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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둥글고 평평한

  • 입력 2018.04.18 15:00
  • 기자명 홍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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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둥글고 평평한 내 접시에는

그리움 서러움 같이 물기 있는 것들은
많이 담을 수 없고

기다림 고마움 같이 꼬들꼬들한 것들은
수북이 담을 수 있지

함께 버무려져 있는 곰삭은 지난날과
다가오는 날의 떨리는 징후들로
물들여진 탓인지

비워도 비워도 번번이 같은 것만 담고 있는
작고 둥글고 평평한 접시

[엠디저널]올해 한국의사시인회는 공동시집 제6집을 준비하고 있다. 예정대로 출간된다면 6월에는 시집이 나와 출판기념회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저명한 평론가나 시인으로부터 평론이나 발문을 받아 실었는데, 올해는 시인들 자신의 시론을 짧은 산문으로 받아 시와 함께 싣기로 했다.

시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적은 글이니 시인의 말, 혹은 시작 노트라고 해도 괜찮았을 텐데 시론이라는 말에 부담을 느끼시는지 회원들의 원고가 아직은 많이 들어오지 않았다. 스스로 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시가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가지는지 돌아보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막상 시론이라는 이름으로 산문을 쓰려니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시인에게 왜 ‘시를 쓰는가’ 하는 질문이나 ‘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라는 질문은 대답하기 민망한 질문 중 하나이다. 우리가 왜 사는지, 삶의 이유와 목표를 뚜렷하게 인식하지 않은 채 그냥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도 그와 같은 심경을 느끼며 산문을 쓰기 전에 습관처럼 먼저 시로 표현해 보았다.

내 시를 좋아해주는 오랜 친구는 내 시가 더 발전하려면 깊이 있고 폭넓은 독서가 필요하겠다고 진단을 붙였다. 그 친구는 대학 병원 외과 교수님이신데 칼을 쓰는 분답게 예리한 눈으로 정확한 진단을 내려주신 것이다. 스스로 생각해도 내 시는 묵직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처 없는 독자의 마음을 오래도록 잡아둘 수 있으려면 닻의 역할을 감당할 정도로 무게감이 있어야할 터인데 내 시는 가벼운 편이다.

또 다른 분은 성경을 읽으면 내 시가 더 깊고 거룩해질 것이라고 조언을 주셨다. 고마운 말씀이지만 만약 종교를 가지게 된다면 불교에 귀의하게 될 것 같은 불교 친화적 환경에서 살고 있으므로 성경읽기는 나에게 쉽지 않은 숙제다.

주변의 평가와 스스로의 평가가 일치하는 바와 같이 내 시는 많은 것을 담지 못하고 소소한 신변잡기적 심경만을 담고 있다. 그릇으로 비유하자면 음식을 먹을 만큼만 조금씩 덜어 놓는 작고 둥글고 평평한 앞접시 같다고 할 수 있겠다.

사람도 그릇으로 비유할 수 있다. 물론 가죽자루로 표현하는 시인들도 많다. 어느 경우든 무엇을 담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같은 비유로 보인다. 좋은 생각과 기운이 가득 담겨서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기가 느껴질 수도 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내용물이 변질되면 고약한 냄새를 풍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 수필 동인 박달회 모임에서 위 시를 낭송해 드렸더니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장님이 ‘접시가 시인 자신처럼 느껴진다’고 평했다. 이분도 역시 번뜩이는 눈매의 칼잡이에 속하시는 분이다.

사람도 그릇이듯이 시도 사람의 생각을 담는 그릇일 수밖에 없다. 나의 생각과 느낌을 담는 내 시는 나를 닮아 작고 모나지 않고 평평한 모양의 접시라고 생각된다. 많이 담을 수 없어 안타까운 점도 있지만 그나마 깨지지 않고 오래오래 생각과 느낌을 담는 그릇 노릇을 할 수 있기를 빌고 있다. 오래 사용해서 그런지 무엇엔가 물들은 듯 얼룩이 생기고 독특한 냄새가 밴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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