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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적 이산가족 아픔 노래한 ‘평양아줌마’

나훈아, 1985년 북한공연 마치고 귀경 중 작곡·작사해 취입, 경의선 열차 칸에서 악상 떠올라 만든 작품…발표 후 히트

  • 입력 2018.09.20 11:24
  • 수정 2018.12.07 10:13
  • 기자명 왕성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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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따라 지는 해가 왜 저다지 고운지
붉게 타는 노을에 피는 추억 
잔주름에 고인 눈물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그리운 고향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고향 
아 ~ ~ ~ 오마니 아바지 불러보는 평양아줌마
서산마루 지는 해는 어김없이 넘어가고
무심하게 오고가는 그 세월이 
타향살이 어언 반평생 
가고파도 갈 수없는 북녘 내 고향
한 맺힌 휴전선이 원수더라
아 ~ ~ ~ 대동강아 모란봉아 불러보는 평양아줌마

[엠디저널]북한 배경, 북녘고향 노래로 시름 달래
한반도에 훈풍이 불고 있다. 올 봄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까지 열려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해법 찾기에 시동이 걸렸다. 
지난 8월 20∼26일 금강산에선 제21차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열린데 이어 추석(9월 24일)이 들어있는 9월에도 평양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이 열릴 예정이어서 눈길이 쏠리고 있다. 개성공단 재가동, 남북공동연락사무소 개설, 금강산관광 재개 소식도 들린다.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9월 서울~평양 고향방문과 예술공연행사를 통해 이뤄지기 시작했다. 1984년 9월 우리 정부가 북한의 수재물자 제의를 받아들인 게 계기가 됐다. 고향방문단 50명, 예술공연단 50명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오가며 이산가족 상봉과 교차공연을 펼침으로써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를 처음 썼다. 신문, 방송 등 언론사들은 북한 배경 노래를 들려주거나 관련특집을 만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실향민과 탈북자들은 명절을 앞두고 북한을 배경으로 했거나 북녘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시름을 달래기도 한다. 나훈아(본명 최홍기)가 작사·작곡하고 취입까지 한 ‘평양아줌마’도 그런 부류의 대중가요다. 나훈아는 북쪽을 그리며 부른 노래가 많은 가수로 꼽힌다. ‘평양아줌마’ 외에도 ‘녹 슬은 기찻길’, ‘대동강 편지’ 등 여러 곡이 있다. 

현장, 현실 바탕으로 만들어진 가요
‘평양아줌마’는 이전의 추상적·관념적 노래흐름에서 벗어나, 보고 듣고 느낀 현장과 현실을 바탕으로 한 추억의 전통가요다. 4분의 4박자, 트로트곡으로 흥겨우면서도 의미가 있다.
노래가 만들어진 건 지금으로부터 33년 전이다. 1985년 9월 21~22일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유명 인기연예인들이 북한 예술공연방문단으로 평양을 찾았을 때다. 가수 김정구, 나훈아, 하춘화, 배우 김희갑, 코미디언 남보원 등 연예인과 MC(사회자), 국악인 등이 평양대극장에서 노래, 원맨쇼, 춤, 연주로 북한주민들을 즐겁게 했다. 
공연을 마친 단원들은 서울로 오기위해 북한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일행과 기차를 탄 나훈아는 차창을 내다보면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보고 듣고 느낀 북한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렸다. 그때 갑자기 악상이 떠올랐다. 그는 메모지를 꺼내 생각나는 대로 가사와 악보를 써내려갔다. 북한 황해북도 사리원쯤에서 쓴 노랫말과 멜로디는 어느덧 하나의 작품이 됐다. 서울로 돌아온 그는 북한 열차 칸에서 쓴 가사와 악보를 다듬어 취입까지 한 노래가 ‘평양아줌마’다. 
노랫말에 나오는 ‘오마니’는 어머니를, ‘아바지’는 아버지를 말한다. 북한말을 가사에 그대로 넣어 정감어린 부모의 뜨거운 혈육을 소리로 풀어내고 있다. 아줌마는 모든 어머니들을 제3자적 인칭을 써서 북한에 있는 어머니를 아우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평양아줌마’는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혈육의 이산을 가슴으로 부른 가요다. 해는 아침에 동쪽에서 떠 저녁엔 노을을 만들며 서쪽으로 지고, 새는 휴전선을 마음대로 넘나드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고향을 가까이 두고도 오가지 못하는 맘을 애절하게 부른 곡이다. 리듬에도 그런 마음이 잘 녹아있다. 노래 앞부분에선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고 평상심으로 돌아가 물 흐르듯 멜로디가 이어진다. 그러나 중반부로 가선 가슴이 메어진다. 멀지도 않은 고향에 가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한 서린 마음을 나훈아의 빼어난 가창력으로 한숨을 토해내듯 내뱉는 대목으로 펼쳐진다. 후반부에선 눈물이 짙게 베어 외쳐 부르는 ‘오마니’, ‘아바지’는 부모가슴에 머리를 파묻고 절규하듯 분단의 아픔을 소리치고 있다.

노래가 발표되고 방송과 공연무대에서 불리자 많은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고향을 떠올리며 울었다. 노랫말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데다 멜로디가 구슬프다는 반응이었다. 
한편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 사전행사로 열린 남측예술단 평양공연 때 나훈아 참여를 원했던 사실이 알려져 흥미롭다. 지난 7월 20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7회 여기자포럼에 참석한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평양공연 때 김 위원장과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을 공개했다. 도 장관은 “(김 위원장이) 오라고 요구했던 배우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나훈아라든가(라고 말했다)”라면서, “스케줄이 있다고 답하니 저쪽은 사회주의체제라 국가가 부르는데 안 온다니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이었다”고 밝혔다.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도 생전에 나훈아를 좋아했다. 2000년 8월 남한 언론사사장단이 방북했을 때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장관이 좋아하는 남한 남자가수를 묻자 “나훈아와 조용필”이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이처럼 북한에서 나훈아의 인기는 높다. 2010년 당시 국회 국방위원이었던 송영선 전 의원이 발표한 ‘대북방송 BEST 5’ 자료에서 상위권에 나훈아 노래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나훈아 고교 2학년 때 데뷔…2600곡 취입
나훈아는 연조가 있는 대형가수다. 1947년 2월 11일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서 선원이자 무역상이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2남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1966년 서울 서라벌예고 2학년 때 대중가요 ‘천리길’을 취입, 가요계에 데뷔했다. 트로트장르에서 유명세를 탔지만 수많은 히트곡을 작사·작곡한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이기도 하다. 히트곡만 120여곡에 이른다. 히트한 노래숫자에 있어 국내 최다가수다. 발표음반 수만 해도 200장 이상, 800곡의 자작곡을 합쳐 2600곡의 취입기록을 갖고 있다. 노래방 책에 가장 많은 곡을 올린 가수이기도 하다. ‘트로트의 황제’란 별명을 가진 그는 저음과 특유의 절묘한 고음, 간드러지는 구성진 목소리, 트레이드마크인 꺾기로 대표되는 창법이 독특하다. 
그는 1973년 7월 비밀리에 공군병사로 자원입대, 군악대에서 복무했다. 최근 10여년 잠적하다시피 공식자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는 2017년 11년 만에 컴백했다. 새 음반 ‘Dream Again’과 신곡 ‘남자의 인생’을 발표, 음악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가수로서의 자존심과 긍지가 대단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연회초대에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서 오라”며 배짱을 보였다. 
나훈아는 개인생활과 무대에서도 얘기가 많은 가수다. 1972년 스토커 같은 사람으로부터 테러를 당해 입원한 적 있다. 사이다병 파편에 왼쪽 얼굴이 찔려 72 바늘을 꿰맸다. 영화배우 김지미와 연인 사이로 대전서 동거한 적도 있다. 둘은 식당을 경영하면서 살고 싶어 했으나 나훈아가 가수로 복귀하면서 헤어졌다. 세 번째 부인 정수경 씨와의 이혼도 화제였다. 정 씨가 2014년 10월 8일 이혼소송을 내자 조정절차를 거쳐 갈라섰다. 

[엠디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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