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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이라는 말


청주에 계신 박권수 시인이 한국의사시인회 공동시집 제4집에 ‘너만 이라는 말’이라는 제목의 시를 실었다. 고모님이 포도 쥬스 한 봉지를 주고 가시며, 집사람도 주지 말고, 애들도 주지 말고 너만, 잘 챙겨 먹으라고 하신 말씀이 재미있어 그 말에 기대 혼자 웃었다는 내용이다. 고모님 입장에서 볼 때 조카며느리보다도, 손자뻘 되는 아이보다도, 자신의 친 조카에게 정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광주 보훈병원 심장혈관센터장으로 계시는 김완 시인도 자신의 제2시집 『너덜겅 편지』에 ‘꼭 이라는 말’이라는 시를 실었다. 이번 가을엔 꼭 함께 여행가자는 말은 꿈같이 달콤하기도 하고 안타깝고 간절하기도 하다는 내용이었는데, 간절히 간절히 바라지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이렇듯 어떤 말이 어느 순간 굉장한 울림을 전해주는 경우를 많은 사람들이 한 번 쯤은 경험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나의 경우에는 ‘별일’이라는 말이 그랬다.

고향에 계신 어머니는 한두 달에 한 번씩 서울 나들이 겸, 세브란스병원 안과 진료를 받으러 오시면 나의 클리닉에도 들르셔서 귀도 보고 가시는데, 늘 ‘별일 없지?’하고 물으신다. 가끔 뵙는 형님도 ‘홍 원장, 별일 없는가?’하고 물으시고, 개원의사회 일로 늘 바쁜 선배 한 분도 만나면 ‘별일 없지?’하고 묻곤 한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유독 별일 이라는 단어가 번개 치듯이 번쩍이는 느낌이다. 신변에 알고 지내야 할 새로운 일이 있느냐는 안부인사로 건네는 말인 줄 알면서도 좋은 쪽 보다는 험한 일들을 연상해 보기 때문일 것이다. 얼른, 별일 없다고 답하면서도, 과연 나는 별일 없이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기도 하고, 세상 사람들의 운명을 관장하시는 분이 ‘너는 앞으로도 내내 별일이 없을 거야’하고 확정 판결을 내려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도 생긴다. 

조심스럽고 어두운 마음의 바탕에서 별일 이라는 말이 번쩍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 마치 밤하늘에서 별이 반짝이는 것과 같다는 착안으로 이 시를 써서 작년에 출간한 한국의사시인회 공동시집 제6집에 실었다. 요즈음 어머니께 안부 전화 드리면, 어머니는 예전과 달리 ‘별일 없지’하며 웃으신다. 안부를 물으시는 동시에 이 시를 기억하고 있다는 표를 내시는 것이다. 어제가 오늘인 듯, 내일이 오늘인 듯 별일 없이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잔잔한 평화가 아닐까. 부디 운명이 별일을 만들지 말기를 바라는 조심스러운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아마 대부분의 소시민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홍지헌(시인)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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