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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야, 그 여름 정열을 말하다!

  • 입력 2018.09.21 10:08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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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이번 여름은 끝없는 더위에 지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과일의 당도를 높여주는 햇빛이 공존했던 계절이었다. 
 
律己宜帶秋氣 하고 處世宜帶春氣 하라 
(율기의대추기 처세의대춘기)
자기 단속은 가을 기운처럼 매섭게 하고 사람과 함께하는 일은 봄기운처럼 따뜻해야 한다.

-유몽영(幽夢影)

중국 고전에서 나오는 글귀이다. 이제 더위를 마무리하고 마음가짐을 다질 때이다. 더위와 함께 정열적인 움직임이 떠오르는 곳, 영감의 원천 세비야(Seville)의 음악을 찾아간다.
보통 ‘오페라’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나라는 ‘이탈리아’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작품 속 내용의 배경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나라는 바로 세비야가 있는 스페인이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돈 조반니(Don Giovanni)’,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피델리오(Fidelio)’,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 그리고 비제의 ‘카르멘(Carmen)’ 등이 그러하다. 무려 25개의 오페라 극 속의 배경으로 세비야가 등장한다. 
예술은 익숙함이 아닌 항상 새롭고 신비한 어떤 것에서 영감을 얻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특히 음악가들에게 스페인 세비야는 마치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영국 유학시절 같은 실내악 팀의 친구 덕분에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할 때, 세비야를 잠깐 들른 적이 있다. 도시의 건축에서도 보였던 것처럼 그곳은 이슬람 문화와 유럽 문화가 공존하는 신비로운 남국의 이미지를 풍겼다. 거리에서 보이는 건강하고 활달한 세비야의 사람들 그리고 정열적인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색감들이 가득한 골목 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오페라의 옅은 흔적이 서려있었다. 

왕립 담배공장, 이미지 출처 Almary
왕립 담배공장, 이미지 출처 Almary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세비야(Seville)에는 지금은 세비야 대학교의 건물로 변해 있는 왕립 담배 공장(Antigua Fabrica de Tabacos)의 지저분한 건물 안에서 담뱃잎을 말아내던 매력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은 잠깐의 휴식 동안 담배 한 대를 입에 문다. 
“사랑은 말을 듣지 않는 반항적인 새와 같아. 그렇게 이리로 왔다가 저리로 날아가지. 남자들이 여자를 고른다고? 천만에! 나는 내가 선택한 남자와 사랑을 할 거야!”

이 도발적인 가사는 프랑스 작곡가 조르주 비제의 오페라 ‘카르멘’ 1막에서 여자 주인공 카르멘이 부르는 아리아이다. 이 곡만 따로 ‘하바네라’라고도 부른다(‘하바네라’: 느린 2/4박자의 라틴 풍 무곡).
끼가 넘치는 집시 여인 ‘카르멘’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 순진한 군인 ‘돈 호세(Don Jose)’를 유혹하며 부르는 음악이다. 세비야의 모든 남성들의 눈빛을 보내는 가운데 오직 한 남자만이 그녀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북부 바스크 지방에서 왔다는 고지식한 하사관인 그에게 흥미가 솟은 카르멘이 붉은 꽃 한 송이를 호세의 가슴에 던진다. 그 꽃이 비수처럼 가슴에 꽂힌다.

카르멘으로 거듭난 스페인
피레네 산맥 남쪽의 이베리아 반도는 예로부터 정통 유럽으로 여겨지지 못했다. 전성기엔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스페인이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며 정치적으로 유럽 중심부와 단절되고,나폴레옹은 피레네 이남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땅을 ‘아프리카와 같다’고까지 할 정도로 문화적으론 여전히 이질적이고 소외된 미지의 땅으로 인식됐다.

<카르멘>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The Goteborg Opera
<카르멘>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The Goteborg Opera

그러던 스페인이 유럽 전역에 알려진 결정적 계기는 오페라 ‘카르멘’ 덕분이다. 비제가 1875년 발표한 이 오페라는 플라멩코 춤과 투우 등 전통 스페인 문화를 매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시에 집시들의 방랑 기질과 스페인 특유의 정열 등을 강렬하고 화려한 관현악으로 완벽하게 표현하여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세비야는 또한 투우의 발상지로 유명하다. 스페인 투우는 오랜 역사를 가진 스페인 전통문화로 이 나라를 떠올리는 이미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주요한 문화적 요소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투우의 존속에 찬성하는 스페인 사람들은 투우를 단순한 도살, 오락이 아니라 소와 인간의 죽음을 건 의식이며 또 예술이라 주장하기도 한다. 한편, 호기심으로 경기를 관람했던 사람들마저 도저히 끝까지 볼 수 없다고 말할 만큼 투우는 잔인하고 명백한 동물학대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만큼 여전히 찬반양론이 팽팽히 맞선다.
인간과 소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직면해 혈투를 벌이는 이 야만적이고 극단적인 유희는 죽음을 조련하고 결정하는 섬세하고 기교적인 법칙이 검붉은 피가 치솟는 어둡고 원초적인 에너지와 공존한다. 작가 헤밍웨이(Ernest M. Hemingway)도 이곳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아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에서 투우와 전쟁의 유사점들을 끌어내고 투우사가 절박한 상황 하에서 인간적 위엄을 유지하는 규범을 지킴으로써 죽음을 초월하는 힘에 지고한 관심을 갖고 투우와 창작과 삶을 결부시켰다.

<카르멘>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Den Norske Opera&Ballet
<카르멘>의 한 장면, 이미지 출처 Den Norske Opera&Ballet

오페라의 피날레도 투우 경기장이 배경이다. 카르멘은 유명 투우사인 에스카미요(Escamillo)에게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카르멘의 유혹에 정혼자를 버리고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호세는 절망의 마지막 호소를 보냈지만 그녀는 냉정한 거절로 답했다. 세비야 최고의 투우장인 토로스 데 라 마에스트란사(Pla-za de toros de la Real Maestranza)에서 에스카미요가 싸움소의 등에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는다. 그 순간 절망과 미련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던 호세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 심정으로 카르멘의 가슴에 비정한 단검을 찌른다.
비제가 주목한 것은 이 스페인식 죽음의 미학이었다. 여주인공 카르멘이 한 남자의 속박을 거부하고 차라리 죽음으로 영원한 자유를 택한다. 그 시간이 마침 한낮으로 그려졌다. 지중해의 태양이 이글거리는 대낮에 오페라의 주인공이 죽어가는 장면에서 ‘태양 아래의 죽음’은 19세기의 스페인이 그러했듯 이질적이고 낯선 이미지이다. 고요한 밤의 애절하고 낭만적인 피날레가 아닌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검붉은 선혈이 표현되는 격렬한 죽음의 장면은 그 당시 관객들의 호응을 받지는 못했다. 사라사테(Pablo de Sarasate), 왁스만(Franz Waxman), 부조니(Ferruccio Busoni) 등 수많은 작곡가가 ‘카르멘’을 테마로 한 관현악 모음곡과 환상곡을 작곡했다. 발레와 영화, 뮤지컬, 드라마 등의 예술 작품으로 각색된 작품들이 이미 100여 편이 넘는다. 세비야의 타오르는 태양과 카르멘의 검은 머리에 단 붉은 꽃, 돈 호세의 허리 춤에서 빼어든 단검이 빚어낸 스페인식 비극 ‘카르멘’. 죽음이 찾아올지라도 자유로운 삶을 갈망했던 집시 여인 카르멘은 예술 사상 가장 강렬한 캐릭터로 지금까지도 우리의 가슴 속에 뜨겁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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