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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가지에 걸린 고전(古典), 밤나무 Ⅱ

  • 입력 2019.01.22 14:12
  • 수정 2019.03.15 16:07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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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엠디저널]아가씨 같은 향기로 내 마음을 들뜨게 했던 아카시아 꽃들이 모두 져버렸다. 서운한 마음으로 6월초의 창을 열었다. 뜻밖에 앞산 어디선가 저음의 파동들이 귓바퀴를 울렸다. 그 소리는 수많은 남성들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목소리를 따라 달콤한 향기가 물밀듯 몰려왔다.

어느새 나는 커다란 연둣빛 노랑 꽃 홑이불을 덮어쓴 밤나무 아래에 와 있었다. 붕붕! 벌과 나비들은 원초적 향기와 달콤한 꿀에 취해 무도회를 여느라 한창이었다. 아직도 밤꽃에 취할 수 있는 걸 보면, 내게도 아직 청춘의 한 조각이 남아 있다는 뜻일까. 향기 그윽한 그날 밤꽃이 추억에 은은히 빠져들게 하였다.

장마 바로 전 초여름 밤나무골에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이 풍성한 원시의 향연을 잊을 수 없을 성싶다. 흔히 밤꽃의 냄새를 남성(男性) 향기라고 한다. 어떤 이는 없었던 옛 애인을 부르고 싶을 정도로 깊은 향기라고 극찬하고, 또 어떤 이는 원초적 본능 같은 향기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비린내가 난다며 이 향기를 싫어하는 이도 있다. 신경의학자들은 후각은 가장 원시적인 정서로 이어진다 하니, 밤꽃 향이 사람마다 제각기 다른 정서로 옛 기억을 불러낼 성싶다.

밤꽃 향기는 특이하게도 대부분 수꽃에서 난다. 한 뼘 남짓 길고 가는 줄기에 좁쌀만 한 옥빛 꽃들이, 무수히 다닥다닥 붙어서 굵은 뜨개실처럼 늘어진 꽃이 수꽃이다. 감꽃이나 호박꽃과 같이 암꽃과 수꽃이 별개인 경우, 보통은 암꽃이 크고 향기 또한 수꽃보다 진하다. 암꽃의 씨방 부분이 통통하고 화려하며 꿀샘에 꿀까지 담고 있어서다. 그러나 밤꽃의 경우 수꽃이 화려하고 향기가 진하다. 이러기에 밤꽃에서 남성 향기가 나는지도 모른다.

반면에 밤나무 암꽃은 쪼그라든 바늘 모양의 작은 포에 싸여 있고, 암술대가 일여덟 개 솟아 있는 정말 볼품없는 모습이다. 수꽃이 워낙 무성하고 향기가 진하니, 잘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이런 암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이런 암꽃 모양에서 가을이면 알이 차서 가을을 상징하는 잘 익은 통통한 알밤 모습을 연상하기는 쉽지 않을 성싶다.

밤나무는 보통 3년생이면 수확이 가능하여, 비교적 일찍부터 작물화가 되었다고 한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명저(名著) ≪총, 균, 쇠≫에서 야생식물의 작물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도토리의 작물화가 늦은 이유는 같은 속과 과에 속하는 밤나무와 달리, 10년생이 되어야 열매가 열리며 품종개량 노력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타닌산 독소를 제거하는 품종을 길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그는 만약 도토리나무가 밤나무처럼 일찍부터 작물화가 되었다면 인류의 식량문제가 훨씬 쉽게 해결되었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밤나무는 인류에게 식량문제에만 도움을 준 게 아니었다. 밤은 특이하게도 무수히 많은 따가운 가시로 중무장한 밤송이인 겉껍질 안에, 반들거리는 단단한 갈색 속껍질로 노란 옥빛 과육을 솜털로 거듭 감싸고 있다. 이렇게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때가 되면 저절로 벌어져, 시인묵객들에게 여러 문학 소재까지 제공한다. 이런 밤나무를 불세출의 시인 김삿갓이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유교사회인 조선시대에 있었던 일이라 다소 현실성이 없어 보이지만, 재기 넘치는 한시(漢詩) 문담 일화를 소개한다.

김삿갓의 문재(文才)를 흠모하던 한 숫처녀가 김삿갓과 하루 밤을 보내게 되었다고 한다. 김삿갓으로는 너무나 쉽게 잠자리가 이루어져 미심쩍었던지 다음과 같이 운(韻)을 뗐다고 한다.

毛深內闊 必過他人 (모심내활 필과타인)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필시 다른 사람이 지나갔나 보구나.)

간단한 옛날 형식의 한시(漢詩)체인 사언절구(四言絶句)로 운을 뗀 것을 보면, 김삿갓이 처녀의 실력을 가벼이 본 게 분명하다. 이에 억울한 처녀가 울면서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발달한 근대 한시체인 칠언율시(七言律詩)로 답을 한 걸 보면 ‘흥! 나를 무시하지 마세요!’라고 톡 쏘아붙인듯 하다.

溪邊楊柳不雨長 後園黃栗不蜂圻 (계변양유불우장 후원황율불봉기)

(시냇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절로 자라고, 뒷동산 밤송이는 벌이 쏘지 않아도 절로 터진다오.)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사진제공: 게티이미지뱅크

논어(論語)에는 전편을 통하여 나무를 소재로 한 단락이 3번 있고 나무의 종류는 4가지다. 그 중 밤나무를 소재로 한 글이 맨 먼저 팔일편(八佾篇)에 나온다. 당시 노(魯)나라 임금인 애공(哀公)이 공자(孔子)에게 나라의 근본을 모시는 사(社)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물었다.

“하(夏)나라는 목신(木神)으로 소나무(松)을 심고, 은(殷)나라는 편백나무(栢)를, 주(周)나라는 밤나무(栗)를 심는 이유가 뭡니까?”

이에 공자의 제자 중에서 말재간이 뛰어났던 재아(宰我)가 농담 비슷하게 답하면서, 당시의 풍습을 비웃는 말로 ‘율(栗)자가 두려울 율(慄)자와 비슷하여 백성들을 두려움에 떨게 위함 일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재아를 꾸짖는 대목이 있다.

“이룬 일은 말하는 것이 아니고, 끝맺은 일은 윗사람이나 남에게 간하는 것이 아니며, 이미 지나간 일은 그 허물을 탓하지 않는 것이다(成事不說 遂事不諫 旣往不咎 성사불성 수사불간 기왕불구).”

우리가 고전을 배우는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성찰을 통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함이 아닐까. 요즘 집권세력을 포함하여 역대 모든 정권이 초기에는 정신없이 분주하였다. 과거사를 바로잡아 나라를 바로잡겠다며 늘 밤꽃에 든 벌처럼 정신없이 붕붕거렸다. 과거를 반추(反芻)하고 비판하는 것은 좋은 일이나, 비판 자체가 목적이어서는 안 되고 미래를 위한 반추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 위정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제발 정신 차리고 밤나무 아래로 가서 논어의 위 구절을 되새겨 보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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