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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고향의 그리움 담은 서정적 가요 ‘고향설’

  • 입력 2018.02.14 11:45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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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우리 가요들 중엔 고향과 지방을 소재로 한 게 많다.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농촌출신들이 도시로 나가 살거나 학업, 결혼, 사업 등으로 고향을 떠난 이들이 많아서다. 특히 경제개발시대인 1960~1980년대 출향인(出鄕人)들이 줄을 이었다. 설날 등 명절을 앞두고 민족대이동이랄 만큼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방송과 공연에선 고향소재 노래를 많이 들려준다.

눈이 올 때면 떠오르는 고향소재 노래가 하나 있다. 김다인 작사, 이봉룡(李鳳龍) 작곡, 백년설이 부른 추억의 전통가요 ‘고향설(故鄕雪)’이다. 제목 그대로 풀어보면 ‘고향 눈’이다. 우리가 나고 자란 곳에 내리는 눈이란 것이다. 이 노래는 작사가가 월북했다는 이유로 한 때 방송금지곡이 되기도 했다.

■ 노래 시대배경은 일제강점기(1941년 정초)

이 노래는 4분의 2박자 트로트(Trot)풍으로 서정적인 맛이 난다. 노래가 만들어진 시대배경은 일제강점기 때다. 1941년 정초 ‘고향설’ 작사가 김다인(본명 조영출, 필명 조명암)은 서울 서대문 쪽 당시 동양극장에서 창밖에 내리는 함박눈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아침부터 쏟아진 눈은 저녁에 이르러 장안을 하얗게 뒤덮었다. 김다인은 갑자기 만주에 있는 동갑내기 삼촌(김길호) 생각이 떠올랐다.

삼촌과 나이가 같게 된 사연이 있다. 늦게 막내아들을 본 김다인의 할아버지와 일찍 장가를 든 아버지는 한 집에서 살았다. 그런데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같은 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각각 아들을 낳은 것이다. 그래서 김다인은 길호 삼촌과 동갑으로 한 학교에 다니며 친구처럼 지냈다. 동기동창인 둘은 학창시절 1, 2등 다투면서 고등보통학교까지 한 반에서 다녔다.

그러나 삼촌은 졸업 후 동경유학을 조카에게 양보하고 만주로 떠났다. “학비마련에 어려움을 겪을 조카를 위해 장사를 하겠다”며 어느 날 새벽 김다인이 자고 있는 방에 메모쪽지를 밀어 넣고 북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길호 삼촌이 독립투사로 활동한다는 것을 김다인이 알게 된 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경찰에 잡혀가면서였다.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김다인은 삼촌 기질이나 성격으로 볼 때 충분히 그런 일을 할 분이라고 생각했다. 길호 삼촌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1939년 2월 중국 광서성 유주에서 만들어진 광복전선 청년공작대원으로 활약 중이었다. 김다인 할아버지는 독립투사 아들 때문에 경찰서에서 고문을 받다 별세했다. 일본경찰의 추적은 끈질겨 동경유학생인 김다인까지 감시했다. 미행은 물론 하숙방을 수시로 뒤졌다.

그런 가운데 삼촌이 집을 떠난 지 7년째 되는 어느 날 아침이었다. 비좁은 전차 안에서 누가 종이쪽지를 손에 쥐어주었다. 순간 길호 삼촌 얼굴이 떠오르고 스치는 감이 있었다. 김다인은 급히 다음 정류장에 내렸다. 경찰로부터 미행당할까봐 골목길을 돌아 찻집에 들어갔다. 화장실에서 펼쳐본 쪽지엔 삼촌 글이 적혀있었다. “날씨가 추워 동상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약을 구할 수 있으면 쪽지를 준 사람 편으로 보내 달라”는 내용이었다. 김다인은 그 사람을 만날 날짜, 시간, 장소를 외우고 쪽지를 태워버렸다.

그때 김다인은 자신도 모르게 “아~ 길호 삼촌!” 하면서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김다인은 눈을 좋아했던 삼촌과의 어린 시절이 떠올라 ‘고향설’ 노랫말을 썼다. ‘한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이요 / 두 송이 눈을 봐도 고향 눈일세~’로 나가는 가사를 쓰는 동안 창밖엔 함박눈이 종일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가사는 작곡가 이봉룡에게 넘어가 악보가 완성, 밀양출신가수 백년설이 취입했다.

■ 월북한 김다인, 1993년 80세로 별세

1913년 충남 아산서 태어난 김다인은 1930년 초기부터 극작과 시, 가사를 썼다. 이어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 등단했다. 시가(詩歌·노래시)부문에선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상하기도 했다. 그가 쓴 가사로 태어난 노래는 대표작 ‘낙화유수’를 비롯해 아주 많다. ‘목포는 항구다’, ‘선창’, ‘꿈꾸는 백마강’, ‘알뜰한 당신’, ‘진주라 천리길’, ‘서귀포 70리’, ‘울며 헤진 부산항’, ‘꼬집힌 풋사랑’, ‘초립동’, ‘바다의 교향시’, ‘고향초’ 등 명가요들이 수두룩하다. 김다인은 박시춘, 손목인과 함께 ‘국내 대중음악 3대 천재’로 불렸다. 일제말엽 친일군가 노랫말을 많이 쓴 그는 1947년 친일파재판이 한창일 때 북한으로 넘어가 1993년까지 살다 80세 때 세상을 떠났다. 강원 고성군 건봉사엔 고인의 노래비가 있다.

‘고향설’ 곡을 만든 이봉룡은 1914년 8월 목포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봉용(李鳳用). 예명과 발음이 비슷하다. 가수 이난영의 오빠다. 그는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전수학교를 졸업했으나 집이 가난해 어려서부터 목포의 솜공장에서 일했고 극장의 영사기 조수로도 일했다. 음악적 소질이 있어 1937년 오케레코드에서 가수로 데뷔, 1938년까지 ‘고향은 부른다’ 등 4곡을 음반으로 냈다. 그 무렵 매부 김해송으로부터 음악이론을 배워 드럼연주를 시작, 1938년 오케레코드 전속 C.M.C(조선음악구락부)악단에서 연주자로 일했다.

비슷한 때 작곡가로도 데뷔해 1938년 10월 발표한 ‘병든 장미’를 비롯해 ‘아주까리 등불’, ‘고향설’, ‘낙화유수’, ‘목포는 항구다’, ‘달도 하나 해도 하나’, ‘판문점의 달밤’, ‘김치깍두기’, ‘눈 감아 드리오리’ 등을 작곡했다. 1956년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뽑혔다. 1958년엔 센추리레코드 전속작곡가로 있었으며 1961년부터는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기도 했다. 1969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면서 음악활동을 접었다. 1986년 잠시 귀국해 여관에서 생활하다 1987년 1월 9일 별세했다.

■ 백년설, 가수 겸 작사가·사업가로 활동

‘고향설’을 취입한 백년설도 얘기가 많은 음악인이다. 1915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이갑룡(李甲龍). 1964년 이창민으로 바꿨으나 예명 백년설이 더 잘 알려져 있다. 작사가로선 향노(鄕奴), 이향노(李鄕奴) 등을 썼다. 성주공립보통학교 졸업(1928년), 성주농업보습학교 졸업(1931년) 후 상경해 한양부기학교에서 2년간 공부한 뒤 은행, 신문사에서 잠시 일했다. 1938년 문학을 공부하기위해 일본에 갔으나 고베(神戶)에서 태평레코드사 문예부장 박영호 권유로 ‘유랑극단’(전기현 작곡)을 취입, 가수로 데뷔해 인기였다. 1941년 태평레코드사와 전속계약을 맺고 ‘나그네 설움’ 등을 유행시키며 당대 최고인기가수대열에 끼었다. 일제는 그를 침략전쟁선전에 이용했다. 1942년 그가 취입한 ‘모자상봉’은 일본군국가요를 번안한 것이다. 해방 뒤엔 태평양악극단, 악단 제일선, 무궁화악극단 등의 공연단체와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고아원 운영, 사업체 경영에 더 힘썼다. 1956년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감사?평화신문사 사업국장, 1958년엔 센추리레코드사 문예부장 등 사업에도 손댔다. 대표곡으로 ‘두견화사랑’,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복지만리’, ‘대지의 항구’ 등이 있다. 1955년 여가수 심연옥과 재혼한 그는 1963년 가수은퇴를 선언, 1978년 9월 자식들 초청으로 미국 LA로 가서 투병하다 1980년 12월 6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