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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꽃에 비유한 노래 ‘산유화(山有花)’

미성(美聲)가수 남인수 히트곡…‘한국가요의 3대 명곡’ 꼽혀/ ‘산유화(山有花)’는 갖가지 꽃들을 뭉떵 그려 일컫는 상징어

  • 입력 2018.04.20 14:08
  • 기자명 왕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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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님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만은 님은 어이 못 오시는가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에 산에 꽃이 지네 들에 들에 꽃이 지네
꽃은 지면 피련만은 내 마음은 언제 피나
가는 봄이 무심하냐 지는 꽃이 무심 하더냐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엠디저널]반야월 작사, 이재호 작곡, 남인수 노래의 ‘산유화(山有花)’는 얼핏 들으면 가곡 같다. 1956년 만들어진 이 노래는 대중가요이면서도 노랫말이 시를 읊조리는 느낌이 든다. 62년이 지난 곡임에도 그렇게 묵은 맛이 안 난다. 유성기음반으로 들어보는 ‘산유화’는 한 편의 가요가 아니라 격조 높은 성악곡을 듣는 듯 예술성으로 새롭게 다가온다. 고대원, 조용필, 태진아, 조항조 등 후배가수들이 리메이크해 취입했을 정도로 대히트곡이다. 노래를 첫 취입한 미성(美聲)가수 남인수의 창법은 통곡과 절규처럼 들린다.

김소월의 시 ‘산유화’를 떠올리게 하는 이 노래는 여러 우여곡절로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모든 생령(生靈)을 흐느낌으로 달래고 애틋했던 존재들을 더듬는 분위기다. 김소월 시 ‘산유화’는 1925년 간행된 시집(‘진달래꽃’)에 실렸다. 꽃이 피고 지는 단순한 현상으로 자연의 질서를 나타내고 있다. 자연 순환원리를 미적으로 통제된 어조로 그려낸 것이다. ‘피네’, ‘지네’와 같은 종결어미에 스민 감정이 지나치지 않고 잘 어우러져있는 점을 통해 잘 나타난다. 노래제목 ‘산유화’는 특정 꽃 이름이 아니다. 이 산 저 산에 피는 갖가지 꽃들을 뭉떵 그려 일컫는다. 일종의 상징어다.

노래가 담긴 음반을 들어보면 앞부분의 대사가 특이하다. “어느 때는 그 역사의 물굽이에서 지는 해 뜨는 달 바라보며 울기도 했고, 어느 때는 그 역사의 산굽이에서 어여쁜 꽃송이를 쓸어안고 웃기도 했습니다. 인간의 역사가 그렇듯이 노래의 역사 또한 기쁨이요, 슬픔이요, 설움이요, 즐거움이었습니다.”

■ 남인수 공연 때 단골 앙코르곡

가수 진방남에서 작사가로 입지를 굳힌 경남 마산출신 반야월(본명 박창오, 1917∼2012년)이 소월의 시에서 빌려온 듯한 노랫말을 짓고 당시 최고작곡가 이재호가 4분의 3박자 슬로우 왈츠로 완성도 높은 곡을 만들었다. 더욱이 맑고 깨끗한 목소리의 남인수가 클래식창법으로 불러 명곡 반열에 올려놨다. 두 사람은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가수와 작곡가로 만나 이 노래를 선보였다. 남인수의 어릴 적 꿈이 성악가여서 그런지 깊이 있게 들리면서 가락이 맛깔스럽다. 그의 노래 중 가장 성악곡처럼 들린다는 게 가요평론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가요의 3대 명곡’(황성옛터, 목포의 눈물, 산유화)이란 평을 들을 만큼 높은 점수를 받았다. 1000여곡을 부른 남인수는 공연 때 앙코르를 받으면 ‘산유화’를 곧잘 불렀다. 그만큼 이 노래를 좋아한 것이다.

‘산유화’ 작곡가 이재호(본명 이삼동, 1919∼1960년)는 진주출신으로 일본고등음악학교 본과(바이올린) 2학년을 수료하고 폐결핵이 악화돼 고향에서 휴양 중 태평레코드사에 관계하는 친구소개로 가요작곡을 했다. 1943년 이후 전시체제로 물자가 없어 음반제작이 부진해지자 태평레코드사의 전국순회공연무대에서 연주단을 지휘했다. 1945년 광복 후 고향 진주에서 중학교 음악교사로 일했다. 1949년 이후엔 대구, 부산에서 ‘귀국선’, ‘아네모네 탄식’을 발표했다. 6·25전쟁 중 KBS 부산방송국 악단장으로 활동했던 그는 4·19혁명 직후 지병이 악화돼 미발표곡들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가요 ‘산유화’는 다른 문화·예술장르로 거듭나 민초들 귀와 눈을 즐겁게 했다. 같은 제목의 가곡(1945년), 연극(1955년), 영화(1966년), 드라마(1983년), 소설(1984년, 정비석), TV소설 드라마(1987년 KBS-1TV)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모았다. 백제유민들이 나라가 망함을 서러워해 ‘산유화가’, ‘산유화곡’을 지어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부여엔 ‘산유화’ 이름이 붙은 노래들이 많다. ‘산유화’는 백제말기 만들어진 노동요의 하나로 입으로 이어져오다 조선후기에 수집된 민요이기도 하다.

가곡 ‘산유화’는 작곡가 김성태(1910년 11월 9일~2012년 4월 21일)의 대표작이자 1940년대 우리나라 대표가곡 중 하나다. 우리의 전통예술에서 찾을 수 있는 여백미와 정·중·동의 멋을 나타냈다. 우리 고유의 5음계와 민요적 장단을 소재로 ‘민요풍으로 아름답게’란 악상을 갖고 있다. 그의 월북으로 발표금지곡이 됐으나 1988년 10월 정부의 ‘월북음악가 작품규제 해제조치’로 풀렸다. 드라마 ‘산유화’는 1983년 2월 21일~1983년 9월 23일 KBS-2TV를 통해 매주 월~금요일 밤 시간에 방영됐다.

■ 18세 때 가수 데뷔…44세 때 폐결핵으로 별세

‘산유화’ 노래를 부른 남인수는 1918년 10월 18일 경남 하동서 태어났다. 원이름은 최창수(崔昌洙)지만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개가한 어머니(장하방)를 따라 진주 강 씨 문중으로 들어가 호적명이 강문수(姜文秀)로 바뀌었다. 그러다 가수데뷔 후 작사가 강사랑에 의해 남인수란 예명을 쓰게 됐다. 진주는 남인수의 제2고향이자 성장지다. 작곡가 손목인, 이재호, 이봉조 등 예능 쪽 명인들이 많이 나온 고장이다. 제2공립심상소학교(진주봉래초등학교)를 나온 남인수는 어릴 때 힘든 삶을 살았다. 가난과 구박에 못 이겨 일본으로 가 전구공장에서 일했고 떠돌이 소년노동자생활도 이어졌다. 10대 후반엔 제철공장에서 일하던 중 노래실력이 뛰어나 여러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가수 꿈을 키웠다.

그는 1935년 상경, 씨에론레코드사에서 작곡가 박시춘, 작사가이던 문예부장 박영호와 만나 가수가 됐다. 1936년 18세 때로 ‘눈물의 해협’(김상화 작사, 박시춘 작곡)을 첫 취입했다. 대한가수협회 초대회장(1958년), 전국공연단체연합회장(1960년), 한국연예협회 부이사장(1961년 12월) 등을 지냈다. 1960년 이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불효자는 떠납니다’, 1960년 4.19의거로 희생된 학생들 추모곡 ‘사월의 깃발’, 병상에서 취입한 ‘눈감아 드리오리’가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해 이채롭다.

그는 1939년 4월 7일 김은하와 결혼, 2남2녀(맏딸-명자, 둘째딸-명주, 큰아들-대우, 둘째아들-대익)를 뒀다. 44세 때인 1962년 6월 26일 폐결핵으로 별세한 남인수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목포출신 여가수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눈을 감았다. ‘가요황제’로 불렸던 그의 일대기와 함께 이난영과의 러브스토리를 담은 ‘이 강산 낙화유수’(1969년) 영화도 만들어졌다. 2001년 6월 26일 남인수 선생 타계 39주년 기념으로 진양호 안에 남인수 동상이 제막됐다. 진주시 하촌동 195번지에 남인수 선생 생가가 있고 진주시 장재동 산 49번지에 강씨문중 소유인 남인수 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