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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걸어둔 고전(古典), 밤나무(1)
  •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 승인 2018.12.20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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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엠디저널]만삭의 젊은 여인이 아이를 낳으러 친정에 가다 홀연 산기(産氣)를 느꼈다. 첫아이인지라 무척 당황스럽고 두려웠다. 다행이 양지바른 곳에 담요처럼 마른 낙엽이 소복이 쌓인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남편이 준 새털 옷으로 휘장을 두르고 아이를 출산하였다. 사내아이였다. 자리를 떠나며 여인은 비로소 그곳이 커다란 밤나무 아래라는 것을 알고 나무에 합장(合掌)을 하였다. 아이 이름을 신당(新幢)이라고 지었다. 커서 스스로 법명(法名)을 원효(元曉)라 하였다.

이 일이 일어난 때는 삼국통일 (676년) 전쟁시작 무렵인 진평왕 39년(서기 617년)이었고 장소는 경북 경산군 자인면이었다. 원효의 아명(兒名)은 서당(誓幢)ㆍ신당(新幢)이다, 당(幢)은 당시 말로 털이란 뜻이며 서당은 ‘새털’이란 뜻이라 한다. 여기서 나름대로 그의 이름을 풀이해보려 한다. 서(誓)는 음역(音譯)으로 우리말에서 설날, 설익다, 셔블(서라벌)처럼 새롭다는 뜻이니, 새(鳥)와 발음이 같아 새 신(新)자를 차용하여 신당(新幢)이라고 했을 성싶다.

그의 법명(法名) 원효(元曉)에서 효(曉)란 새벽에 동쪽 하늘에 빛나는 금성을 가리킨다. 당시 사람들은 ‘새벽[始旦]’이라는 뜻의 우리말로 불렀다하니 효성은, 불교를 새로 빛나게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그의 탄생, 아명, 법명이 모두 순수한 우리말이었으나, 당시 우리글이 없어 안타깝게도 한자를 빌려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설총(薛聰)이 태어났고, 설총이 부친의 뜻을 이어 비록 부족한 점이 있지만 최초의 우리글인 이두(吏頭)를 만든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원효대사는 우리 민족이 낳은 최초이자 최고의 사상가이자 저술가라고 한다. 그의 이론과 저술이 신라는 물론 당(唐)과 일본에 널리 알려졌고, 당시 동북아 사상계의 최고봉이었다고 한다. 한국인이라면 한 번쯤은 읽어야 할 것 같아, 그의 저술 중에서 가장 빛나는 저술이라 하는 ⟪대승기신론소별기(大乘起信論疏別記)⟫를 사놓고도 불교지식이 얕아서 한 해 동안이나 손대지 못했다. 지난여름에 용기를 내서 3개월을 씨름한 끝에 겨우 대강의 뜻이라도 이해하게 되었다.

원효 사상의 핵심은 ‘일심(一心)’과 ‘화쟁(和諍)’이라고 한다. 원효는 '도(道)는 모든 존재에 미치지만, 결국은 하나의 마음(一心) 근원으로 돌아간다.'며 만물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종파들의 서로 다른 이론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을 좀 더 높은 차원에서 통합하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를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일심’은 원효 사상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원효는 인간은 누구나 불성(佛性)을 가졌으며, 이러한 마음의 근원을 회복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 마음의 근원이 바로 ‘일심’이다. 원효에 따르면 일심은 모든 법(法), 즉 모든 존재와 현상의 근거이며, 일심이 구현된 세계가 바로 정토(淨土)이다.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眞如, 아트만)와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 따라서 마음을 다스려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면 일체의 차별을 없애고,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깨우쳐,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화쟁’은 다양한 불교 이론들 사이의 다툼을 화해시키는 것이다. 원효는 이제까지의 여러 불교 이론들이 서로 다투어서 쟁론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집착 때문이라며, 마음의 근원을 향하면 쟁론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심’과 ‘화쟁’을 강조한 원효의 사상은 당시 중국 불교의 중요한 쟁점이었던 중관론(中觀論)과 유식론(唯識論)의 대립을 독창적으로 종합하는 의미를 지녔다.

원효는 발생과 소멸이 없는 진여(眞如)와 상대적이고 현상적인 생멸(生滅)이 모두 일심의 두 가지 측면에 불과하며,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고 하였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밤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물 빠짐이 좋고 기름진 양지바른 곳에서 잘 자라기에 양지쪽에서 원효의 탄생을 따스하게 맞이할 수 있었다. 그늘에서는 밤나무혹벌과 같은 해충과 곰팡이에 의해 생기는 줄기마름병 때문에 잘 자라지 못한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밤나무를 심어왔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낙랑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밤이 나왔다고 하며, 1,700년 전 중국 진나라 〈삼국지 三國志〉의 마한편(馬韓篇)에 '굵기가 배만한 밤'이라는 기록도 있다. 밭곡식과 달리 가뭄이 들어도 잘 열리는 밤을, 고려 때부터 흉년에 대비하여 식량자원으로 많이 심었기에 전국 어디에나 밤나무골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오래전부터 밤은 구휼식량이었으니 불성이 깃든 나무임에 틀임이 없다. 밤은 우리의 입맛을 유혹하는 간식거리다. 찬바람이 매섭게 부는 날 후미진 골목 어귀에서 풍겨오는 군밤냄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으랴. 약간 탄 밤 껍질을 벗기기가 무섭게 뜨거운 줄도 모르고 입안에 넣었다가, 노릿한 밤알에 혀를 덴 경험은 내게도 여러 번 있다. 장가들며 아내가 당홍치마에 대추와 밤을 가득 치마폭에 담은 덕분에 나는 자식을 셋이나 얻었다.

이렇게 밤은 다산(多産)으로 자손의 번성 의미하는 외에도 숭조(崇祖)를 상징한다. 밤알을 심은 후 싹이 트고 자란 뒤 밤나무를 캐보면 뿌리에 밤 껍데기가 남아 있음을 볼 수 있다하여, 밤나무를 근본(선조)을 잊지 않는 나무로 여겼다. 가시로 쌓인 한 송이 안에 주로 3개의 밤이 들어 있기에 삼정승(三政丞)을 의미한다하여, 정승이 나길 바라며 사당 앞에도 심었다.

도심을 떠나 대모산 밑으로 이사 와서 세 번째 가을을 맞이했다. 서울이 예부터 밤이 유명한 마한 땅이어서인지, 가을 산자락을 오르다 산사(山寺) 앞에서 주머니 가득 알밤을 주웠다. 배 만하지는 않았지만 무척 굵었다. 밤나무 넉넉한 보시 덕분에 할머니 제사상에도 이 알밤을 올렸다.

잘 익은 밤송이는 가을이 알리는 전령이다. 가을바람이 부는 날 양지쪽 큰 밤나무 밑으로 가보자. 뚝뚝 떨어지는 알밤을 주우며 원효대사의 이런 가르침을 되새겨보자. ‘일심은 평등하고 무차별하며, 일심에서 보면 진여(眞如, 아트만)와 생멸(生滅)이 다르지 않다. 마음을 다스려 마음의 근원을 회복한다면, 만물이 평등하니 차별 없이 사랑하는 자비의 큰 깨달음을 이룰 수 있을지어다.’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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