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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이산가족 슬픈 사연 담긴 가요 '고향무정'

  • 입력 2018.01.12 14:52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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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출신 작사가 김운하, 1966년 설날 이북 5도민 망향제 때 악상(樂想)
젊은 시절 친구아버지 떠올려 작사…북녘고향 그리움 절절해 ‘뭉클’
해남태생 가수 오기택 취입해 대히트…감미로운 음색, 애잔한 리듬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산골짝엔 물이 마르고
기름진 문전옥답 잡초에 묻혀 있네

새들도 집을 찾는 집을 찾는 저산 아래
그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이 있었건만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누가 살고 있는지
바다에는 배만 떠 있고
어부들 노래 소리 멎은 지 오래 일세

김운하 작사, 서영은 작곡, 오기택 노래의 ‘고향무정’은 고향을 그리는 추억의 가요로 유명하다. 설, 추석 등 명절 때면 빠지지 않고 방송전파를 탄다. 4분의 2박자, 트로트리듬으로 정감어린 곡이다. 오기택의 감미로운 음색에 애잔한 리듬이 더해져 월남실향민은 물론 고향을 떠나 삶을 꾸려가는 출향인들 가슴을 적신다.

‘고향무정’ 노랫말은 남북이산가족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지금으로부터 5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6년 설날 북한출신 작사가 김운하가 임진강 부근에서 열린 이북 5도민들 망향제 때의 감흥(感興)과 악상(樂想)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날 흩날리는 눈발 속에 떠오르는 대학(일본 명치대 문학부)동창이자 친한 벗인 김승철의 아버지(김민규 평양 숭실전문대 교수)와 북녘고향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이 절절히 담겼다.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 권유로 월남, 타관객지 신세
김운하와 김승철은 둘 다 북한출신으로 다른 이산가족들과 함께 망향제에 참석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굵어지고 있었지만 실향민들은 조상의 차례모시기에 정성을 쏟았다. 고향생각이 간절했던 김운하는 북녘을 바라보며 타임머신을 타고 그 옛날 북한에 있을 때 김승철과 함께 했던 젊은 시절로 돌아갔다.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떠오른 ‘그 옛날의 장면들’이 영화필름처럼 뚜렷했다.

일제강점기 끝 무렵인 1944년 김승철의 아버지 김 교수는 어수선한 시국을 피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함경북도 웅기)에 와있었다. 어업을 했던 김승철의 집안은 정어리어장과 가공공장을 갖고 있었다. 정어리 떼가 몰려다니는 서수라 바다에서 두만강이 끝나는 국경지대까지 고기잡이를 다녔다. 김 교수는 어부로 변신, 아들과 함께 대학졸업 후 정어리공장 감독관으로 취업한 김운하를 데리고 고깃배를 자주 탔다. 김 교수는 고기를 잡으러 가선 아들과 김운하에게 “일본은 힘의 한계에 부딪혀 강대국에 잡아먹힐 것”이라고 예언했다. 김 교수 말대로 일본은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항복했다.

그러나 광복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북녘 땅은 아수라장이었다. 소련군이 밀고 들어와 만행을 저질렀다. 상황은 일제강점기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마 후 한반도에 38선이 그어졌다. 정국이 어수선하게 돌아가자 김 교수는 자신의 아들과 김운하에게 “서울로 가는 게 좋겠다”며 월남을 권했다. 그래서 김운하는 친구 김승철과 남한으로 왔다. 두 사람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고향땅을 다시 찾을 수 없는 외로운 타관객지 신세가 됐다.

그런 가운데 김운하가 망향제 때 머리에 떠오른 과거 친구아버지와의 만남, 그림처럼 펼쳐지는 북녘 고향 모습, 젊은 시절 고기잡이 갔던 추억 등을 노랫말로 써서 만든 노래가 오기택의 히트곡 ‘고향무정’이다. 1968년엔 같은 제목의 영화 ‘고향무정’도 만들어졌다. 박종호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남진, 문희가 남녀주인공을 맡아 열연한 합동영화사 제품이다.
 
오기택, ‘한류스타 원조’…오랜 투병생활
‘고향무정’을 부른 저음가수 오기택은 전남 해남태생으로 서울 성동공고, 동아예술전문학교를 나와 가수의 길로 들어섰다. 1961년 KBS 주최 제1회 직장인콩쿠르대회에서 1등을 해 1962년 ‘영등포의 밤’을 취입, 가수로 데뷔한 것이다. ‘등대지기’, ‘남산 블루스’, ‘우중의 여인’, ‘아빠의 청춘’, ‘마도로스 박’, ‘비 내리는 판문점’ 등 히트곡들을 불렀다. ‘저음의 마법사’로 불리며 뛰어난 가창력에서 쏟아내는 성량과 감미로운 음색은 팬들을 사로잡았다. 

1962년 가수데뷔 초기에 불렀던 ‘영등포의 밤’과 ‘등대지기’는 절창으로 인기가 대단했다. 수입이 좋아 서울 충무로 스카라극장(현재 아시아경제신문 사옥) 앞에만 가면 악단장들이 “지방공연을 가자”며 돈 봉투를 건넸다. 잘 나갈 땐 하루에 밤무대 6~7곳을 뛰었다. 그는 일본서도 대박을 낸 ‘한류스타 원조’다. ‘영등포의 밤’으로 폭발적 인기를 끈 그는 해병대 제대 후 부른 ‘고향무정’ 등 부르는 노래마다 히트했다. 

파산직전의 한 음반회사는 오기택을 전속가수로 데뷔시키며 다시 일어섰다는 일화가 있다.  그렇게 잘 나갔던 그에게도 아픈 시절이 있었다. 1960년대 중반 한 라디오방송프로그램에서 DJ가 잘못된 정보를 말해 위기를 맞았다. 볼링에 빠져 서울 워커힐호텔에 연습을 하러다닐 때로 “오기택이 노름에 빠져 호텔카지노에 다니는 사실이 알려져 더 이상 그의 노래를 틀지 못 한다”고 멘트를 한 것이다. 찻집에서 해당 프로그램 PD를 만났으나 상황이 풀리기는커녕 더 악화돼 방송활동이 모두 끊겼다. 그는 활동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7년간 우리나라를 오가며 노래를 불렀다. 인기는 국내보다 더했고 돈도 많이 벌었다. 그는 ‘아빠의 청춘’이 크게 히트하면서 국내 방송에 다시 출연하게 됐다.

2007년부터 해마다 10월이면 그의 고향 해남에선 ‘오기택 가요제’가 열린다. 고향후배들이 ‘의리의 사나이’ 선배이름을 내건 행사다. 1980~1982년엔 사단법인 한국연예협회 제10대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았던 오기택은 가수들이 불합리한 일을 당하면 해결에 앞장섰다. 밤무대공연을 갔다가 일행을 괴롭히는 조직이 있으면 앞장서 막았다. 골프실력도 프로급이다.

그는 요즘 오랜 투병생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3년 8월 흡인성 폐렴에 걸린 데다 중풍 증세까지 겹쳐 요양병원 등지에서 치료 중이다. 위기는 넘겼지만 거동이 불편하다. 그에 앞서 1997년 1월 제주 추자도 옆 무인도(염섬)로 낚시를 갔다가 뇌출혈로 119에 구조돼 뇌수술을 받고 휠체어신세가 됐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건강회복에 힘쓰고 있다. 침, 뜸, 물리치료를 하고 자전거도 탄다. 1998년엔 작곡가 김희갑이 쓴 ‘자네 누군가’ 등의 노래가 실린 음반을 냈다. 그는 호적상 1943년 4월 2일생이지만 실제는 1939년생이다.

작곡가 서영은, ‘살살이’ 서영춘 맏형
작곡가 서영은(1927~1989년)은 ‘노신사’(최희준), ‘밤하늘의 연가’·‘환상’·‘그대의 미소’(차중락), ‘뜨거운 안녕’(쟈니 리), ‘강물 따라서’(김세레나), ‘잊혀진 여인’(임희숙), ‘부모’(유주용) 등 1000여곡을 작곡한 유명음악인이다. 코미디언 ‘살살이’ 서영춘(1928~1986년)의 맏형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코미디언이었던 동생 3명(영춘, 영수, 영환)을 끌어주고 뒷받침했다. 더욱이 10대였던 딸(서지숙)을 가수로 키우기 위해 4인조 그룹 ‘조커스’를 결성, 활동하게 했다. 일곱장의 연예인가족음반을 시리즈로 내기도 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7집 앨범에 담긴 ‘어머니의 눈물’이 일본에서 주목받으며 딸과 함께 현지에서 활동하기 시작했다. 딸은 15살 때 NHK ‘신인선발대회’에서 입상할 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

서 작곡가는 일본에 있을 때 재일교포에게 조국에 대한 개념을 일깨우기 위해 ‘아름다운 한국’을 작사·작곡해 나훈아에게 무료취입을 부탁, 일본전역에 보급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했던 그는 1989년 일본 동경의대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고향무정’ 노랫말을 쓴 김운하(1914~1978년, 본명 김득봉)는 이북출신으로 해방 후 세관에 다니다 은행원에서 작사가로 변신해 성공한 음악인이다. 서울 명동에 있는 은행지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항구의 청춘시’(남인수), ‘눈물의 청춘’(이인권), ‘물새야 왜 우느냐’(손인호), ‘임이라 부르리까’(이미자), ‘충청도 아줌마’(오기택), ‘서산 갯마을’(조미미), ‘금산 아가씨’(김하정), ‘내 고향 금산’(김부자), ‘병사의 향수’(최희준) 등의 노랫말을 썼다. 주로 OK레코드에서 활동한 그는 ‘무인도’란 필명으로도 노랫말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