대생과의 만남) 사랑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노래바람에 조두남-고진숙 더 친해져
노래바람에 조두남과 고진숙은 더 친한 사이가 됐다. 애연가이자 애주가인 조두남은 고진숙이 집에 찾아가면 음악얘기로 밤을 새웠을 만큼 가까웠다. 둘의 만남엔 늘 음악이 바탕에 깔려있었다. 고 씨가 1960년 어느 날 조두남이 작곡한 가곡 ‘선구자’에 대해 “1922년 박태준이 작곡한 노래 ‘순례자’와 비슷하다. 표절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러자 조두남은 “나를 하필 왜 그런 작곡가와 비교하느냐”며 화를 냈다. 박태준과 조두남은 선·후배 사이로 평양과 마산에서 함께 산 적 있다. 조두남은 착하고 꼼꼼하고 정이 많은 성격이었으나 ‘예술에서만은 마산의 황제’란 별명만큼 자존심과 오기가 대단했다. 사람 만나길 좋아했던 그가 생전에 살던 옛 마산시 오동동 39번지 집은 20평이 안 되고 마당도 없었지만 문인, 음악가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1984년 11월 9일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그해 12월 20일 추모음악회를 열었던 게 잘 말해준다.

조두남은 1912년 평양에서 태어나 마산으로 피난온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았다. 평양갑부의 3대 독자로 가톨릭신자인 할아버지와 미국 컬럼비아대를 졸업한 아버지를 둔 가문에서 자랐다. 그는 집에 있는 오르간과 동네 성당의 피아노를 치며 미국인선교사로부터 작곡기초를 배워 음악에 입문했다.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돕던 아버지가 투옥,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21세 때 만주로 떠났다. 유랑시절인 1933년 목단강 부근 여관에서 윤해영을 만난 그는 독립군가 ‘용정의 노래’란 시를 받고 ‘선구자’를 하룻밤새 작곡한 일화가 있다. 그의 학력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독학을 했고 정규음악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숭실전문학교 교수였던 말스베리의 개인지도, 미국인 조셉 캐넌스(Joseph Kennons)로부터 피아노를 배워 작곡을 시작했다. 말스베리의 집에서 안익태, 바이올리니스트 계정식, 작곡가 박태준과 음악활동을 같이 했다. 대표곡은 ‘산도화’(박목월 시), ‘청산별곡’(신석정 시), ‘분수’, ‘뱃노래’, ‘산’, ‘새타령’, ‘옛이야기’ 등과 오페레타 ‘에밀레종’, 교성곡 ‘농촌’ 등 200여곡에 이른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마산지부장, 한국음악협회 고문을 지냈다. 경남문화상, 눌원문화상을 받았다.

고진숙, 음대출신 시인으로 마산고 음악교사 생활
작사가 고진숙은 1934년 황해도 사리원 태생으로 문인(시인)이자 교육자다. 마산고 음악교사 생활 등을 했던 그는 1953년에 동인지 ‘시영토’에 처녀작 ‘학’을 발표한 뒤 1960년 ‘자유문학’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시에 김연준 작곡가(전 한양대 총장, 전 대한일보 사장)가 만든 노래가 ‘석류’ 등 70편이 넘는다. 많은 작곡가들도 그의 시에 멜로디를 붙였다. 1988년 KBS 위촉으로 신작가곡 ‘산에서 부르는 소리’를 작사했다. 이 곡은 그가 17세 때 경북 영천군 고경면에서 요양하던 중 산에서 느낀 감정을 떠올려 지었다. 작곡가 김희조 씨의 두 번째 작품이 됐다. 이처럼 고 시인이 발표한 가곡만도 100여곡에 이른다.

그는 한국음악협회 마산지부장, 예총 마산 부지부장, 마산일보 논설위원, 육군행정학교 및 정훈학교 교수 등을 지냈고 지금은 도서출판 문화한국사 상임고문으로 있다. 시집 ‘꿈에서 깬 이야기’와 ‘음악학습 백과’, 번역서 ‘피아노 학습’, ‘포스터’, ‘요한 시트라우스’ 등의 저서가 있다. [참고문헌 : 가곡의 고향(이향숙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