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므네모쉬네 여신과 건망증
  • 문국진(대한민국의학한림원 박사)
  • 승인 2018.07.26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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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다가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생각나지 않아 말문이 막히거나 다른 화제로 바꾸어야하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는 것을 기억상실 또는 건망(健忘 amnesia)이라 하는데 “a”는 부정을 나타내고 “mnesia”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 므네모쉬네 Mnemosune에서 유래된 기억을 의미하는 용어로써 기억의 부정 즉 건망증 또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의학용어의 어원이 되는 것임으로 기억의 여신 므네모쉬네의 신화를 살펴보고 건망증의 의학과의 관계를 화가들의 작품을 보면서 정리하기로 한다.

신들의 나라 올림포스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보니 제우스에게는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즉 신들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시나 노래로 남겨야겠는데 그것을 담당할 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가 있어서 기록해둔다면 별문제가 없을 것인데 그 당시는 아무리 신의 세계라 할지라도 문자가 없는 것이 문제이었다.

제우스는 올림포스의 주신으로서 그의 특징은 무제한에 가까운 활동력과 무한정한 호색성이라 할 수 있는데, 궁리 끝에 제우스는 기록과 기억을 상징하는 여신 므네모쉬네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사랑을 맺게 되어 아흐레 밤을 동침했다. 그로부터 열 달이 지나자 기억의 여신은 9자매를 낳았다. 이들이 바로 기억을 통해서 신들의 나라와 인간 세상의 온갖 예술을 담당하게 될 무사이 여신들이다.

그림 1. 로렌조 코스타 작: '이사벨라의 뜰', 1505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이탈리아의 화가 코스타(Lorenzo Costa 1460-1535)가 그린‘이사벨라의 뜰’(1505)은 신들의 나라와 인간세상의 온갖 예술을 담당하는 무사이 9자매가 이들의 평화로운 한 때를 표현 한 것이다. 

초창기 신화에서는 무사이들이 행한 것과 같은 예술에 관여하는 사람들, 즉 시인이나 무용가들을 통틀어 무시코스(mousikos)라 불렀으며 예술 그 자체는 무시케(mousike)라 하였다. 이렇듯 이들이 관장하는 예술 전체를 무시케라 하였으나 이들의 특기가 노래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노래를 예술 중에서 최고의 예술로 간주하게 되어 무시케는 귀에 기분 좋게 들리는 소리를 내는 것, 즉 음악을 무시케라 부르게 되었으며 영어의 ‘music’이라는 단어도 결국은 무시케에서 유래된 것이다.

노래를 잘 부르고 지혜로운 무사이들의 평이 점차 좋아져 이들을 마치 신처럼 떠받들게 되자 철학 학파에서도 무사이를 숭배하게 되고 그 결과로 각처에 무사이의 신전 또는 신역(神域)을 의미하는 무사이온(Mousaion)이 생겨나게 되었으며, 무사이온이 학문하는 곳으로 변하게 되어 인류가 남긴 기억의 산물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곳 역시도 생겨났다. 이것이 바로 도서관이 딸린 박물관 뮤지움(Museum)의 어원이다. 

하위 여신에 해당하는 이들은 자주 올림포스 천성으로 올라가 신들의 잔치에서 말석을 얻어 시와 음악으로 흥을 돋건 하였으며 대개는 헬리콘 산에서 지냈다. 헬리콘 산은 산비탈에 향나무가 많고 물이 너무 맑아 독사의 독기까지 삭아 없어진다는 곳이다. 이들은 샘가에서 그 샘물 마시기를 즐겼다. 그 샘물이 마치 지난날에 있었던 일을 기억했다가 되새기듯 영묘한 시상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무사이 여신들은 자리만 어우러지면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그러다 지치면 샘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올림포스로 올라가곤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음악의 신 아폴로신과 무사이들은 친하게 지나게 되었으며 결국은 아폴로신의 전속 예술단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림 2. 로마노 작: '아폴로와 춤을 추는 아홉 무사이', 1540년, 플로렌스, 팔로츠 피티

이탈리아의 화가 로마노(Giulio Romano 1499-1546)가 그린 ‘아폴로와 춤을 추는 아홉 무사이’(1540)는 음악의 신 아폴로와 무사이 9자매가 한데 어울려 춤을 추는 광경을 그렸다.
제우스가 무한한 활동력과 무한정한 호색가이면서도 기억의 여신과 동침해서 무사이 아홉 딸을 낳게 한 것은 신들의 나라와 인간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리하고 기억하게 하여 두 세계를 이어나갈 수 있게 하겠다는 매우 지혜로운 생각이었다.

옛날 그리스 사람들이 델포이시 아폴로 신전의 하얀 대리석벽에 ‘너 자신을 알아라’라는 금언을 아로새기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나의 분수와 처지를 바로 기억하여 나의 사명을 자각하고, 나아갈 길을 찾아, 장점과 단점을 잘 파악하여 자기의 형편과 처지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를 알지 못하는 데서부터 오판이 생기고,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고 허세와 허욕을 부린다. 즉 자기를 객관화하는 지혜를 가지며, 자기를 냉철히 관찰하는 총명성을 지녀 자기를 과대평가하지도 말고 과소평가하지도 않아 공정하게 평가하는 슬기를 간직하라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금언인데 이런 것은 과거의 체험을 통해 절실하게 느낀 것을 토대로 얻어진 귀중한 기억의 산물인 것이다. 

기억이란 과거에 경험한 것이나 생각했던 것이 어떤 형태로 간직되었다가 필요에 따라 의식으로 떠오르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의학적으로 설명하면 어떤 인상이나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을 기명(記銘 memorization)이라하며 기명을 어떤 기회에 의식의 표면에 떠오를 때까지 간직하게 되는데 이 단계를 저장(貯藏)이라 한다. 이렇게 저장되었던 정보가 의식으로 돌아와 생각나는 작용이 재생(再生)의 과정을 거쳐 다시 생각나게 되는데 이것이 기명되어 있던 것과 동일한지를 확인하는 작용을 재인(再認 recognition)이라 한다. 즉 사람은 이러한 4단계를 거쳐 기억하였던 것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과정 속에서 기억의 소재가 저장되어 있는 상태를 기억흔적(記憶痕迹 engram)이라 하며 이것은 협의의 기억을 의미한다.

기명, 저장, 재생, 재인이라는 기억의 4단계 과정에서 어느 한 단계 과정에 장애가 일어나면 기억장애(記憶障碍)라 한다. 그러나 이들 4단계 과정이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기억장애라고는 해도 사실 어느 하나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므네모쉬네 여신의 기억의 혜택을 못 받은 기억상실증(건망증)이란, 어느 특정한 기간 동안의 기억감퇴를 나타내는 증세이며 의식장애가 있어 그 지속기간에 해당되는 기억이 상실되는 것이다. 이 기억상실이 의식장애 이전의 일정기간까지 소급되는 것은 “역행성건망(逆行性健忘)”이라 하고, 그와 반대로 의식이 회복된 후에까지 추상곤란이 계속되는 것을 “전행성건망(前行性健忘)”이라 한다.
 
이런 건망증은 뇌의 기질적(器質的) 증세로서도 생기고 또 뇌에는 기질적 변화가 없는데도 정신적 원인 즉 심인성(心因性)으로도 나타난다. 영화나 소설에서 어떤 동기로 기억이 상실되었다가 그 후에 어떤 충격으로 상실된 기억이 갑자기 소생되는 예는 대개 심인성건망에 속한다.

만일 므네모쉬네 여신의 혜택을 지나치게 받으면 과거의 기억을 보통 때와 달리 매우 활발히 돌이켜 생각해내는 일이 생기는데, 기억증진(記憶增進)이라고 한다. 즉 어느 한 시기에 기명과 재생이 강하게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이 현상은 잠시 나타났다가 곧 없어지는 일과성으로 발열(發熱)이나 꿈, 최면상태, 간질발작 때에 잘 나타난다. 또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단시간에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인간에겐 므네모쉬네 여신의 총애를 받아 너무 기억력이 좋은 것도 탈이다. 괴로움을 잊을 수 있는 능력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문국진(대한민국의학한림원 박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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