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어느 마을에

  • 입력 2018.11.20 12:27
  • 기자명 강지명 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엠디저널]어느 어촌에 강아지와 아기 고양이가 살았네. 강아지는 자신이 더 이상 자라지 않는 강아지라는 걸 몰랐네. 고양이는 크게 자라는 고양이라는 걸 몰랐네. 강아지는 고양이 귀를 물고, 꼬리를 물고, 밥도 빼앗아 먹으며 놀았네. 

어느 마을에 아버지와 아들이 살았네. 아들이 얼마나 빨리 자랄지 아버지도 아들도 몰랐네. 그저 좋아 마주보며 살았네. 어느 마을에 작은 학교가 있었네. 교장선생님이 뒷짐을 짓고 서서 학생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네. 그 자리에 얼마나 오랫동안 서 있을 줄 몰랐네. 학교가 얼마나 커질 줄 그때는 몰랐네. 

그러는 사이에 130년이 흘렀네. 어느 마을에 작은 클리닉이 있었네. 원장은 클리닉이 더 이상 자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네.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지만 점점 고개를 들지 않을 수 없었네. 점점 자라는 아들과 눈을 맞추려면 고개를 들 수밖에 없었네.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네. 

어느 나라에 대통령이 있었네. 세월이 흐를수록 위대해질 것을 그때는 몰랐네. 얼마나 수모를 당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네. 어느 학교에 연구소가 생겼네. 키 작은 교수님이 계셨네. 연구소가 얼마나 커질지 사람들은 몰랐네. 키 작은 교수님은 아시는 것 같았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했네. 어느 병원에 인턴이 있었네. 매일 야단맞는 것이 일이었네.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의사가 될지 알지 못했네. 사람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지나간 후에 비로소 알게 된다네. 어느 마을에 환자가 있었네. 그 환자 옆에 원장이 있었네.

몇 년 전에 종편 채널에서 ‘삼시 세끼, 어촌편’이라는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유명 연예인들이 어촌에서 직접 생활하며 먹거리를 손수 마련하여 하루 세끼 식사를 직접 만들어 출연자들과 함께 먹는 예능 프로그램이었는데 별스러운 자극적인 장면도 없이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때 조연급으로 강아지와 아기 고양이가 나왔다. 강아지는 개과 동물의 특성상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며 어울리는 습성대로, 고양이와 장난도 치고 등장인물들과도 교감하였는데, 특히 고양이 꼬리를 물기도 하고, 귀도 물어 당기며 괴롭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마도 한 배에서 태어난 다른 강아지가 있었어도 마찬가지로 귀도 물어 당기고 장난치며 서열을 가리기도 하며 사회적 관계를 형성해 나갔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시즌 2에 다시 등장한 개와 고양이의 모습은 전세가 역전되었다. 강아지는 많이 자라지 않는 종이라서 덩치가 고양이보다 작았다. 이제는 고양이가 강아지 콧등을 할퀴고 강아지는 쫓겨 다니기에 바쁜 신세가 되었다.

이 시를 쓸 당시 우리 집 둘째는 모교 병원의 인턴이었다. 항상 잠이 부족하였고 밥 챙겨 먹을 시간도 아슬아슬하였고, 항상 야단맞는 동네 북 같은 신세였다. 지금도 수련의 과정에 있는 관계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비슷한 처지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보며 위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위로를 주기 위한 시라기 보다는 당시의 내 심정을 나타낸 시라고 하는 것이 더 옳겠다. 비록 지금은 매일 야단맞고 고생하는 생활을 하지만 언젠가는 선배들보다도 더 훌륭한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아들의 모습을 보다가 스스로도 반성이 되었다. 
나도 예전에 강아지처럼 행동하지는 않았을까? 지나고 보니 내 후배들 중에 주임교수도 되고, 모교의 보직도 맡고, 세계 학회에 가서 발표도 하는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나왔다. 미래의 일을 환히 안다면 사람들은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예측도 하지 못한 상태로 살아간다.

나의 모교는 1885년 제중원으로부터 시작된 교육기관으로서 13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모교의 초창기 교장 선생님으로 봉직하셨던 에비슨 박사의 동상이 모교의 교정에 세워져 있다. 
인자한 표정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을 맞이하시는 당시의 모습을 상상하며, 에비슨 선생께서 요즈음 모교의 모습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실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렇게 큰 교육기관 겸 의료기관으로 성장하리라고 예측하셨을까. 시작할 때의 미약하고 부족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미래에 대한 눈부신 비전을 가지고 계셨을까. 식민지 시대를 지나고, 전후 세대를 지나고 지금처럼 성장하리라고 예견하셨을까. 
아마도 그런 비전을 분명히 가지고 계셨던 위대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의 조국에서 보장된 생활을 포기하고 후진국의 의료선교사로 임신한 아내의 손을 이끌고 파송되는 일을 감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교 이비인후과학 교실에 기도점액연구소가 생겼다. 윤주헌 교수님이 거의 혼자 힘으로 연구소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시작된 작은 연구소였는데, 이제는 모교의 연구비를 지원받는 정식 연구소가 되어 명칭도 인체방어연구소로 바뀌었고, 10년간 100억에 가까운 외부 연구비도 받는 등 모교의 대표적인 연구소로 발돋움하였다. 
아마도 윤주헌 교수님은 해외연수를 다녀오신 젊은 시절부터 연구소의 미래를 생생하게 꿈꾸며 차곡차곡 그 꿈을 구체화 하신 것으로 보인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앞의 시를 지을 당시 싱가포르의 이콴유 총리가 서거했다. 전직 국가원수가 돌아가시자 싱가포르에서는 전국가적으로 이 총리를 추모하며 그의 위대함에 대한 애도가 외국인 우리나라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전직 국가원수들은 모두 수모를 당하는 우리나라의 정치 역사에 비추어볼 때 부러운 일이었다. 지금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는 현직 대통령의 미래는 어떨까. 후세의 역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모든 사항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30년 가까이 한 동네에서 개원을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동네 주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오랫동안 개원하였으면서도 크게 이루어 놓은 것도 없이 그저 환자들 옆에 그냥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아들에게 기대하는 것은 다소 비겁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들은 미래에 대한 빛나는 비전을 품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지금도 그저 아들을 올려다보고 있을 뿐이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