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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떠난 남편 그리는 여인 마음 노래한 ‘봄날은 간다’

백설희, 1953년 대구서 취입해 히트… 시인들 좋아하는 노랫말 1위. 나훈아, 조용필, 장사익 등 리메이크… 같은 제목 영화·연극도 나와 

  • 입력 2018.05.27 10:49
  • 기자명 왕성상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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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 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안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우리 노래 중엔 계절을 소재로 한 게 많다. 특히 봄노래가 그렇다. 1945년 8월 광복이전 유성기음반에 실린 5000여 대중가요들 중 제목에 ‘봄’이 들어간 게 124곡이나 된다. 봄노래는 해방 후에도 꾸준히 만들어지고 불리며 4계절 노래 중 가장 많다. 
봄노래 가운데 가요 ‘봄날은 간다’(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의 인기는 대단하다. 애절한 음률과 가사가 마음을 울리는 아름다운 노래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즐겨 부르는 빅히트곡으로 꼽힌다. 
가수 백설희가 1953년 대구에서 취입, 이듬해 선보인 이 곡은 ‘봄’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가요다. 백 씨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가수들은 물론 이후 많은 소리꾼들이 이 노래를 다시 취입해 불렀을 정도로 명곡이다. 황금심, 은방울자매, 금사향, 한영애, 나훈아, 조용필, 최백호, 장사익 등이 리메이크해 음반을 냈다. 신세대가수들도 새롭게 편곡해 자주 부른다. 
1954년 새로 등장한 유니버살레코드에서 첫 작품으로 제작·발표된 이 곡은 백설희의 실질적인 데뷔곡들 중 하나다. 원래는 가사가 3절까지 만들어졌으나 녹음시간이 맞지 않아 초판음반엔 1절과 제3절만 실렸다. 
 
봄의 기쁨보다 슬픔 노래
4분의 4박자 블루스곡인 ‘봄날은 간다’ 노랫말은 한편의 시(詩)와 같아 대중들 인기가 높다. 그 중에서도 시인들이아주 좋아한다. 2004년 전국에 있는 시인 100명을 상대로 ‘시인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 노랫말’을 뽑았을 때 1위를 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봄의 기쁨보다 슬픔을 노래했다. 멀리 떠난 남편을 그리는 여인의 마음을 시적(詩的)으로 나타낸 것이다. 노랫말 중 ‘연분홍’이란 표현은 새색시임을 짐작케 한다. 노래가 나온 시기로 볼 때 6·25전쟁이 한창일 무렵 막 결혼한 젊은 여인이 군에 간 신랑을 그리워하며 부른 애상곡(哀傷曲)이자 사부곡(思夫曲) 같기도 하다. 음반이 나온 1953년은 전쟁 막바지로 그해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봄날은 간다’에서 느껴지는 정서는 토속적·향토적이다. 옷고름, 성황당, 청노새, 역마차 등의 단어에서 알 수 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란 첫 구절부터 아련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봄날의 찬란함과 인간의 허무한 심정을 대비시키면서 한국적 정서를 잘 드러낸 절창으로 평가받는다. ‘같이 울고 같이 웃던’ 임이 떠나고 나서 체념하듯 ‘봄날은 간다’고 말하는 대목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런지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 구절에선 왠지 모르게 울컥해진다. ‘봄날은 간다’ 2절 가사 중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부분은 처음 발표된 SP(Standard Play)음반엔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로 돼있었으나 왜 바뀌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노래가 유명해지자 같은 제목의 영화, 연극, 악극 등도 나왔다. 2001년 9월에 개봉한 영화 ‘봄날은 간다(One Fine Spring Day)’는 봄날이 가는 때 잘 어울리는 멜로물이다. 허진호 감독, 유지태, 이영애가 주연을 맡고 박인환, 백성희, 신신애 등이 출연했다. 삼척시 근덕면 동막리 신흥사, 대숲, 맹방해변, 동해시 등지에서 찍은 이 영화 주제가(OST)를 김윤아가 불렀지만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와는 멜로디가 다르다. 
2017년 11월 무대에 오른 연극 ‘봄날은 간다’(부제 : ‘늙은 과부들의 수다’)는 대전 선화동 상상아트홀에서 선보였다. 극단 빈들의 유치벽 대표가 연출했다. 전통뮤지컬 악극은 전국에서 수십 번 펼쳐졌다.


‘봄날은 간다’ 부른 백설희는 가수 ‘전영록’ 어머니
‘봄날은 간다’ 노래를 부른 백설희(본명 김희숙, 1927년 1월 29일∼2010년 5월 5일)는 영화배우 황해의 아내이자 가수 전영록의 어머니로 유명하다. 그는 2009년 말부터 고혈압 합병증으로 치료받던 중 병세가 나빠져 경기도 광주의 한 병원에서 87세 나이로 별세했다. 1950~60년대 활동한 그는 1943년 조선악극단에서 운영하던 음악무용연구소에 들어간 후 조선악극단원으로 활동했다. 주로 막간무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1949년 KPK악단이 공연한 ‘카르멘 환상곡’에서 주인공 카르멘 역을 맡으며 신데렐라로 떠올랐다. 그에게 백설희란 예명을 지어준 사람은 KPK단장 겸 작곡가였던 김해송 씨. ‘에베레스트 산의 눈이 낮이나 밤이나, 여름이나 겨울이나 녹지 않고 눈부신 자태를 드러내듯 연예인으로서 높은 곳에서 식지 않는 열정으로 빛나라’란 뜻에서 붙여졌다. 
조선악극단과 KPK악단을 거친 백설희는 6·25전쟁 직전 새별악극단에 입단, 황해를 만나 결혼했다. 백설희는 1953년 작곡가 박시춘을 만나면서 본격적인 레코드가수로 활동을 시작, 스타가 됐다. ‘봄날은 간다’, ‘카르멘 야곡’, ‘물새 우는 강 언덕’, ‘청포도 피는 밤’, ‘코리아 룸바’ 등 주로 박 씨와 손잡고 발표한 곡마다 히트하며 1950년대 말 최고인기 여가수로 떠올랐다. 박시춘 씨가 오향영화사를 세웠을 때 그곳에서 만든 영화의 주제가도 도맡아 불렀다. 영화에도 출연, 춤바람이란 파격적 내용을 다룬 ‘자유부인’에 출연하고 주제가 ‘아베크 토요일’을 부르기도 했다. 영화 ‘딸 칠형제’에선 황해와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그는 2005년 별세한 황해와의 사이에 배우 겸 가수 전영록 등 4남1녀를 뒀다. 전영록 딸 보람도 노래그룹 티아라로 활동, 3대째 연예인집안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봄날은 간다’ 가사를 쓴 손로원은 이 노래 외에도 ‘페르시아 왕자’, ‘인도의 향불’, ‘홍콩 아가씨’ 등을 작사했다. 그는 일제강점기 아래선 한 줄의 가사도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손석봉이 부른 ‘귀국선’을 필두로 다시 활동한 음악인이다. 그는 노랫말 때문에 두 번이나 경찰에 끌려갔다. “벼슬도 싫다 만은 명예도 싫어∼”로 나가는 ‘물레방아 도는 내력’(이재호 작곡, 박재홍 노래)의 경우 자유당 말기 세태를 풍자했다며 끌려갔고, 끝내 금지곡이 되는 수모까지 당했다. ‘비 내리는 호남선’(박춘석 작곡, 손인호 노래)도 비슷한 사연으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작곡가 박시춘, 3000여 곡 노래와 악상 남겨
작곡가 박시춘(본명 박순동, 1913년 10월 28일~1996년 6월 30일)은 경남 밀양태생으로 권번(기생양성소)을 운영한 아버지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 하며 자랐다. 유랑극단에서 악기를 연주하다 시에론레코드의 이서구, 박영호를 만나 작곡가가 됐다. 데뷔곡은 ‘몬테칼로의 갓난이’, ‘어둠에 피는 꽃’, 1935년 ‘희망의 노래’에 이어 ‘항구의 선술집’, ‘물방아 사랑’을 발표하며 인기작곡가가 됐다. 특히 1938년 남인수가 불러 히트한 ‘애수의 소야곡’으로 두 사람은 최고인기를 얻었다. 이후 ‘고향초’, ‘가거라 삼팔선’,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낭랑 십팔세’, ‘전선야곡’, ‘전우여 잘 자라’,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정거장’, ‘럭키 서울’ 등 히트곡들을 발표했다. 3000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긴 그는 ‘한국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1943년 영화 ‘조선해협’으로 영화음악 감독으로도 데뷔했다. 6·25전쟁 땐 해군 정훈국 소속으로 참전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로 나가는 ‘전우여 잘 자라’는 이때 만든 노래다. 6·25전쟁 후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아메리카 차이나타운’은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이국취향의 음악이었다. 1950년대엔 영화음악작업을 많이 했고 영화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영화주제가로는 반야월과 호흡을 맞춘 ‘딸 칠형제’, ‘남성 넘버 원’, ‘유정천리’ 등이 히트했다. 1956년 영화 ‘청춘쌍곡선’ 단역으로 배우로 데뷔했고 1958년에 만든 ‘삼등호텔’으로 영화감독과 제작자로도 이름을 올렸다. 
박시춘 작품은 선율이 감각적이고 세련된 점이 특징이다. 작사가 조명암과는 잘 어울렸다. 뛰어난 기타연주자이기도 했던 박시춘은 작곡에 대해 매우 진지해 전주와 간주부분까지 꼼꼼하게 신경 썼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가 조직될 때 초대이사장을 맡은 그는 1982년 문화훈장을 서훈 받았다. 대중가요작곡가에게 문화훈장 보관장 서훈은 그때가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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