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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는 인간의 무늬를 읽는 시인한국의사시인회 초대회장 유형준 시인 interview

가라앉지 못한 것들

가라앉지 못한 말들

목까지 잠겨

목까지 잠겨

아니,

조금만 조금만 더 잠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출렁이는 경계에서

더 이상 허공을 떠돌지 않을

언어에

목이 메어

목이 메어

띄엄띄엄 외로운

가라앉지 않는 것들

가라앉지 않는 것들

유담 시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 中에서-

[엠디저널]“의료는 철저히 인간탐구와 인간이해를 전재로 해야 합니다. 질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과 기술, 인간에 대한 인문학적 지혜를 아울러 활용해야 진정한 의료가 작동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의료인문학(medical humanities)의 능동적인 작용입니다. 환자가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올 때 ‘아, 어디가 아프겠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의사로서의 인문학이에요. 의사는 환자의 무늬를 보고 진단하고, 여러 결과에 따라 치료합니다. 인문학이란 그런 것이지요. 인문학은 인간 자체가 아닌 인간의 무늬를 읽는 학문입니다.”

의학과 인문학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어찌 보면 이들은 서로에게 인접하여 가장 잘 어울리는 학문. 또한 의학은 병의 흔적을 찾는 학문이기에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인문학이야말로 의사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하다고 유형준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의사이기에 앞서 인간은 늘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에 인문학을 통해 겸손을 배우며 스스로 자아를 찾아가야 한다는 것이 유 시인의 지론이다.

의학과 문학을 넘나들며 의료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슴으로 인간의 무늬를 읽을 수 있는 진정한 의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柳潭 유형준 시인을 MD 저널이 만났다.

유년의 유 시인, 글쓰기의 즐거움을 배우다!

“어린 시절 보잘 것 없는 글이라도 써서 보여드리면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저를 칭찬해 주셨습니다. 문장이 가진 논리나 깊이에 앞서 저는 글을 쓰는 즐거움부터 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그 시절 저의 유일한 취미는 글쓰기였습니다.”

한학(漢學)을 하셨던 아버지로 인해 자연스럽게 문학과 예술적 환경에서 자라온 유형준 시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큰 형님은 중국시(특히 唐詩)를 전공했고, 수년전 작고한 둘째 형님 역시 미국에서 시인으로 활동했다. 유 시인 역시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글쓰기가 몸에 배어 있었고, 그의 유일한 취미 역시 글을 읽고 쓰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부를 시작해 중?고등학교에서도 신문과 교지를 만들며 학창 시절을 보냈다. 그것이 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고, 그 시절 그의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주변에 모두는 유 시인이 당연히 문과를 택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문과를 지망한 두 형님, 그리고 굴먹한 집안 형편으로 문학을 전공하고자는 말을 부모님께 드리기는 언감생심이었다. 아니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취직을 해서 집안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게 자식이요 형제 된 도리라 생각했다.

“당시에는 화학공학과가 가장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 때 화공과는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취직자리가 다 정해져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어머님께서 반대하시며, 저에게 의학의 길을 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죠.”

유 시인은 어머님의 바람대로 서울의대에 합격을 했다. 대학은 지금까지의 생활과는 달랐다. 의대생 유형준 시인에게 문학은 사치,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공기 같은 사치였다.

허락되지 않은 일탈, 유일한 탈출구는 문학

해야 할 공부는 넘쳤고, 시간은 모자랐다. 6남매 뒷바라지하는 부모님의 노고를 덜어드리며 대학을 다니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는 시간 외에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당시엔 저 뿐만 아니라 과외를 해서 학비나 용돈을 마련해야 하는 동기들도 많았습니다. 특별한 생각은 아니었는데, 제가 공부를 가르친 학생들의 사진을 하나씩 모았죠. 그렇게 모아보니 앨범 하나가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6년간 유 시인이 가르친 학생들이 무려 84명이 되었다.

유 시인은 절절했고, 일탈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마뜩한 탈출구는 문학이었다.

유 시인은 늘 그러했듯이 문예부에 가입했다. 당시 서울의대에는 잡지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뜻을 같이 하는 부원들과 같이 서울의대 잡지 ‘이바돔’을 창간했다. 그리고 이후 본과에 올라가서는 수준 높은 글이 엄선된 ‘함춘문집’을 발간하게 된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진 않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사상은 물론이고 머리와 가슴, 그리고 뇌와 심장이 기호화 되고, 활자로 표현되는 것이 마치 마법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죠. 흔히 ‘글로 모든 것을 담을 수 없다’고 하지만 단 한 문장, 아니 단 한 글자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글의 마력이 아닐까요.”

유 시인이 바쁜 의대생 시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언제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글의 마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졸업 후 유 시인은 수련을 마치고 내분비내과 전문의가 되고, 의사로의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의사문인으로 등단, 그리고 시인의 길을 걷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문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유형준 시인은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인문학이며, 의학적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통로는 문학이라고 강조하며 스스로 실천해 왔다.

그런 노력으로 유 시인은 1992년에는 수필가로, 그리고 1996년에는 시인으로 등단을 한다. 하지만 작품을 쓰면 쓸수록 늘 어디인가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이 느껴졌다.

“글에는 힘이 있어야 하고, 새로움이 묻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당시 저는 예전의 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체된 작가는 독자에 대한 무례가 아닐까요.”

유 시인은 등단작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내려놓고, 긴 호흡으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성찰이라는 시간을 가지며 2005년, 그의 첫 번째 시집 ‘가라앉지 못한 말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세월은 흐르는 게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 유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을 통해 이러한 메시지를 전한다.

“차 안에 타고 있노라면 길가에 가로수가, 그리고 옆의 집들이 뒤로 줄지어 달려가던 기억이 있습니다. 실제로는 우리가 가고 있는데 세월이 간다고 여기는 것이죠. 마치 세상은 가만히 있고 하늘이 돌고 있다고 목숨 걸고 믿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문득 떠오르는 아련한 세월을 누가 흘러간다고 할까요.”

삶도, 언어도 공중에 붕 떠 허공을 떠돈다. 시간을 가라앉혀 무게를 얹으면 그것이 쌓여 세월이 되지 않을까. ‘가라앉지 못한 말들’에 담긴 시에는 모든 것은 서로 이어져 있는데 내가 떠 있다고 생각하고 내 스스로 가라앉히지 못한 탓이라는 시인의 성찰이 잔잔한 울림이 담겨 있다.

유 시인은 ‘문학예술’과 2013년 ‘문학청춘’으로 다시 등단하고, 그는 유담(柳潭)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다.

“수필은 나를 통해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쓸 수 있는데, 시는 다른 세계의 내가 되지 않으면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2014년부터 시를 쓸 때는 유담이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2014년 유 시인은 필명 ‘유담’으로 그의 두 번째 시집 ‘두근거리는 지금’을 출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근거리는 지금’이 아니라 ‘지금이 두근거린다’고 해야 하겠지요. 사람이 숨 쉬고, 심장이 뛴다는 것은 결국 세월이 박동하는 것이 아닐까요. 세월도 지금의 박동이 쌓여가는 것이니까요.”

인문학,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도구

시와 수필을 넘나들며 문학적 깊이를 보여주는 유형준 시인, 그의 배경에는 인문학이 있다.

유 시인은 인문학에 문(文)은 글월 문이 아니라 무늬 문이며, 인간과 문학이 아닌 ‘사람의 무늬를 읽는 학문’이라고 설명한다.

“인간의 무늬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는, 체계화할 수 없는 표식이자 인간을 이해할 수 있는 사소한 기척입니다. 신이 아닌 인간의 영역에 서 있는 우리는 본질보다 무늬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시선과 감각이 시들지 않고, 무감각해지지 않도록 인지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디지털 영상과 디지털적 상상력이 넘치는 지금 인간의 무늬는 생각지 못한 형태로 드러나 인문학의 범주를 넓히고 있습니다. 그 낯섦과 생소함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인간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치열한 태도와 그에 적절한 대응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 시인은 나의 흔적(무늬)과 당신의 흔적(무늬)에 어떤 차이를 두지 않고 배려와 존중을 추구해야하며,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인간’, 그리고 사회로의 성장이 우리가 인문학을 알고 익혀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한국의사시인회 창립의 배경도 인문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문학과 의학의 융합은 직관, 상상력, 그리고 창의적 공감을 바탕으로 서로를 풍부하게 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의학과 문학을 과학과 예술로 구분해 각각의 영토에 제각기 놓여있습니다. 의학과 문학 사이에 놓여있는 고급스러운 구별을 헐어내고 사귀어, 서로 오가는 통섭通涉의 능력을 갖춘 의사시인의 능동적 역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유 시인은 이와 같은 취지를 밝히고 2012년 6월 9일 한국의사시인회를 창립시킨다.

이후 한국의사시인회는 ‘닥터 K’를 시작으로 ‘환자가 경전이다’, ‘카우치에서 길을 묻다’, ‘가라앉지 못한 말들’, ‘그리운 처방전’, 그리고 지난 해 ‘왜 우리는 눈물이 나는 걸까?’까지 6집의 사화집을 발간했다.

현재 유 시인은 의료인문학은 물론 각종 매체나 세미나를 통해 인문학에 대한 강의를 지속하고 있으며, 문학청춘작가회 초대회장, 한국의사시인회 초대회장, 쉼표문학회 고문, 서울시의사회 의학문인회, 함춘문예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또한 CM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당뇨병을 비롯해 노인의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의학과 문학의 접경’과 ‘의학 속 문학’에 대해 연구 중이며, 앞으로 의대생 독서 캠프와 노인문학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진행할 예정이다.

사물에 대한 진지한 관찰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성찰, 그리고 인문학을 통해 의학과 문학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시인 유형준, 그는 지금도 조용히 세월을 쌓으며 우리를 두근거리게 할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신영인 기자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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