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궁중의 우리음악 수제천

정초 의미 되새기는 우리 음악

  • 입력 2019.02.25 10:40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년의 세월을 달려온 혼의 소리, 궁중음악의 백미 수제천

수제천 연주 모습, 사진제공 구글
수제천 연주 모습, 사진제공 구글

[엠디저널]설은 새해의 첫 시작이며 음력 정월 초하룻날로 원단, 세수, 정초라고도 부른다. 이는 묵은 해를 정리하여 보내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다시 출발하는 첫날이다. 설의 어원에 대해 몇 가지 설(說)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섧다”라는 뜻으로 알려진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수광의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달’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으로, ‘도’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다. 한 해가 지남으로서 점차 늙어 가는 처지를 서글퍼 하는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 설이다. 각종 세시기(歲時記)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표현하는데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를 시작하라는 뜻으로 본다.

정신적 산물인 무형유산은 물질적 산물인 유형유산과 함께 민족유산의 두 축을 이룬다. 유형유산이 사물로 이루어진 고정체라면, 무형유산은 언어를 비롯한 보이지 않는 일종의 규칙과 행위(기술, 지식, 관습, 신앙, 예술, 놀이 등)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생동체이다.

소리로 전하는 덕담(德談)

문화적인 측면에서 음악을 구성하는 소재로서의 소리(音, 음)는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다양한 소리를 표현하는 음악에서 서양의 음악과 우리 음악은 하나의 음악으로서 음을 통한 인간 정신의 표현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재료(音)나 방법은 전혀 다르다.

정악(正樂)은 기품이 높고 고상하며 바른 큰 음악이라는 말로, 과거 고려, 조선의 궁중(宮中)음악과 양반, 사대부들이 즐기던 음악 즉 풍류악(風流樂)을 통틀어 말하며, 좁은 의미로는 아악(雅樂)이라 한다. 정악이라는 호칭은 구한말 1909년 ‘조양구락부(調陽俱樂部)’가 발족하면서부터 쓰였다.

궁중음악 가운데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뛰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음악인 수제천(壽齊天)은 궁중의례와 연회를 통해 전승되어 왔다. 수제천은 궁중음악과 선비들의 수양을 위한 정악의 범주에 들어가며 아악곡의 백미(白眉)로 일컬어지는 관악 합주곡으로 약 15분 정도의 곡으로 피리, 대금, 해금, 아쟁과 같은 선율악기가 주축이 되어 신비한 느낌을 자아낸다.

수제천의 주된 가락을 담당하는 악기인 피리는 태평소와 함께 서양음악의 오케스트라에서 조율의 기준이 되는 오보에처럼 겹혀(또는 겹서, 한자어로 복황(複簧), 서양악기의 더블리드(double reed)라고 표현됨)를 가진 악기이다. 연음(連音) 형식의 유장한 선율진행이 돋보이며 장단의 틀을 벗어나 느린 속도로 힘있게 흘러가는 역동성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나라의 태평과 민족의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의 궁중음악으로 본래의 곡명은 ‘정읍(井邑)’ 또는 ‘빗가락정읍(橫指井邑)’이라고 불리지만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수명이 하늘처럼 영원하기를 기원’하는 의미가 깃든 ‘수제천’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본래 고려 이후로는 궁중에서 무고(舞鼓)를 추면서 ‘달아 높이곰 돋아사’로 시작되는 ‘정읍사(井邑詞)’를 노래하던 음악이었으나, 조선 중기 이후로 가사는 부르지 않게 되고 관악 합주곡으로 전승되었다. 연주곡인 수제천은 또한 중요무형문화재,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궁중무용인 처용무(處容舞)의 반주 음악으로도 쓰인다. 처용무는 궁중에서 국가의 중요행사 때 처용의 가면을 쓰고 추던 탈춤이다.

수제천의 유래가 되는 ‘정읍사’는 7세기 중엽부터 불리웠던 백제가요로 백제시대 고려인들의 입에서 불려오다 조선조에 와서 처음으로 문자화된 노래이며 현존하는 최고의 노래이다. ‘달하 노피곰 도드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로 시작되는 정읍사는 정읍에 사는 한 행상의 아내가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높은 산에 올라 먼 곳을 바라보며 남편이 혹시 밤길에 위해(危害)를 입지 않을까 마음을 졸이는 백제가요이다. 이 가락이 전 민중에 회자되며 궁중에까지 전파되고 궁중의 악사들이 비중 있게 음악적 형식을 가미하여 연주하게 되었으며 무용과 창사를 합한 종합 연희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는 민중의 노래에서 출발하여 전 국민적인 애창곡이 된 역사 문헌상의 첫 곡이라 할 수 있겠다.

끊길 듯 끊어지지 않으며 이어가는 선율의 흐름과 구성면에서 수제천은 선으로 시작하여 선으로 맺어지는 선율의 음악이다. 각기 다른 악기들이 각자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전체에 조화되는 독특한 선율은 현실 공간을 넘어 무한의 공간인 하늘과 땅으로 확장된다. 수제천은 서양에서도 ‘하늘의 음악이 지구에 남은 유일한 곡’이라고 극찬할 정도로 귀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이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