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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이치’라고 부르는 것 Ⅰ

  • 입력 2018.02.08 12:00
  • 수정 2018.02.08 12:16
  • 기자명 전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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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렇게 돌아간다고 하여 내가 ‘세상의 이치’라고 이름 붙이고 환자 치료에 이용하고 있는 것은 불교로부터 온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업인과보설(業因果報說) 또는 업설(業說)이라고 부릅니다. 불교 공부를 통해 업인과보설을 알았을 때 ‘아, 이렇게 세상이 돌아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후 내 나름대로 세상을 관찰해 보니 이 업설에 아무런 하자가 없다는 것을 알았고, 지금껏 이것이 진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불교적으로는 이미 진리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업설을 통해 세상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세상을 잘 모를 때 오는 고통이 많이 줄면서 세상사는 것이 편해졌습니다. 내 자신이 고통을 느낄 때, 세상의 이치에 맞지 않는 나 자신만의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부터, 괴로울 때는 항상 나를 돌아보고 나 자신을 바꾸어 나갔습니다. 이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불교로부터 큰 도움을 받았듯이 환자들도 불교적 지혜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환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불교적 지혜는 보편적인 진리가 되어야 합니다. 굳이 불교라는 말을 쓰지 않고도 불교적 진리의 내용을 말했을 때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살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20년 이상 관찰하여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 나에게는 조금의 의심도 없고, 이 ‘세상의 이치’를 들은 사람이 듣고 이해가 안 되어 제기하는 의문에 대하여 내 나름대로 충분히 그 의문을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환자들에게 설명하는 ‘세상의 이치’는 불교의 업설을 근간으로 하여 그동안 내가 체득한 것입니다.

환자들에게 ‘세상의 이치’를 설명할 때는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서 가장 적절한 때에 하려고 노력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적절한 때에 할 때 부작용이 없고 효과가 가장 큽니다. 정신치료는 특히 그렇습니다. 세상의 이치에 대해 설명을 할 때도 강의하듯이 일방적으로 하지 않고 내가 질문을 하면서 진행하여 환자로 하여금 생각하게끔 하고 환자가 설명을 듣고 조금이라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으면 언제라고 질문하게 합니다.

■ 우리는 ‘나’인 동시에 ‘남’이다

이제 세상의 이치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많은 것들이 존재합니다.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도 있고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속성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과 생명을 가지고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입니다. 이 둘은 근본적으로 속성이 다릅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은 그 크기가 크던 작던 속성이 똑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가진 존재도 그 크기나 복잡성에 관계없이 동일한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은 어떤 것이든지 자연법칙(물리법칙)을 따릅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은 생명을 가지지 않아 자체의 의지가 없으니까 자기에게 가해진 외부의 영향에 대해 법칙대로만 반응합니다. 주어진 조건에 따라 움직입니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2008년 우리나라 첫 우주인 김소연 씨를 태우고 우주선 하나가 하늘로 날아갔습니다. 하지만 우주선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본다고 더 잘 날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발사할 당시의 조건에 따라 발사가 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겁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 움직이는 원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똑같습니다. 이에 반해 생명을 가진 존재는 크던 작던, 복잡하던 단순하던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가해진 자극에 나름대로 반응합니다. 어떻게 반응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제 세상이 복잡한 것 같아도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 자연법칙(물리법칙)을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으니 반은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연법칙도 대단한 지혜입니다. 자연법칙이 알려진 것은 불과 몇 천 년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잉여농산물이 생겼고, 그 잉여농산물로 인해 일부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하는데 전념하면서 자연은 법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사실 자연법칙을 모를 때 인간은 자연현상에 대해 두려워했습니다.

인간은 약하고 자연은 강합니다. 강한 것에 정신이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많은 종류의 자연신이 생겨났습니다. 태양신이 대표적인 자연신입니다. 이제 이런 자연신들은 사라졌습니다. 자연 현상을 잘 관찰하고 그에 대비하기는 하지만 더 이상 자연에게 정신이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제 세상이 반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나머지 반을 차지하는 생명을 가진 존재들도 이처럼 분명해진다면 그에 맞게 우리는 살면 됩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도 속성에 따라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무엇과 무엇으로 나누어질 수 있을까요. 답을 알려면 먼저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속성에 따라 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누구나 다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이 암 진단을 받으면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암 진단을 받으면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낍니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아메바 등 모든 생명 가진 존재는 자기 자신을 세상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생명을 가진 존재들의 특성입니다. 이 속성에 따라 생명을 가진 존재는 나와 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명을 가진 존재의 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따라서 셀 수 없을 정도의 ‘나’가 있습니다. ‘나’가 아닌 다른 생명 가진 존재는 ‘남’입니다. 우리는 ‘나’인 동시에 다른 ‘나’에게는 ‘남’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제 세상이 좀 더 명확해졌습니다. 세상은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나’와 나와 같이 생명은 가졌지만 내가 아닌 ‘남’과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라는 중요한 세계와 그 주위를 마치 위성처럼 둘러싸고 있는 ‘남’과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들로 이 세상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세계의 무수히 많은 ‘나’는 이 세계의 중심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면 우리는 좀 더 겸손해지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나’가 있다

지금까지 앞으로 전개될 중요한 이야기의 준비 작업을 했습니다. 이 세상을 자세히 보면 ‘나’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 사이에 그리고 ‘나’와 ‘남’ 사이에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가만히 있거나 덜 활동하면 죽거나 괴로움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에 살아있는 동안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야만 합니다. 나와 생명이 없는 것들과의 대표적인 상호작용은 숨 쉬는 것입니다. 공기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들이마시고 다시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을 바깥으로 내보냅니다. 나와 남과의 대표적인 상호작용은 아기와 엄마와의 상호작용입니다. 아기는 배가 고프면 웁니다. 그러면 엄마는 먹을 것을 줍니다. 이처럼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 하루에도 무수한 상호작용을 합니다. 이때 나와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과의 상호작용은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어 법칙대로 하려고 합니다. 문제는 나와 남과의 상호작용에 대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는 법칙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기에게만 이득이 되게끔 하려고 애를 씁니다. 일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 안 풀리면 억울해하고 재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신과 환자들은 대부분의 경우 억울한 감정을 가지고 있고, 대인관계에서 자신이 손해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고,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해하고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봅니다.

생명을 가지지 않은 것이 자연법칙을 따르듯이 나와 남 사이에도 법칙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면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적절하게 행동함으로써 억울해하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일이 있을 때 원인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올바르게 대처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도 정확한 원인 파악과 올바른 해결 방법을 가장 중시합니다. 정신치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와 남과의 상호작용을 보겠습니다.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나도 위하고 상대도 위하는 행동이 있고, 나는 위하지만 상대에게는 해가 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이때 상대를 위하는지 해하는지는 상대가 판단하는 것입니다. 나는 상대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한 행동을, 상대는 자신에게는 해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입장이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가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 알아보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판단입니다. 나도 위하고 상대도 위하는 행동은 순조롭습니다. 그러니까 즐겁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롭지만 남에게 해가 되는 행동은 저항을 불러옵니다. 그러니까 괴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진행됩니다. 이것이 바로 법칙입니다. 이것을 법칙화하기 위해 용어를 써서 정리하면, 나와 남 둘 다 이로운 것을 선(善), 나는 이롭지만 남에게는 해가 되는 것을 악(惡), 순조로운 것을 낙(樂)이라고 하고 저항이 있는 것을 고(苦)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선인락과(善因樂果) 악인고과(惡因苦果)입니다. 선한 원인에는 즐거운 결과가 있고 악한 원인에는 괴로운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이 법칙입니다. 이 법칙을 사회법칙 또는 윤리법칙이라고 합니다.

이 법칙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 알고 지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사람이 있고, 봐야 아는 사람이 있고,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렸지만 같이 지냈던 일을 이야기하면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숫자가 많은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내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판단한 내가 들어 있습니다. 상호작용을 하면서 남에 의하여 판단된 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좋게 판단했으면 좋게 그 사람들 속에 들어 있을 것이고, 안 좋게 판단했으면 안 좋게 들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미 영향을 미친 것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언젠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한 행동은 그렇게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는 좋은 친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 있고, 나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면 나는 적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거에 입후보한 정치인인 경우 유권자들 마음속에 어떻게 들어 있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판단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주위의 사람들을 항상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그렇게 판단된 사람들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 마음속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마음속에 어떻게 들어 있을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