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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

  • 입력 2019.02.22 10:34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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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원장님 안녕하세요.”

“아니, 이 어른이 누구시더라? 박 회장님 맞으시죠?”

“네 맞습니다. 소나무 덕분에 저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진료실로 들어오며 반갑게 인사하는 이는, 고향에서 생의 마지막을 정리하겠다던 분이었다. 낙향한 지가 5년은 넘었을 성싶었다. 그분의 고향은 내 고향 바로 옆인 예천이다. 예천은 소나무이지만 사람처럼 등기부에 토지까지 소유한 600년 된 석송령(石松靈)으로 유명한 고장이다. 그는 육칠년 전에 한 달 이상 되는 기침으로 내게 와서 흉부X선 사진을 찍어보았다. 폐암 의심소견이 있어 대학병원으로 전원하였고, 폐암으로 수술까지 받았다. 그러나 이미 전이가 많이 진행한 상태라 암 덩어리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채 낙향하였다.

석송령, 사진제공 예천군
석송령, 사진제공 예천군

마지막으로 고혈압 약을 처방 받으러 온 날 그는, 재산을 모두 정리했다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때 낙향하며 오래된 고향집을 수리할 때 몇 가지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도 했다. 무엇보다 옛집과 어울리는 소나무 재목을 구하기가 어려웠단다. 한때 선영(先塋) 앞을 지키는 소나무인 도래솔에 유혹이 가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곧 잘못을 뉘우치고 돈을 들여 재목감을 샀다고 했다. 그는 무성한 선영 앞 도래솔 사이에 평상을 마련하고, 틈만 나면 그곳에서 잤다고 했다.

도래솔 아래서 처음에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으나, 나중에는 그곳이 그의 영원한 안식처인 음택(陰宅)이라 생각하니 점차 마음이 편해졌단다. 3개월마다 상경하여 진찰 받던 중, 놀랍게도 1년쯤 되자 암 덩어리가 점차 줄어든다는 소견을 들었다. 주치의는 무척 드문 예로 아마도 피톤치드(phytoncide)효과일지도 모른다고 했단다. 용기를 얻은 그는 겨울에도 낮에는 소나무 밑에 비닐천막을 치고 살았다. 이런지 2년 만에 놀랍게도 정밀 검사에서도 암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선영 앞 도래솔을 살린 보답이라며 감사할 다름이라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어디에서나 산과 마주할 때 소나무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한국인은 소나무와의 인연은 태어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소나무로 지은 집 안방에서 아이가 태어났고, 마른 솔가지로 데워진 온돌에서 산후조리를 했다. 탄생을 알리는 금줄에는 솔가지를 끼웠으며, 자라면서는 뒷동산 솔숲은 놀이터였고 일터였다. 송홧가루로 만든 다식(茶食)을 명절음식으로 먹었고, 소나무가 있는 십장생도가 그려진 병풍을 치고 살았다. 행세하는 선비라면 송연묵(松烟墨)으로 간 먹물을 붓에 묻혀 일필휘지 할 수 있어야 했다. 세상살이가 끝나 소나무로 만든 관 속에 들어가 땅속에 묻히고도, 아직 소나무와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도래솔로 주위를 둘러치고는 다시 영겁의 시간을 소나무와 함께 했다.

소나무 옹이를 쪼개서 간솔 가지를 만들었다. 이를 등잔 밑에 두었다가 어둔 밤을 밝히는데 요긴하게 썼다. 옹이엔 송진인 송근유(松根油)가 농축되어 있어 불을 붙이면 빛이 밝고 오래 갔다. 송근유를 건류하면 목초 액, 송근타르 등을 얻는데, 일제말엽 일제는 부족한 군수자원을 송근유에서 얻고자 우리나라 소나무와 사람들을 혹사하였다. 내 어머니의 왼쪽 무릎에는 아직도 깊은 흉터가 있다. 일제 때 학교에 의무적으로 간솔 한 짐을 내야 해서 간솔 따다 난 상처라 했다. 내 고향에 현존하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인 봉정사 극락전이 있다. 이 고찰을 뒤로 한 산길 곳곳 아름드리 소나무들에 모두 깊은 상처가 나있다. 일제 때 송진을 채취한 흔적이라고 한다. 소나무는 이렇게 우리 민족과 상처를 같이 했다.

당(唐)의 도연명이 동령수고송(東嶺秀高松)이라 노래했듯이, 동양에는 소나무를 칭송하는 명문장들이 많다. 그 중에서 나는 사명당(四溟堂)의 「청송사(靑松辭)」를 좋아한다. “소나무여 푸르구나. 초목의 군자로다. 눈서리에도 상하지 않고, 비와 이슬에도 영화로워 하지 않구나. 늘 변함이 없구나! 겨울, 여름 항상 푸르구나. 솔잎 사이로 달이 떠오르면 금빛이 나고, 바람 불면 거문고을 켜는구나(松兮靑兮, 草木之君子, 霜雪兮不腐, 雨露兮不榮, 不腐不榮兮, 古冬夏靑靑, 靑兮松兮, 月到兮節金, 風來兮鳴琴)”라고 예찬하였다.

일찍이 신라의 솔거가 그린 황룡사 소나무 벽화에 진짜 소나무인 줄 알고 새가 날아들었다는 고사(古事)처럼, 우리나라에는 소나무 그림이 많다. 그 중에서도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歲寒圖>는 현존하는 그림 중에서는 으뜸으로 친다. 이 그림 중의 노송(老松)이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고결한 풍모를 잃지 않는 점이 선비와 닮아서일 성싶다. 이 소나무는 굴피모양이 큰 점이나 자태로 보아 제주 해송(海松)이 분명하다. 추사는 세한도라는 제목을 ≪논어(論語)≫ <자한>편에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편백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孔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는 대목에서 따왔다. 그림을 감상한 청(靑)의 옹방강(翁方綱) 등 학자들이 찬시(讚詩)나 발제(發題)로 극찬한 기록이 세한도에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많은 분들이 송백에서 백(栢)을 잣나무로 잘못 알고 있는 이가 있는데 분명 편백나무라고 한다(한문학자 고려대 金彦鍾 명예교수 자문).

금당실 전통마을, 사진제공 예천군
금당실 전통마을, 사진제공 예천군

공자께서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라는 말은 ‘태평한 때에는 군자와 소인을 구별하기 어렵고,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해야만 충신, 열사, 의사를 알게 된다.’는 뜻이다. 논어에서 이 명언에 바로 이어서 공자께서 ‘지자불혹 인자불우 용자불구(知者不惑, 仁者不憂, 勇者不懼)’라 했다. 지혜가 있는 이는 미혹(迷惑)되지 않고, 어진 이는 근심 걱정이 없으며, 용기 있는 이는 어떤 일을 당하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자께서 송백의 후조를 언급한 후에 지인용(知仁勇)으로 말을 이어간 깊은 뜻이 있을 성싶다. 어리석지만 감히 오늘에 비추어 그 뜻을 헤아려본다. 지금 세상의 동서(東西)가 모두 난세라면, 이를 구할 지인용을 갖춘 소나무 같은 군자가 나와야 한다는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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