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디저널]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
살짝쿵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
다시 한 번 윙크하면 웃어 줄 텐데
다시 한 번 윙크하면 사랑할 텐데
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
아∼ 나는 몰라
그 사람 바보야 그 사람 바보야요
단 한번 윙크로 내 마음 줄까봐
살짝쿵 윙크한 그 사람 떠났네
정두수 작사, 이동기 작곡, 정훈희 노래의 ‘그 사람 바보야’는 1970년 성음제작소가 발매한 음반에 실린 추억의 대중가요다. 이 곡은 요즘도 방송을 통해 들을 수 있을 만큼 생명력이 길다. 나훈아 노래 ‘노방초’와 함께 컴필레이션(Compilation album)음반에 담긴 곡으로 정훈희 이름을 널리 알린 계기가 됐다. 컴필레이션음반이란 한 음악가나 여러 음악가들 노래를 특정분류에 따라 모은 음반이다. 편집음반이라고도 불린다.
성음제작소 음반엔 정훈희, 나훈아, 윤영철, 김상희, 태준, 유기오, 이영숙, 인수만, 김훈, 유지성 등 10명의 가수가 부른 12곡이 실렸다. 수록노래들 중 가장 히트한 건 음반제목이자 머리곡인 ‘그 사람 바보야’다.
이 노래를 맨 먼저 취입한 원창가수(오리지널가수)는 정훈희가 아니다. 1965년 가수 박일남과 같이 음반을 낸 1960년대 인기여가수 조애희이다. 조희애 노래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가 ‘그 사람 바보야’를 작곡한 클라리넷연주가 이동기와 결혼, 가수활동을 접으면서 노래가 묻혀버린 것이다.
타이틀곡으로 만든 정훈희 취입음반 ‘인기’
그로부터 5년이 흐른 1970년 인기가수로 떠오른 정훈희가 이 노래의 임자가 됐다. 나훈아 노래와 함께 타이틀곡으로 만든 정훈희 음반의 반응은 아주 좋았다. 가요 팬들 흐름을 눈여겨본 오아시스레코드가 음반커버에 나훈아의‘노방초’를 빼고 ‘그 사람 바보야’와 함께 정훈희의 또 다른 곡 ‘언니에게 물어봐’로 타이틀곡을 바꿔 내놓으면서 재미를 봤다. 특히 남성 팬들 호응이 대단했다. 상큼한 목소리로 젊은 여성의 연애를 귀엽게 표현한 정훈희 목소리에 끌려 음반을 많이 찾은 것이다. 방송에서, 거리에서,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듣고 불러 음반이 불티나게 팔렸다.
‘그 사람 바보야’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의 에피소드도 재미있다. 1965년 봄 박성배 킹레코드사 사장(일명 ‘킹박’)이 작사가 정두수에게 “노랫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했다. 취입할 가수는 KBS전속으로 가요계 생활을 시작한 조애희로 정해져 있었다. 조애희는 ‘산에서 살리라’, ‘사랑해 봤으면’, ‘숲속의 하루’, ‘내 이름은 소녀’ 등 목가풍 노래를 잘 불렀다. 소녀다운 감성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음색과 빼어난 미모로 매력이 넘쳤다.
박 사장은 어느 날 분위기 있는 술집에 작사가 정두수를 데리고 갔다. 클라리넷연주가 이동기가 일하는 곳으로 노랫말을 만들 때 참고토록 멜로디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다. 일행이 들어서자 이동기는 “일부러 오시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곡을 한 번 들어보시는 게 노래 시(가사)를 쓰는 데 도움 될까 해서…”라며 연주를 시작했다. 두 사람은 술을 마시며 곡을 만든 이동기의 클라리넷연주를 들었다. 아늑한 술집분위기여서 그랬던지 정감 있는 멜로디에 감칠맛이 났다.
밤이 늦어 술집을 나온 정두수는 집으로 가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이동기의 연주를 떠올리며 노래와 관련된 생각들을 했다. 하지만 좀체 시상(詩想)이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버스 앞자리에 앉은 두 여성이 주고받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얘, 그 사람 어땠니? 지난번 만났던 사람 말이야.”, “괜찮았어. 그런대로. 눈치 하나 없는 것 빼고는.”, “눈치라니?”, “사실은 말이야 난 그날 미장원에 들러 가느라 아침밥을 걸렀거든. 그래서 배가 몹시 고팠지. 그런데 점심시간이 됐는데도 그 사람은 밥도 안 사주고 그냥 가지 뭐니. 바보 같이, 눈치도 없이.”
정두수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라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으나 마지막 대목의 ‘바보 같이, 눈치도 없이’란 말이 머리에 꽂혔다. 우연히 엿듣게 된 말에서 노랫말 실마리가 잡힌 순간이었다. 며칠 뒤 그는 버스 안 여성들 대화내용에서 아이디어가 떠올라 가사를 쓰고 노래제목도 붙였다. ‘그 사람 바보야’ 가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국내 작사가 중 노래비 13개로 가장 많아
노랫말을 쓴 정두수(본명 정두채)는 시인이자 작사가다. 호는 삼포(三抱). 1937년 4월 18일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평리에서 태어난 그는 부산 동래고,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1년 국민재건운동본부가 주최한 시 현상공모 때 ‘공장’이란 제목으로 당선했다. 1963년 가요 ‘덕수궁 돌담길’로 대중가요 작사가로 데뷔했다. 이후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 문주란의 ‘공항의 이별’, 은방울자매의 ‘마포종점’ 등 3500곡을 작사했다. 특히 작곡가 박춘석과 짝을 이뤄 많은 히트곡을 만들며 지난 반세기 동안 대중가요 중심에서 활약했다.
하동군 고전면엔 ‘정두수 노래비 공원’이 있다. 부근 배드리장터문화회관에 2008년 별세한 친형인 시인 정공채 씨와 함께 형제의 기념관이 있다. 전국 13곳에 정두수 선생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국내 작사가 중 노래비가 가장 많다. 고인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는 ‘하동 정두수 전국가요제’도 해마다 그의 고향 하동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가요사 정리와 책 쓰기에도 남다른 애정과 관심을 기울여 ‘알기 쉬운 작사법’, ‘한국가요 걸작선집 해설’, ‘노래 따라 삼천리’, ‘시로 쓴 사랑의 노래’ 등 저서가 있다. 스스로 ‘노래 시인’이라 불렀고 노랫말을 ‘노래 시’라고도 표현했다.
2015년 8월 14일 갑자기 쓰러진 그는 뇌경색판정을 받고 건강을 되찾는 듯 했으나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 2016년 8월 13일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기까지도 창작열의가 뜨거웠다. ‘작심삼일’, ‘자존심’ 등 유작이 있다. 작곡가 겸 가수인 정음의 정두수 헌정곡 ‘섬진강 19번 도로’ 노랫말에 정두수 선생이 나온다. 유족은 부인(이영화), 장녀(다혜), 큰사위(이한욱), 차녀(지혜), 삼녀(선혜), 막내사위(김대성)가 있다. 고인은 하동군 금오영당에 잠들어 있다.
‘그 사람 바보야’ 작사·작곡한 이동기 씨 별세
‘그 사람 바보야’ 노래를 작곡한 이동기는 서울 대동상고를 졸업한 우리나라 1세대 재즈 클라리넷연주자로 유명하다. 미8군부대에서 연주하며 재즈계에 입문했다. 재즈밴드 색소폰연주자였던 아버지(이준영) 영향이 컸다. 이후 조선호텔소속 악단장을 거쳐 1967년 ‘이동기 악단’을 만들었다. 미국 스윙재즈의 대부인 클라리넷연주자에 빗대 ‘한국의 베니 굿맨’이라 불렸다. ‘그 사람 바보야’, ’그땐 몰랐네’, ’세월’ 등 가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주요 음반으론 아내(조애희)와 함께 발표한 ‘이동기 그리고 조애희’(1993년), 대한민국 재즈 1세대를 다룬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 OST’(2010년) 등이 있다. 2010년 제6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때 소개된 1세대 재즈음악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 ‘브라보! 재즈 라이프’에 출연, 호응을 받았다. 그해 재즈피플 리더스폴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음악에 파묻혀 살아온 그는 간암으로 지난 4월 27일 오전 경기도 용인자택에서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여섯 달 전부터 투병해온 그는 배에 물이 차는 등 건강이 안 좋은데도 별세 한 달 전까지도 서울 대학로 재즈클럽 ‘천년동안도’에서 재즈 1세대 연주자들과 공연했을 만큼 음악을 사랑했다. 유족으론 아내와 아들 2명(성일·영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