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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분위기로 봄을 물씬 느끼게 해주는 가곡, ‘봄 처녀’

일제강점기 때 이은상 作詩, 홍난파 작곡…시조가 가사로 쓰인 첫 노래

  • 입력 2019.03.19 11:00
  • 기자명 왕성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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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 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님 찾아가는 길에 내 집 앞을 지나시나

이상도 하오시다 행여 내게 오심인가

미안코 어리석은 양 뉘게 물어볼까나

[엠디저널]이은상(李殷相) 작시(作詩), 홍난파(洪蘭坡) 작곡의 ‘봄 처녀’는 낭만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는 동요풍의 가곡이다. 우리 가곡들 중 시조가 가사로 쓰인 첫 노래다. 노랫말에서 새 봄을 처녀같이 우아하게 나타내 정겹다. 내용도 밝고 서정적이다. 새 봄이 온 것을 봄 처녀에 비유한 문인 이은상의 감성이 음악인 홍난파 특유의 멜로디와 어우러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가곡이 됐다. 중학교 2학년 음악교과서에 실려 학생들도 이 노래를 잘 안다.

‘봄 처녀’는 1932년 작곡돼 1933년 홍난파 가곡작품집 ‘조선가요작곡집’을 통해 선보였다. 홍난파는 “이은상의 시조내용이 마음에 들어 작곡했다”고 회고했다. 그가 작곡한 가곡들 중 동요스러운 순박한 느낌이 유독 강한 노래다. 한국적이면서도 토속의 맛이 은근히 나는 노랫말과 부드러운 멜로디로 부르기가 쉽다. 홍난파는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뒷맛을 남기는 선율을 붙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는 게 전문가들 평가다. 반주도 마찬가지다. 단순하지만 공간을 화음으로 적절히 메워나간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다. 동요 같으면서도 동요가 아닌 훌륭한 가곡으로 끌어올린 바탕이기도 하다.

왈츠 풍 빠르기 4분의 3박자, 바장조

이 노래는 왈츠 풍 빠르기의 4분의 3박자, 바장조, 세도막 형식의 유절가곡(有節歌曲)이다. 유절가곡이란 가사의 각 절이 같은 선율로 돼있는 가곡을 말한다. 노랫말의 각 절이 제1절의 선율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통작가곡(durchkomponiertes Lied)의 대칭어다. 가사가 규칙적 형태로 쓰이고 그 내용이 같은 멜로디를 되풀이해도 될 때 이 형식을 갖춘다. 가사엔 비교적 단순한 서정시가 많다. 슈베르트의 ‘들장미’ 등이 좋은 예이다.

여린 박자로 시작하는 ‘봄 처녀’의 선율은 5음계적으로 짜여있다. 멜로디가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여운을 느끼게 해준다. 화성은 주 3화음, 부 3화음, 부속화음 등 홍난파 가곡들 중 가장 다채롭게 쓰였다. 주 3화음이 늦게 이어(‘~슬 신으셨~’)지는 게 특징이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이 노래는 부르고 듣는 사람에 따라 나름대로의 애환을 느끼게 했다. 각자의 다른 해석과 느낌을 갖게 한 것이다. 독립운동가, 종교인, 교육자, 학생,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제각기 바라는 소망으로 이 노래를 부르고 들었다. 노래가 만들어진 때는 일본 헌병에 의한 강압통치가 이뤄지려던 무렵이다. 조국독립을 바랬던 홍난파의 속내가 노래에 스며있다. 노래제목 ‘봄 처녀’도 그런 깊은 의미가 담겼다. 우리 강산에 봄이 찾아와 나비가 날아드는 모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것이란 해석이 있다. 특히 올해가 3·1운동 100주년이어서 이 노래가 더욱 눈길을 끈다.

‘봄 처녀’는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노래 상위순서에 들어간다. 2018년 봄 ‘L.POINT 리서치 플랫폼 라임’이 남녀 3만 명을 대상으로 물어본 결과 버스커버스커 ‘벚꽃엔딩’이 45.0%로 1위, 로이킴이 부른 ‘봄봄봄(18.4%)’이 2위, HIGH4&아이유의 ‘봄 사랑 벚꽃 말고(6.8%)’가 3위를 했고 가곡 ‘봄 처녀(4.6%)’가 4위를 했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 사람이 사랑하는 가곡 40’에도 들어갔다. 예술의전당이 2015년 여름 광복 70주년을 맞아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가장 좋아하는 가곡’ 40곡을 뽑은 결과 4위를 차지했다. 전문심의위원들이 고른 70곡 중 1차 온라인설문(388명)으로 40곡을 추리고 2차 오프라인설문(1390명)을 거쳐 순위를 매겼다. 1위는 ‘그리운 금강산’, 2위는 ‘가고파’, 3위는 ‘보리밭’이었고 ‘봄 처녀’가 뒤를 이었다.

‘봄 처녀’는 새로운 버전의 가요로도 태어났다. 2015년 3월 가수 선우정아가 이 노래를 중간에 넣어 만든 같은 제목의 대중가요 ‘봄 처녀’를 발표, 눈길을 모았다. 전통가곡의 한 구절이 녹아든 댄스음악 바탕의 이채로운 신곡으로 매스컴을 탔다. 추억의 대중가요들 중 반야월 작사, 송운선 작곡, 은방울자매가 부른 ‘봄 처녀’와 박영호 작사, 손목인 작곡, 이난영이 부른 ‘봄 처녀’도 있으나 가사와 멜로디가 전혀 다르다. 물론 노래의 맛도 제각각이다.

노랫말을 만든 이은상(1903~1982년 9월 18일)은 시조작가이자 사학자, 수필가다. 100여 권의 저서가 말해준다.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이다. 경남 마산에서 이승규(李承奎)의 둘째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8년 아버지가 세운 마산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어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공부하다 1925~1927년 일본 와세다대학 사학부에서 청강했다. 1931~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 동아일보 기자, 신가정 편집인, 조선일보 출판국 주간 등을 지냈다. 그는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지냈다. 그는 1921년 두우성이란 필명으로 아성(我聲)(4호)에 혈조(血潮)란 시를 발표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 창간 무렵부터 펼쳐 평론, 수필, 시를 발표했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시조인으로서 자리를 굳혔다. 당시(唐詩)를 시조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이론을 펼치기도 했다. 1932년 첫 개인시조집 노산시조집을 냈다. ‘고향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은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까지 만들어졌다.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부드러운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도 많이 섰다. 광복 후엔 사회사업에도 앞장섰다. 사회장으로 치러진 고인은 국립묘지 현충원에 잠들고 있다. 고향 마산에 그의 시조를 새긴 ‘가고파’ 노래비가 5곳 세워져 있다. 같은 노래의 비가 한 지역에 5곳 세워진 건 ‘가고파’가 유일하다.

경기도 화성시에 ‘홍난파 생가’

‘봄 처녀’ 작곡가 홍난파는 우리나라 ‘가곡의 아버지’로 불린다. 바이올린연주자, 소설가, 평론가로 전천후 예술가다. 43년이란 짧은 생애에 남긴 주옥같은 가곡, 동요, 대중가요, 관현악곡 등 근대음악을 개척한 음악계 거장으로 꼽힌다. ‘퐁당퐁당’, ‘낮에 나온 반달’, ‘오빠 생각’ 등 그가 만든 100곡이 넘는 동요는 어린이들에게 아름다운 동심의 나래를 활짝 펴게 했다.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홍난파길 32(활초리 283-1)에 가면 홍난파 생가가 있다. 사라진 생가를 1986년 4칸 규모의 ㄱ자형 초가로 방 2칸, 마루, 부엌으로 되살렸다. 홍난파는 1898년 4월 10일 이곳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남양. 중학부 시절부터 서양음악을 접한 그는 일본, 미국에서 유학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작곡한 대표노래는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봄 처녀’, ‘금강에 살으리랏다’, ‘고향의 봄’ 등이 있다. ‘처녀혼’, ‘비겁한 자’, ‘새벽종’ 등의 책도 썼다. 그는 순수예술잡지(삼광)을 창간해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도 일했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에 얽혀 옥살이를 했고 1941년 8월 지병이 더 나빠져 삶을 마쳤다.

홍난파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쓰던 물건과 작곡한 노래들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유품들이 단국대 죽전캠퍼스(난파 홍영후 전시실)에 기증돼 전시 중이다. 음악계에 남긴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음악영재를 찾아내는 ‘난파음악제’도 열리고 있다. 사단법인 난파기념사업회가 우리나라 음악을 빛낸 음악가에게 ‘난파음악상’도 주고 있다. ‘난파음악상’ 시상은 1968년 제1대 정경화를 시작으로 금난새, 백건우, 김대진, 조수미, 장한나, 손열음, 이영조, 윤학원 등과 지난해 10월 ‘칸타타 한강’ 작곡가 임준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를 포함해 제50대까지 이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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